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를 소유하고 있는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에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보거나 하나님의 관점 대신에 자기 생각으로만 해석하는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그러나 그런 오류들은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고 어느 정도 인식하고 또 고치려 노력합니다. 반면에 잘못인줄 알지도 못하고 많이 범하는 잘못은 꼭 보아야 할 구절을 간과해 정작 깊이 새겨야 할 의미마저 놓친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신자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면 그 즉시로 성령이 내주하여 본문 표현대로 “성령의 전”이 됩니다. 그러나 그 뜻을 단순히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제한 시켜 버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신자를 어떤 어려움에서도 구해주고 앞으로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치웁니다.
돈에 심히 궁핍했던 올라브슨이라는 스웨덴 사람이 있었습니다. 쪼들리다 못해 1910년 스톡홀롬의 카를린스카 연구소에 자기 몸을 의료 연구에 쓰도록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일 년 후 그는 많은 재산을 상속 받게 되어 돈을 물려주고 팔았던 몸을 다시 사려 했습니다. 그러나 연구소는 이미 그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팔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동안 허락도 받지 않고 이빨 두 개를 뽑았다고 손해 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성경은 분명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세상에서 통용되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자의 영육 간 존재 전부의 절대적인 소유권이 영원토록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신자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리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 정말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을 바쳐서라도 순종하며 그분 뜻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비유컨대 신자는 예수님 허락 없이는 이빨도 뽑지 말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살전 5:18)입니다. 신자더러 계속 좋은 것을 받아내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그분 뜻대로만 살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이 행하신 것이므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하나님의 동행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 그분의 신자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그런 실감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구원 이후에도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의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여전히 자기에게 있는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어서 이식도 남기지만 그 이식은 전부 주인의 소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대신 행하기만 하는 심부름꾼과는 다릅니다. 심부름꾼은 절대로 주인이 시킨 일의 범위를 넘어서면 안 됩니다. 또 당장에 돌아올 벌이 두려워 넘어설 생각도 아예 못합니다.
반면에 청지기는 재량껏 무엇이든 할 수 있어도 소유권만은 절대로 주인에게 귀속시켜야 합니다. 임의로 할 수 있기에 더더욱 주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는 해선 안 됩니다. 심부름꾼은 시킨 일이 우선이지만 청지기는 그 일을 시킨 주인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럼 신자가 된 특권은 따로 없고 의무만 더 늘어난 셈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 받기 전 불신자 시절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 인생에 대한 소유권과 사용권 모두가 사단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완전히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죄악을 즐기도록 조종되어졌습니다. 참 빛에는 절대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흥미롭게도 불신자는 도리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큰소리치며 삽니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소유권과 사용권 모두 자기가 쥐고 있는 양 믿지만 사실은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 속아서 영과 육 모두 사단의 농간 아래 있는 줄 눈치도 못 채고 있습니다. 아담이 범한 원죄가 바로 “내 인생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데서 발단되었고 또 모든 인간이 그 원죄 하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소유권을 원래 주인이신, 원죄 이전의 선악과가 뜻하는바 그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되돌려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과는 달리 사용권은 계속 허용해 주었습니다. 사용권은 어디까지나 소유권에 귀속되는 것이지 사용권을 가졌다고 소유권까지 확보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의 인생은 불신자 시절에 임의로 행사했던 그 사용권을 소유권자인 예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여정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청지기적 소명이란 외부 피조 세계를 그분의 뜻에 맞추어 다스리는 것을 넘어 자기의 존재, 삶, 인생부터 거룩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니까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소유권은 오직 예수님에게 있고 단지 사용권만 부여 받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여 신자의 영육 간 전부를 사단으로부터 빼앗아 오셨지 않습니까? 작은 예수인 신자가 궁극적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당연히 예수님 당신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신자가 사용권을 주인의 뜻에 맞지 않게 행하면 때로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소유권과 사용권 둘 다 사단에게만 있는 불신자의 인생이 아무 징계 없이 형통해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단은 불신자를 간섭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하는 것만을 목표로 평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버려두어도 하나님께로는 절대 가지 않고 사단이 원하는 대로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음행 사건을 인간 윤리나 종교 계명을 범한 죄로 취급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가 자기 인생의 사용권을 잘못 행사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되찾은 자기 소유권을 침범한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신자가 자기 인생의 사용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길은 같이 피 값을 치르는 수뿐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그 배후의 사단과 싸워서 자기 삶을 통해 주인 되는 예수님의 이름만 불신자와 세상 앞에 높여드려야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2,23) 지금 누가 당신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예수입니까? 당신입니까? 다른 말로 당신은 이미 예수가 주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소유하려고 추구하고 있는 중입니까?
8/14/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