요18:31,32 예수가 하나님인 진짜 이유(1)

조회 수 879 추천 수 63 2009.09.19 16: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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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하나님인 진짜 이유(1)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8:31,32)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정서적, 종교적, 영적 감동이나 깨우침을 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일반 고전서적이나 다른 종교의 경전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믿는 것입니까? 그럼 혹시 교회가 다른 사안에서 잘못 가르치는 점이 있다면 어떻게 분별할 것입니까?

성경이 일반 서적이나 경전과 크게 두 가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절대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말씀을 전인격을 동원해 겸손하게 대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그분의 자녀다운 합당한 반응을 실제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이 지금 나를 향해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절대적 진리라는 확신 위에서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절대적 진리란 항상 절대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특정한 사건을 역사적 제도와 관습 등에 비추어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금 내 형편에 적합한 계명, 교훈, 위로, 격려만 찾으려 해선 안 됩니다. 말씀에 진짜 자신을 완전히 맡길 각오 없이는 읽으나 마나입니다. 자기에게 합당한 말씀만 찾을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컨대 자기에게 성경을 끌어와 맞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성경에 갖다 맞추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데려와 재판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유월절에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긴급하게 재판을 진행하느라 전날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닭이 세 번 울 즈음인 꼭두새벽부터 관정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가 종교사상범에 불과한줄 이미 눈치 채고 유대인들의 법대로 처리하라고 권했습니다.

그에 대해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사람을 죽일 권이 없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죄를 공정히 심사할 생각은 전혀 없이 무조건 사형을 선고해야겠다고 작정하고 덤빈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덮어씌워 죽이고야 말겠다는 뜻입니다. 재판의 공의를 굽게 하지 말라는 율법마저 스스로 위반한 역사상 최악의 재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죽일 권이 정말 없었을까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선 예수님께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또 실제로 스데반은 하나님을 모욕한 불경죄로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해졌지 않습니까? 물론 행정적으로 사형은 로마 총독만이 시행할 수 있었지만 유대교 율법대로 처리하는 일을 로마 당국도 여러 사정을 감안해 눈을 감아 준 것 같습니다. 지금 정치 9단인 눈치 빠른 빌라도는 자기로선 이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언질을 넌지시 준 셈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대제사장도 정치 9단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요11:49) 하다는 앞뒤 계산을 다 세운 가야바는 반드시 로마인의 손에 그것도 십자가 처형을 당하도록 상황을 몰고 갔습니다.  

그 이유는 여럿입니다. 가장 처참하고 고통스런 죽음을 안겨 주어야겠다는 복수의 감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냥 돌로 쳐서 죽이고 로마가 눈감아 준다 해도 자칫 아직은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민중의 신임을 잃을 수 있습니다. 로마가 제국에 반역한 죄로 처형해버리면 유대인들은 어쨌든 반감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예수가 저주 받은 죽음으로 나무에 오래 달려 있는 모습을 유대 온 천하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유대교를 위협하는 자를 질투해서 죽였다는 비방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자기들 손에 피를 안 묻힌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교묘한 방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반드시 죽이긴 죽여야겠는데 유대 민중의 반응을 가장 염려했고 또 일반 여론을 자기들 쪽으로 반드시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겉으로 내세운 핑계를 보십시오. 예수가 마치 로마제국에 항거할 아주 위험스런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유대인 전체가 멸망당할 수 있다는 너무나 뻔뻔스런 구실을 내세웠습니다. 정작 염려한 것은 그로 인해 로마에 의해 유대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종교제도가 무너지는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유대는 이미 로마에 의해 망해져 있었기에 더 망할 것도 없었습니다. 반역을 일으키는 자는 로마가 진짜 신속하게 처리해 줄 것이지 않습니까?

또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 나와서 가르치는 내용이 무엇인줄 일일이 모니터링 해왔습니다.  무기라고는 하나도 소유하지 않았고 열성당원들과도 전혀 교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뒷구멍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예수였지 않습니까? 나아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직접 떠보기도 했지만 전혀 반역의 낌새는커녕 억지구실도 찾아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겉으로는 유대민중이 가장 두려워하는 점을 내세워 설득하고 또 억지춘향격인 죄목을 붙였습니다. 빌라도가 가야바의 그 모든 속내를 모를 리 없습니다. 작금 유대 사회 내에 돌아가는 사정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뇌물과 술수로 유대총독까지 오른 자였습니다. 지금 정치적 거물들끼리의 격렬한 수 싸움에 불꽃이 튀고 있는 셈입니다.  

당연히 빌라도는 자꾸 발뺌을 하려 들었지만, 그의 가장 큰 약점을 쥐고 흔들어 꼼짝 못하게 만든 가야바의 승리로 최종 결말이 났습니다. 군중들더러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9:1)고 소리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말로 만약 예수를 풀어주면 그간의 모든 사정을 상세히 기록해 유대민중의 이름으로 황제에게 직접 상소하겠다고 겁을 준 것입니다. 빌라도는 마침내 울며 겨자 먹기로 가야바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선 자기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려는 현실적 욕심이 예수가 무죄라는 양심의 소리를 눌러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급박히 돌아가는 정황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정치적 종교적 술수와 계책은 그분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민족의 실질적 왕인 대제사장이나, 그들을 점령한 로마제국의 총독이 아무리 세상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기득권을 유지하려 수 싸움을 해본들 그것이 영원한 진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야 또 그렇다 치지만 그에 부화뇌동 혹은 속아 넘어간 유대 백성들은 그런 세상 돌아가는 형편보다는 정작 다른 것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총독, 대제사장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주인은 바로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선언을 보십시오. 자기가 어떤 죽음으로 죽을지 예언한 말씀대로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니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고 여기고 치울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 예언은 자기가 성취하면 그만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언제 몇 시에 어떤 방식으로 죽겠다고 미리 말했으면 그냥 그대로 자살하면 됩니다. 아무 신기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자기 예언대로 자살을 감행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다른 사람을 통해 예언대로 방식까지 정확하게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스데반처럼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로마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죽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전혀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거나 영향력을 끼친 것이 하나 없는데도, 심지어 말 한마디 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 그대로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8)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12:32-34)

예수님이 자기가 죽임당할 방식까지 미리 알아맞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은 당신께서 정하셨고, 그곳으로 가는 일도 당신이 전부 주관하셨고, 그 결과도 오직 당신께서 책임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 군왕들과 사람들이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아니 최고로 교묘한 방책을 동원해 스스로의 안녕과 유익을 도모하도록 가만 놓아두고서 말입니다. 사건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흘렀지만 인간들 의사대로 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결국 당시의 최고 권력자, 지성인, 종교가, 도덕군자들이 저지른 모습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자기들 능력으로 자기들 유익을 보장하려고 최선을 다한 결과가 말입니다. 전혀 무죄한 자를 최고로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역사상 최악의 죄악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전혀 의식조차 못했음에도 예수님이 사전에 마련해놓은 완벽한 각본대로 따른 조연 배우가 되었지 않습니까? 당신께선 손발이 묶인 채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히 계시면서 말입니다. 인간이 최고의 머리를 동원하여 성취한 일의 내면에는 너무나 더럽고 추한 죄악이 넘쳐났고, 반면에 예수님의 다함없는 자비와 긍휼은 그 모든 죄악을 덮고도 남았습니다.  

바꿔 말해 성경은 전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언을 알아맞히거나, 그대로 온전히 성취했으니 하나님임에 틀림없다고 동의하는 정도로는 성경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영원히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 점에 관해 예수님의 죽음 예고에 대해 반발했지만 나중에는 정말 일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되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분은 지금도 세상만사를, 특별히 그를 믿는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고 계십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는 빌라도보다 지혜롭지 못합니다. 단순히 술수에 모자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로마 총독이 될 정도면 요즘으로 치면 학벌, 실력, 건강, 외모 등에 출중했습니다. 가야바만큼 종교적으로도 경건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도덕적 면에서조차 의롭지 못할 것입니다. 대제사장 정도라면 아무리 부패한 종교권력이라고 하지만 그 지위 때문에라도 경건하고 의로워집니다. 또 제사장에게 부화뇌동한 유대군중보다 나을 것 하나 없습니다. 무엇보다 속으로는 예수를 불쌍하고 무죄하다고 여기면서도 찍 소리도 못한 베드로보다 비겁한 면에선 똑 같거나 더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물론 인간 모두를 뜻합니다.  

그래도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함부로 자신해선 안 됩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사실은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크게 나아진 것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사실만  빼고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빌라도요, 가야바요, 가룟 유다요, 베드로요, 십자가 앞에서 못내 아쉬워 한 창녀 마리아요,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친 이름 없는 군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인 그분에게 우리의 처음과 끝을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평강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그 은혜 말입니다.

인생이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 죄를 씻어주고, 상처를 감싸 안으며, 허물을 없애주고, 고통을 책임져주며, 환난에서 건져줄 능력과 은총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서만 나옵니다. 그분의 의와 은혜에 힘을 입지 않고는 어떤 인생도 단 한 시도 참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어찌 성경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어찌 그 말씀에 우리의 전부를 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 신자로서 응당 보여야 할 전인(全人)적인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8/2/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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