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7:1-5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조회 수 392 추천 수 44 2013.04.16 19: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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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2013년 부활주일 설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5)


예수님을 사랑한 한 가지 이유로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예수님처럼 바로 달리는 것만 해도 자신에겐 너무 과분하다는 뜻이었다. 마태는 페르시아에서 폭도의 칼에 죽었고, 마가와 도마는 사지를 말에 묶이어 찢어졌고, 누가는 목 매달렸고, 바돌로매는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고, 작은 야고보는 톱으로 두 동강이 났다고 전해진다. 요한을 제외한 바울과 나머지 사도들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

사도들뿐만 아니다. 스데반이 성난 군중의 돌에 맞아 최초로 순교한 이래로 초대 교회의 이름 없는 수많은 신자들이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었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물론 주저함도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찬양을 부르며 죽어갔다.

그들이 그렇게 한 까닭은 오직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스승이 가신 길을 따라 십자가 복음을 땅 끝까지 담대히 전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은 자들은 자신의 삶을 로마 황제가 결코 책임져 줄 수 없고 예수님만이 자신의 주인임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잠시 겉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척했다가 속으로만 아니면 될 텐데, 그마저 자신들의 신앙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그렇게 담대했을까? 저부터도 도무지 자신이 없다. 기껏해야 베드로처럼 물을 때마다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숨어 들어가 통곡하는 정도 아니겠는가? 실제로 나치 독일 치하에서나, 일제의 36년 한국 강점기 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변절한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생명까지 바치며 주님을 붙든 자는 극소수였다.

초대 교회 신자나 우리나 동일한 기독교 신앙을 소지했는데 왜 이런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가? 초대 교회 당시에는 기독교를 하루 속히 부흥시킬 필요가 있어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처럼 하나님이 성령의 특별한 권능으로 덧입혀 주었기에 그렇게까지 담대해졌는가?  

분명 그런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들어가 전도하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또 담대하고도 기꺼이 순교를 감당하기도 한다. 신자가 헌신하는 만큼 성령의 권능이 비례해서 나타난다는 원리는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오늘날의 선교사는 당시의 사도에 해당된다. 우리가 감히 그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당시에 전도도 하지 않았고 단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했던 일반 신자와 비교해야 한다.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과 자신들의 목숨을 맞바꾸었던 그들에 비추어도 우린 주눅이 들지 않는가?

서로 다른 부활 신앙  

초대교회 신자들이 갖고 있었으나 현대의 신자에게 없거나 크게 부족한 것은 딱 하나다. 바로 부활 신앙이다. 그럼 당장에 의아한 마음이 들 것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면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것을 우리도 믿는다. 그들이 부활을 믿는 세기가 우리보다 훨씬 강했다는 뜻인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과 우리의 부활신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본문 3절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당신을 믿으면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당신을 따르는 자에게 천국영광이 보장되어 있음을 믿으라고 권면도 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자체가 영생이라고 했다. 예수를 알면 이미 영생 안에 들어온 것이라는 뜻이다. 영생 안에 부활은 당연히 포함된다. 예수를 알면 이미 부활된 것이라는 뜻도 된다.

그에 반해 우리의 부활 신앙은 장래에 성취될 약속으로만 부활을 접근하는 정도다. 요컨대 부활을 믿으려 노력하는 수준이다. 믿으려 노력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믿지 않는 것이다. 알지 못하면 믿어지지도 않는다. 본문 말씀대로 예수를 알면 영생, 부활, 참 생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또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흔히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 또 성경의 영적진리에 관해선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기에 먼저 믿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어그스틴이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듯이 영적 차원에선 믿음이 앎보다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안 믿어지더라도 일단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보라고 권면한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 말대로 믿으려고 노력하려면 설교도 듣고, 성경 공부도 하고, 간절히 기도도 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어떤 정도가 되었던,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케 하거나 알게 해주신다. 또 그런 앎을 기초로 믿음이 생긴다. 알지 못하고는 믿어지지도 않는다. 앎이 없는 믿음은 맹신이요 미신에 불과하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라 알았다. 이점이 그들과 우리의 가장 큰, 아니 유일한 차이다. 요한사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이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사역을 본 것까지는 좋은데 구태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표현했다.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의 손의 못 자국을 직접 만져봤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승이 부활한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래서 스승이 바로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을 믿을 필요도 없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자기들 눈앞에 서계셨지 않는가?  함께 물고기를 굽고 떡을 나눠 먹으며 교제했다.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이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고전15:6)라고 증언했다. 사도가 아닌 일반 성도들도 부활생명이신 주님을 만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주님은 그들 보는 앞에서 구름 사이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러니 그들은 지금 당장 죽어도 주님의 품 안과 천국 보좌 앞에서 눈을 뜨리라 믿은 것이 아니라 안 것이다. 또 부활을 알았기에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 공부를 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이 완성도 되기 전이었다. 단지 “Jesus is risen.”(예수 다시 사셨네!)가 교리적 구호가 아니었다. 피부에 그대로 와 닿는 단순하고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또 자기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였다.

바울이 500명의 부활 목격을 증거한 그 구절 앞에서, 주님이 성경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했다. 그 복음을 교인들로 “믿게 하려고”가 아니고 “알게 하려고”(고전15:1) 그 서신을 기록한다고 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을 먼 장래에 실현될 약속이기에 믿음이 요구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부활이 정말로 사실인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냥 부활을 알고 있었고 부활 생명은 그들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 중 대다수는 부활을 믿으려 노력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그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찾으려 든다. 부활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모습으로 일어날지, 예수님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오시런지, 신자의 공중 들림은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것인지, 직장에서 일하고 있던 신자가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사라질 것인지 등등, 그 세부적 모습에만 흥미와 관심을 쏟는다.

심지어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했는지 그 진위여부마저 따지려 든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겐 2천 년 전 과거 사건인지라 구체적으로 재확인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두는 있는 그대로 절대불변의 진실이자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 이전에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분에게 부활한 사실 자체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부활의 진실 여부 혹은 그 구체적 모습보다는 그분 부활의 의미를 살펴야 한다.

영생의 의미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요 부활이다. 예수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나는 순간 영생 안에 들어간 것이요, 부활 생명을 소지하게 된 것이다. 초대 교회 신자가 가겼던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그런 은혜와 권능을 받은 것이다.

예수를 앎이 부활이라면 부활은 육신의 살고 죽음과 전혀 무관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마지막 날에 육체로 부활함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관심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를 알게 되자마자 신자의 인생은 영원한 세계와 접목된 것이며 그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시공간의 개념에 구애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부활을 장차 약속으로 받아서 믿으려 노력하는 것은 영생을 여전히 시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영원을 시간적 차원에서 접근하면 얼마나 오래 사느냐는 기간이 주 이슈가 되어버린다. 시간의 한계 안에 갇힌 어리석은 인간 이성이 영생마저 그런 한계 안에 제한해버리는 모순이 생긴다.  

영원(eternity)은 시간이 무한대로 지속되는 것(forever)을 뜻하지 않는다. 무한대도 수학에선 하나의 수치로 공식에 대입하여 계산이 가능하다. 영원이란 시간이 없는 것을 말한다. 시간이 있다면 반드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게 마련이다. 영원은 끝이 없는(endless) 것이다. 시간은 지구라는 별에 살면서 달과 태양의 자전 공전 주기 안에 제한을 받을 때만 해당된다. 신자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은 시공간의 모든 영향권에서 벗어나, 특별히 시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3:8)고 했다. 그래서 천국을 마치 옛날 동화처럼 이해하는 잘못을 범한다. 무릉도원 다녀왔더니 손자가 백발노인이 되어 있어서 정작 청년의 모습으로 있는 친 할아버지를 못 알아 봤다는 식으로 말이다. 천국의 하루가 이 땅의 하루라는 것이다.

이 구절이 그런 뜻이라면 하루가 천년 같다고만 해야 되는데,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나님만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다. 시공간 자체를 만드신 분으로 시공간 전체를 주관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세상만물, 특별히 모든 인간사를 그분이 당신의 뜻대로 주도하신다는 것이다.  

아윈슈타인이 만약 인간이 빛의 속도로 여행을 한다면 영원히 늙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틀린 말이다. 빛은 일초에 약 30만 킬로미터를 갈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긴 하다. 그러나 빛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 운행에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시작과 끝이 있다. 그래서 광속으로 여행하면 늙는 것이 지연되는 것은 분명하나 늙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늙지 않는 곳은 오직 하나 시간이 없는 천국뿐이다. 하나님 보좌 앞에선 영영토록 늙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 하며 세세토록 찬양할 수 있는 곳이다. 예수를 믿는 신자에게 바로 그런 영광이 기다리고 있으며 죽으면 그곳으로 가게 된다.

천국은 도피처가 아니다.  

신자도 연약하며 진토 같은 체질을 갖고 시공간으로 제한되는 이 땅에서 살기는 마찬가지다. 온갖 질병, 환난, 상처, 억울함, 분노, 시기, 다툼 등으로 고달프고 힘들게 지내기 마련이다. 자기 하고 싶었던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후회만 겹치는 실패들을 많이 겪는다.  기껏 70,80년의 짧은 생애인데도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훨씬 더 많은 것이 보편적 인생이다.

그래서 그 모든 더럽고 추하고 잘못되고 악한 것들에서 자유로운 천국에서 천년이고 만년이고 오래오래 즐겁고 기쁘게 살고 싶다. 그런 심정과 소망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고 또 천국은 분명 그런 곳이다. 그럼에도 천국에 질병, 고통, 죄악이 없는 까닭이 신자가 이 땅에서 손해보고 억울하게 당하며 고생했으니 유토피아에 와서 편히 쉬라는 단순한 보상 차원이 절대 아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 지금 죄를 시간과 연결시키고 있다. 죄가 하나님의 만든 것이 아니지만 이 땅에서 시간에 묶이는 어떤 힘 내지 현상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죄가 자라 사망에 이른다. 마귀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이 땅의 공중권세 잡은 자다. 마귀의 악한 본성도 시간이 갈수록 자란다. 시간이 없는 천국에선 죄가 자랄 수 없으며 마귀도 아예 틈을 탈 수 없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트집을 잡으려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형제가 일곱 있었는데 차례로 죽는 바람에 한 사람 형수와 계속해서 계대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천국에 가서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다.(마22:23-33) 주님은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0절)고 답했다.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의 문제는 이 땅의 특정한 시기에만 해당되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천국에는 시간의 제한이 없으므로 누구의 아내라고 따질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다.

신자가 죽어서 시간이 없는 천국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태초의 성삼위 하나님이 계시던 곳, 영원히 현재만 있는 그런 상태에 함께 들어간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 말씀, 성품, 의지만 있는 곳이다. 또 다시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일까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쉽게 말해서 사랑의 하나님이신 그분의 사랑만 충만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상태다. 결점, 부족, 오류라곤 단 하나도 없는 온전한 그분의 사랑으로 완전히 가득차서 관영하는 곳이다. 신자는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100% 완벽하게 체험 하고 누릴 수 있게 된다.

최근의 미국인 내세관(來世觀)에 대한 앙케트 결과에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천국은 좋은 것만 있어서 심심할 것 같고, 대신에 지옥이 괴롭지만 흥미로운 일들이 많아 재미있을 것 같으니 차라리 지옥 가겠다고 답을 한 것이다. 천국에서 매일 동일하게(이제 이런 표현은 잘못임을 알 것이다) 주님을 찬양만 하면 심심할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주님의 사랑은 완전하기에 받으면 받을수록 그 기쁨과 충만함이 더욱 더 새로워지며 늘어난다. 심심하고 지겨울 틈이 전혀 없을 만큼 좋고 오묘하다. 심심하다는 말 자체도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이 땅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천국에는, 정확히 말해 하나님에겐 시간이 없기에 그분의 사랑에 변개, 수정, 포기가 절대로 없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없으며, 동시에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분의 사랑은 영원토록 한 결 같을 수밖에 없고, 또 그래서 무한하며,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것이다. 천국은 그런 사랑 안에 완전히 잠기어서 100% 그대로 누리는 곳이다.  

또 그곳은 영원히 현재의 상태이기에 태초에서 영원까지 그 전부가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신자가 이 땅에서 궁금했던 일들이나 이해는커녕 도리어 의심, 불만, 불신을 불러 일으켰던 일까지 그 전말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다. 정말로 주님을 얼굴로 맞 대면하여서 하나님의 신기하고도 완벽한 뜻과 사랑을 넘치도록 깨달을 수 있다.

예컨대 예정이나 선택 같이 어렵고도 불합리해보였던 교리들도 오히려 너무나도 큰 은혜로 받아들여져 감사하게 된다. 겨우 나 같은 자를 너무나도 거룩한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나기도 전에 예정하신 긍휼과 사랑 앞에 경배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계시록에 따르면 천국 신자들이 보좌를 향해 거룩, 거룩, 거룩 찬양을 멈추지 않는 까닭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100% 은혜, 100% 사랑, 100% 권능 안에 완전히 잠기는 곳이다.  

신자의 이 땅의 삶도 천국이다.

지금 한가롭게 천국 이야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인데 이 땅에서부터 예수를 알 수 있으므로 신자는 이미 천국 같은 영생 안에서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실증(實證)으로 신자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시공간을 넘어서 인간으로선 도무지 측정, 가정, 상상도 못하는 차원에 계신다. 바로 그런 분이 신자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주지 않는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은 물론 마음의 생각까지 다 아시고 계시지 않는가? 이 버러지 같이 보잘것없는 인간의 한숨 소리도 듣고 계시며 눈물방울의 개수도 헤아리고 있지 않는가? 신자가 어찌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사두개인과 계대 결혼 논쟁을 하면서 천국과 하나님에 관해 어떻게 설명했는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니라.”(마23:32) 산 자의 하나님 즉, 예수 믿은 신자는 죽음 이후의 완전하고 영광스런 천국에는 신경 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이미 이 땅에서 영생 안에서 부활을 소유하고서 천국 같은 삶을 누려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교인들더러 복음을 알게 하려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전15:1)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이미 받았다고 한다. 예수를 알아 부활 생명을 이미 소지한 것이다. 또 그 복음 가운데 서있다고(stand) 한다. 비유이긴 하지만 신자가 서있는 주변 사방에는 복음뿐이라는 뜻이지 않는가?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권능, 사랑의 바다 가운데 잠겨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가 우리의 앉고 섬을 아신다고 찬양한 시편기자도 “주께서 나의 전후(前後)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나이다.”(시139:5)라고 하지 않았는가?  

초대 교회의 신자들의 부활신앙이 바로 이것이었다. 잠시 아닌 척 예수를 부인하여 목숨만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이유가 그들의 신념, 철학, 사상, 교리, 신앙 양심 때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의 믿음으로도 그러기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예수가 없이는 세상 모든 것을 가져도 아무 것도 아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알았다. 반면에 부활 예수의 생명이 그들 속에 있음을 체험하고 있으니까 세상에서 어떤 극심한 핍박과 환난을 당한다 해도 세상의 전부를 가진 것처럼 풍성하고 충만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힘들어서 도피하듯이 천국을 소망하지는 않았다. 누가는 의사였고, 마태는 세리로 부자였고, 심지어 베드로만 해도 장모의 집이 선교 거점으로 많은 제자들이 와서 기숙할 정도로 부자였다. 로마의 왕족과 귀족들이 예수를 많이 믿었고, 알다시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낸 서신이 아닌가?

초대 교인들은 단지 삶이 힘들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다. 지금껏 자기들 노력으로 지성, 건강, 재물, 명예, 권력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도무지 누리거나 알 수도 없었던 평강, 안식, 기쁨, 만족, 자유, 충만 등을 예수를 듣고 보고 만짐으로 알고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 생명을 소지하여 세상에 없는 그분의 사랑 가운데 서있는 것이 세상 어떤 일보다, 심지어 목숨과 맞바꾸더라도, 좋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그리스도의 천국 영광이 자기에게 비췸을 보았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공중권세 잡은 자이자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들인 로마 이방 시민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천국 문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 놓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내려짐을 보았고 주님의 손수 영접함을 받으며 빛 가운데서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감격의 눈물과 함께 찬양하며 순교한 것이다.

그러자 처음에는 그렇게 조롱하던 로마 시민들이 자신들의 상식을 뒤엎는 너무나 놀라운 모습을 보며 차츰 말이 없어졌을 것이다. 일말의 웅성거림 후에 무서울 정도의 정적이 흐르며 전율이 그 원형경기장의 모든 사람을 감쌌을 것이다. 그 놀라움은 곧바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죽어가는 신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생명의 냄새를 맡아 회개하며 개종을 했을 것이다. 그 반대로 여전히 완악하고 교만한 자는 그리스도의 사망의 냄새를 맡아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이는 바로 초대교회 교인들을 순교로 이끈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앎으로써 이미 그분의 부활생명을 소지했기에 가능했던 하나님의 위대하고도 거룩한 역사였다.    

예수 믿는 신자의 실체

예수 믿어 신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그분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 진심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으며 겸손히 엎드리면 성령의 전으로 삼아준다. 성령이 누구인가? 바로 삼위 하나님의 한 분 아닌가? 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 신자가 가는 세상 끝까지 또 끝 날까지 함께 동행해주신다. 이야말로 신자가 부활 생명을 이미 소지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실제로 신자 본인도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구원 받은 구체적 과정은 몰라도 자신이 이전과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다는 인식은 확고하게 생긴다. 아무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며 허공을 치는 바람에 어떤 선한 열매도 맺지 못하고 오히려 더럽고 추한 죄악의 냄새만 진동했던 헛되고 헛된 옛 생활로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비록 시험과 유혹에 져서 여전히 쓰러지고 실패할 때도 많지만 새 사람으로 거듭났음을 스스로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소지한 것이다.    

신자가 예수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영원과 연결되며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된다. 신령하고 초자연적 존재로 변해 물질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육신은 이 땅의 현실에 여전히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시간의 제약을 받아 시작과 끝이 있음을 안다. 모두가 어차피 썩어 없어질 것임을 알기에 그것들로 인해 자신의 정신과 영혼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며  시공간에 제한을 받는 모든 것들은 수치로 측정이 가능한데, 그것들이 늘거나 줄어듦에 따라 자기 존재의 가치와 삶의 기쁨과 인생의 방향이 절대로 좌우되지 않는다. 간혹 옛날의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지라도 최소한도 옛날의 자기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또 그럴 수도 절대 없다.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자녀로 삼았기에 그분께서 그렇게 되는 것을 두고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신 근거는 오직 하나다. 본문에 당신께서 기도하신 그대로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우리 대신에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뿐 아니라, 죄로 인해 파생되는 우리의 부끄러움과 두려움마저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셨다. 세상과 사람 앞에 더 이상 부끄럽고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믿게 하려”가 아니라 “알게 하려” 그렇게 한 것이다.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면 우리가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모자라며 너무나 영광스런 일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오히려 당신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말씀하신다. 도무지 이런 영광이 따로 없다. 하나님께선 신자가 아직도 올바르게 서있기 보다는 넘어지는 일이 훨씬 잦음에도 예수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아주 영광스럽게 여긴다. 예수 믿어 새로이 얻은 신분, 소속, 특권, 은혜 등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너무나 큰 영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신자의 부활도 그 안에 있다. 예수를 믿으면 이미 부활한 것이다. 영원과 이어진 것이다. 부활을 장래의 약속으로 받아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처럼 부활은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실제적인 삶이다. 복음 가운데 서있기에 바로 부활 가운데 서있는 것이다.

날마다 그 새로운 부활 생명이 신자로 이 땅에서도 풍성하고 활기차며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든다. 자기 속에 옛 사람의 찌꺼기가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날마다 부숴뜨려야 한다. 어제의 내보다 오늘의 내가, 또 오늘의 내보다 내일의 내가 더 거룩하고 의로워야 한다. 날마다 부활 생명이 더 풍성하고 충만해져야 한다.      

다른 말로 신자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능한 많이 받아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미 그분의 끝이 없는 사랑 가운데 신자는 푹 잠겨 있는 것이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그 주변에는 그분의 사랑과 권능과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히 함께 해주신다. 그 사랑을 마음껏 누리면서 이 땅에서부터 천국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랑을 모르는 주변의 불쌍한 이웃에게 그 사랑을 나눠주어야 한다. 바로 그럴 때에 우리가 이미 소지하고 있는 영원한 부활 생명이 우리를 통해 우리 주위에 더욱 아름답고도 충만하게 실현될 것이다.  

3/31/2013 부활 주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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