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영화 선전 문구로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스펙터클(spectacle), 스릴(thrill), 서스펜스(suspense)가 그것으로 구태여 번역하자면 순서대로, 웅장한 볼거리, 넘치는 긴장감, 예측 못하는 사건 전개입니다. 바울은 지금 사도인 자기들을 하나님이 ‘구경거리’가 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영어로 spectacle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구경거리 뜻은 시각을 즐겁게 해주며 흥미진진한 영화 장면과는 다릅니다. 우선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尾末)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로마의 개선장군이 승전 축하 퍼레이드를 할 때에 그 행진의 맨 뒤에 쇠사슬에 묶여 따라오는 적국의 포로를 의미합니다. 곧 사형에 처할 운명일 뿐 아니라 모든 로마 시민의 조롱의 표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하신 것 같다고 합니다. 그것도 오늘날로 치면 목사인 사도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세상에서 패배시켜 고난을 받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목사가 전하는 메시지가 세상과는 완전 적대 관계를 이루기에 세상이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정도를 넘어서 조롱하고 또 죽이기까지 핍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하여”라고 하지 않고 “작정한 것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는다고 여겨질 정도로 강한 핍박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목사가 바울과 똑 같은 느낌을 갖지 못하면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마침 어제 장애자 사역단체의 책임자로 수고하는 분의 목사 안수식에 참여했습니다. 장애자 사역을 오랫동안 아주 성실하게 수행했던 분이라 안수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더 신령해지고 능력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남은 평생을 주의 종으로 헌신하고 어떤 어려움도 감당할 것을 서약한 것뿐입니다. 말하자면 그분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길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셈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무래도 사역에 대내외적으로 권위를 더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이점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가 따르면 그만큼 책임도 비례해 커지는 법입니다. 평신도 시절에는 허물과 잘못이 따르더라도 사람들은 이해하고 관용으로 대해줍니다. 반면에 목사가 동일한 아니 더 약한 오류를 범해도 당장 심하게 비난합니다.
맡은 직분으로 사람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를 보는 시각은 직분을 맡기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취급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경찰이 유니폼을 입지 않고 있으면 아무도 그가 경찰인지 모르고 설령 교통 위반을 해도 크게 야단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복을 입고선 교통위반을 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잘못을 범해도 주위에 미치는 파장이 유니폼 여부로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목사로 안수 받는다는 것은 이제부터 항상 목사 가운을 입고 생활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약하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평생을 따라 다니며 자기 인생과 삶이 그 가운에 완전히 묶이게 됩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를 자연인으로 보지 않고 오직 목사로만 대우합니다. 항상 목사 가운을 입고 생활한다면 감히 잘못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인도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즉시 신자라는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연인으로 더 이상 보지 않고 예수쟁이로만 판단합니다. 설령 본인이 신자라고 드러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신자인 줄 몰라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반드시 어딘가에 예수 믿는 냄새가 나게 마련입니다. 또 평생을 두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신자임을 모르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 사람은 신자를 평가해 셋으로 나눕니다. 역시 예수 믿는 분들은 어디가 달라도 크게 다르시네요.(존경어법) 예수 믿는 사람도 우리와 똑 같네.(평상어법) 예수 믿는 것들이 우리보다 더 하네.(비속어법) 그런데 작금 솔직히 어느 쪽 평가가 가장 우세합니까? 마지막 세 번째로 세상이 신자를 우습게 알고 조롱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자도 초대 교회처럼 세상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어 죽임을 당할 자 같이 미말에 서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어떤 차이가 잇는 것입니까? 초대교회 때 조롱 받은 신자들은 윤리적 삶이 나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에 힘입어 구원을 받으라고 권유했습니다. 지금껏 그들이 믿었던 신들과는 전혀 다른 참 하나님을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윤리적으론 세상 사람보다 더 성결한 반면에 그 믿는 신앙이 달라 비방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 자체는 비난하지 않지만 신자들의 삶을 보고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어디가 잘못된 것입니까? 참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는 유니폼을 입는 순간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증거 하는 자로 서야 함에도 그러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로선 신자에게서 복음을 귀로도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으니까 대신 눈에 보이는 삶을 두고 신자 됨을 판단한 것입니다.
참 복음을 믿고 따른다면 성령의 간섭으로 자연히 윤리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적으로도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 노력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오히려 윤리적 모습으로 세상 조롱을 받는다면 참 복음 안에 들어와 있지 않고 가짜 복음을 붙든 것입니다. 혹시 들어와 있어도 세상이 좋아져 복음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짜 복음이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은 믿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 같이 할 리는 결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환난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세상은 반드시 반박하게 되고 또 당연히 세상에서 형통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세상에서 죽기 싫어 세상을 따르다 보니 오히려 윤리적 삶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의 조롱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생은 참으로 흥미롭게도 영화와 비슷합니다. 온갖 사건이 일어나 볼거리(스펙터클)가 많습니다.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고(스릴) 어떤 결말이 날지 몰라 염려(서스펜스)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불신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이미 십자가의 승리를 보유하였고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어낼 것은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함께 하는 신자의 인생에 스릴과 서스펜스는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대신에 복음으로 인해 자기가 세상의 미말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것으로 삶의 목표가 바뀐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쇠사슬에 묶인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세상의 최고 권력자들에게조차 당당히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의 구경거리 즉 조롱거리가 되어 있습니까? 분명 조롱을 받긴 하는데 혹시 그 가진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 보이는 삶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까?
8/2/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