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할 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변(分辨)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6-29)
세례와 성찬은 예수님이 교회에 거행하도록 직접 명하신 성례(聖禮)입니다. 세례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구원을 얻은 고백이자 이후로는 오직 주님 뜻대로만 살겠다는 결단의 예식입니다. 성찬은 이미 믿은 신자가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기념하며 그 은혜를 죽을 때까지 주위에 전하겠다고 헌신하는 예식입니다.
이처럼 성찬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가 참여하는 것이 원칙인지라 현실적 기준으로는 세례 받은 자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 기준은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한 목적에 따르면 분명히 타당하며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칫 너무 엄격하게 그 기준을 적용하다 보면 본의 아닌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아직 세례 의식만 받지 않았다 뿐이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나 혹은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잘 모르는 초신자들에게 소외감 내지 차별 의식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격하게 따져서 그 기준은 바울 사도가 성찬을 합당하게 먹고 마시라고 권면한 당시 상황이나 앞뒤 문맥상의 의미와는 별개입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애찬(愛餐:식사하며 교제하는 것)과 성찬(聖餐)이 예배의식의 일부였는데 애찬을 먼저 한 후 성찬을 나누는 것이 순서였습니다. 그런데 애찬은 각 자가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을 갖고 와서 나눠 먹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처음 의도와는 달리 여러 문제가 파생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부자나 권세 있는 자들이 음식을 많이 갖고 왔고 점차 가난한 자들을 소외시키며 자기들끼리만 교제하려 들었습니다. 갖고 올 것이 별로 없는 가난한 자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먹었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자는 먹을 것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애찬에 참여도 못하는 수치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부자들이 먼저 먹고 마시는 바람에 막상 성찬을 할 때에는 포도주에 취하는 자까지 나왔습니다. 오죽하면 바울 사도가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까지 권했겠습니까?
세상 재물, 권세, 지위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거행하는 애찬과 성찬의 목적이 완전히 어긋나버렸습니다. 도리어 그로 인해 파당이 생겼습니다. 거룩하고 경건해야 할 성찬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타산을 도모하기 위해서 대접하며 교제하는 일반적인 식사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본문에선 세례 받지 못한 자의 참여 여부가 논쟁의 중심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자”가 참여하여야 함으로 합당한 신앙 고백을 한 자가 참여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따르면 세례 받지 않은 자보다는 사랑으로 나누지 않는 자, 기다려 주지 않고 먼저 먹는 자, 부자나 권세 있는 자들끼리 편당을 지으며 먹는 자, 가난한 자를 도우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만드는 자, 일반 식사로 전락 시키는 자, 전체 교회가 화합되는 측면은 감안하지 않고 너무 규칙만 강조하는 자 등이 참여해선 안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성찬을 할 때는 반드시 주의 몸을 분변해서 참여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몸”은 떡이 상징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있다는 신앙 고백일 뿐만 아니라 그 고백을 하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성찬은 반드시 주님을 기념하고 그분께 다시 헌신하는 내용을 담되 그 형식은 반드시 교회의 덕을 세워 하나가 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또 먼저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시라고 권했습니다. 자기가 세례 증서를, 당시는 그런 것도 없었지만, 받았는지 여부를 점검하라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례를 받은 자라도 혹시라도 위에서 말한 경우들에 해당되지 않는지 살피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교회 안에선 세상에서의 신분과 위치가 어떠하든지 자신부터 낮추어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기고 있는 자라야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혹시라도 남들 모르는 죄악 가운데 빠져 있다면 주님의 몸과 피를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떡이나 잔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를 깨끗케 해 주시어 성도로 삼아주셨는데 습관적으로 특정한 죄를 짓고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행위입니다.
이를 테면 금전적 혹은 성적 부정에 연류 된 신자라면 교회 내의 직분에 관계없이 즉, 장로든 목사든 성찬에 참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장에 그 죄를 교회 앞에 실토하고 회개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반드시 참회하고 돌아서는 결단과 실천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찬식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다시 맛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숨겨진 죄를 주님께만 자백함으로써 그분의 조건 없고 무한하신 사랑 안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찬에서 또 하나 간과해선 안 될 중요한 사항은 반드시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겠다는 결심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신상의 안락과 풍요만을 바라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성찬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자는 사실상 십자가 복음의 은혜 가운데 들어온 것조차 아닙니다. 스스로 도덕적 훈련으로 인격 도야만 하려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세상으로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보내기 위해 구원해 주었습니다. 또 복음을 제대로 알면 예수를 모르는 영혼이 너무나 안타까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본문은 단순히 성찬에 관한 말씀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가문, 학벌, 재산, 지위 등이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함에 어떤 장애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을 높게 만드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도 높아지게 만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이 정당하거나 잘못이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난다면 절대 받아들여선 안 되고 나아가 반드시 죄악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요컨대 교회 안에서 사역을 수행하고 지체들 간에 교제함에 적용하는 원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가 오직 그것뿐이고 또 교회를 직접 움직이는 머리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업을 완성하고자 결단하는 예식이므로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합당한 기준은 세례여부를 떠나서 현재 신자의 심령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생하게 살아 있기에 오직 그 십자가로만 살고 죽고 하느냐의 여부일 뿐입니다.
8/27/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