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는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느니라.”(고전8:1-3)
기독교가 여타 종교와 가장 크게 다른 특징은 “인간이 올라감”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옴”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신자가 해당 종교에서 규정한, 사실은 인간이 고안해낸, 계명을 온전히 지켜 신의 합격점에 들어야만 하는 것이 타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계명은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기준에 맞추어 직접 수여한 것이라 인간은 도저히 온전히 지킬 수 없고 오히려 죄의 저주만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와 인간 대신 그 저주를 감당하여 구원을 주셨습니다. 모든 종교가 인간이 공적을 쌓아야 구원된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베푼 은혜를 믿으면 됩니다.
올라감의 종교에선 이 땅에서 쌓은 선행이 과연 신의 마음에 합당할지만이 최대 관심사로 죽어 봐야 그 구원이 결정됩니다. 그 전까지 인간과 신의 인격적 교제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자기 믿는 신을 제대로 알지, 사실 분명한 실체가 없기에 알 수도 없지만, 못합니다. 따라서 신 쪽에서 자기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인식은 더더욱 없습니다. 또 그 신의 입장에선 죽은 후 생전의 공적으로 판단하여 점수만 매기면 되기 때문에 자기 종교의 신자임에도 구태여 알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신이 아니라 시험 점수 채점자에 불과합니다.
내려옴의 종교인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한 죄인이 어는 때라도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바로 그 순간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고 성령님이 영원토록 내주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 전에 하나님이 그를 택해 성령으로 간섭하셔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여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먼저 그 사람을 알고 사랑해 준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선 이 땅에서부터 인간과 신의 인격적 교제가 가능하며 특별히 하나님이 자기를 세밀하게 알고 사랑해주고 있다는 인식을 항상 가질 수 있습니다. 즉 누구든 예수를 처음 믿으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아는 바가 된다는 것은 처음 믿을 때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믿은 후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신자라곤 단 한명도 없음에도 성경이 구태여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신자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도 가짜가 많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랑과 하나님이 받기를 원하는 사랑의 내용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하면 주로 어떻게 실천합니까? 종교 행사에 성실히 참석하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며 분에 넘치는 헌금을 바치는 것만 연상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꾸 자신의 열심과 정성을 최고로 만들어 갖다 바쳐야 한다는 인식부터 앞섭니다. 불신자 시절에 익숙했던 올라감의 타성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까지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신자도 당신께서 하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 땅의 불쌍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늘에서 내려 받은 사랑을 더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야만 합니다. 본문에선 그것을 “지식으로 교만해지지 말고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사랑, 그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바탕에서만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가 당면했던 “신자가 우상 제물을 먹으면 되느냐 안 되느냐?”는 문제를 판단할 때도 신앙적 지식으로 하지 말고 십자가에 드러난 뜻에 비추어 하라는 것입니다.
제물에 관한 지식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4절) 아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니 우상에 바쳐진 제물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될 뿐 아니라 만물이 하나님께로 나왔으니 아무 상관없이 무엇이나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지식을 신자 모두가 갖고 있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만약 아직 불신자 시절의 습성이 남아 우상이 실제로 있는 줄 알고 또 사단을 완전히 정복한 복음의 권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연약한 성도가 그런 인식을 가진 채 제물을 먹으면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또 지식을 앞세워 그런 성도들 앞에서 마음 놓고 제물을 먹으면 그들로 따라 하게 만들거나 복음에 대해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지식 자체만을 자랑하여 반드시 교만을 부릅니다. 사랑의 모습으로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닙니다. 신자가 갖추어야 할 성경말씀, 기도, 은사 등 모든 신앙적 실력은 자신부터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고 반드시 그분께 받은 온전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덕으로 끼쳐져서 서로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만일 식물이(문맥상 의미는 복음을 아는 지식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13절) 우상 제물의 문제로 인해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잘못 알게 만들 수 있다면 자신은 평생을 두고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평생 먹어도 죄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는 바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줄 잘 알고 있어도 그랬습니다.
요컨대 바울은 복음이 전해지는 데에 조금이라도 방해되면 심지어 선하고 의로운 일이라도 “평생을 두고”(다른 말로 ‘절대로’라는 의미)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는 바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운 바울을 모를 리는 절대 없기에 그가 사도로 바로 서있음을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떻게 해서 그분의 아는 바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얼마나 많이 바쳤는지, 즉 자기 신앙 지식으로 하늘을 향해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에 비례해 그분이 나를 알아준다고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누구입니까? 집사로 십일조 꼬박꼬박 바치고 얼마나 봉사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도 왜 저를 아직도 제대로 몰라주십니까?”
물론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이웃을 잘 섬겼기에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내세우면 기왕에 섬긴 것마저 참 섬김이 아니게 됩니다. 나아가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다른 종교의 그것과는 달리. 단순히 어려운 자를 도와주는 모습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 복음이 더 낮은 곳을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 있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말고 현재 상황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는 않는지요? 도덕적 종교적으로 옳은 것만 주장하지는 않습니까? 지식이 모자라거나 없는 자에게 십자가 사랑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 당신의 옳다고 믿는 바를 기꺼이 그것도 평생토록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연약한 사람들이 살아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신앙 실력만 자꾸 높이려 들면 여전히 올라감의 종교를 추구하는 중일 수 있습니다. 만약 참 신자라면 구원의 취소는 몰라도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외면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은 아십니까?
8/2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