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필요 없는 지체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 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12:20-22)
성경이 교회를 인체에 비유한 이유는 지체는 여럿이되 몸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서로 다른 모습과 기능을 가진 많은 지체가 있어도 각 기능들이 하나로 종합되어 하나의 몸이 하나의 목적으로 하나의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배가 고파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으려 생각을 했다면 그 생각을 한 지체는 머리입니다. 그러나 눈이 냉장고가 어디 있는지 찾고 발은 움직여 냉장고 쪽으로 가게 합니다. 또 손이 냉장고 문을 열면 눈이 적당한 음식이 있는지 찾아 손이 그것을 집어 입이 먹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단 하나의 지체라도 없으면 허기를 채우겠다는 일자체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이 손더러, 머리가 발더러 너를 쓸데없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각 지체가 담당한 역할은 다르지만 종합되어 몸이 음식을 먹는 한 가지 행동을 하게 했습니다.
이차 대전 중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영국 광부들이 참전하겠다고 지원서를 냈습니다. 그러자 처칠 수상은 그들이 전쟁에서 맡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 주면서 입대자원서를 전부 반려 시켰습니다. “누구인가 탄광에 있어야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나는 비행기 조종사로 나는 잠수함승무원으로 전쟁에 나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때에 나는 석탄을 캤었다고 똑같은 긍지와 권리를 가지고 당당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 처칠의 변이었습니다.
전쟁은 겉으로는 군인들에 의해서만 치러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이 잘 싸울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해주는 역할이 그 못지않게, 아니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석탄은 철강을 만드는 제철소와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의 주 연료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석탄이 없으면 무기를 만들지 못하고 무기가 없으면 아무리 군인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습니다.
허기를 채우려 음식을 먹을 때 겉으로 보기에는 손과 입이 모든 역할을 다 한 것 같지만 신체의 다른 지체가 하나라도 없었으면 불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군인이 다 싸우는 것 같지만 광부도 똑 같은 비중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능과 역할이 다 다르다는 것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절대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따져봐야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한 가지라도 빠지면 몸 자체가 돌아가지 않기에 몸의 입장에선 그 어떤 것도 하나 같이 다 소중한 것입니다.
한 때 맹장이나 편도선이 아무 기능도 없이 쓸데없이 병만 일으킨다고 오해했지만 의학의 발달로 그것들이 없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손가락보다 발가락 하나가 없는 것이 살아가는데 훨씬 더 불편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요긴한 것 같지 않은 발가락이지만 사람이 땅을 딛고 활동하는 근본적인 힘을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몸 전체로선 지체들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이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 중 하나라도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따라서 몸과 지체가 정작 따져야 할 것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각 지체가 그 목적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 온전히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 여부일 뿐입니다.
그럼 교회에 여러 모습의 지체들이 모여서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말 할 것 없이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교사, 성가대, 회계 등 어떤 직분을 가졌던 각자가 수행할 역할만 다릅니다. 서로 간에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잘났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각 지체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힘들게 봉사했던 복음이 증거되고 확장된 결과가 없으면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허기를 채워야 하는데도 눈은 재미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손은 계속 리모컨을 만지면 아무 짝에 쓸모없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광부들이 몽땅 군대에 지원해도 무기를 만들지 못해 전쟁에 패배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는지 이유가 궁금할 것입니다. 일요일에도 문을 열어야 하는 모텔을 운영하는 장로가 있다 칩시다. 주일날 교회에서 맡은 일도 많고 장로인지라 모텔 직원 중에 불신자나 혹은 예수를 갓 믿은 초신자에게 맡기고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럼 어떤 결과가 됩니까? 주일 영업을 해야 하는지 복잡한 신학적 논쟁은 별개로 치고 장로는 오직 자기가 맡은 역할만 중시했을 뿐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교회가 지향하는 목적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자기가 주일날 교회를 빠지면 당장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양 착각했습니다. 장로 정도 되면 이미 믿음 안에 든든히 서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도할 대상을 어떡하든 주일날 교회에 출석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장로가 맡은 역할을 주일날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또 장로도 당연히 주일 성수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로는 1부 예배에 일찍 갔다 오든지 혼자 집에서도 예배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극단적인 예를 든 이유는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관점 내지 이해, 즉 몸인 교회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장로가 맡은 역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겠다고 덤비는 것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찾을 생각은 않고 늘 보던 연속극을 끝까지 보아야겠다고 우기는 셈입니다. 눈의 기능은 충실히 다했지만 몸이 하려던 일은 전혀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눈이 손더러 쓸데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야기했습니다.
교회의 지체들끼리 다투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나도 ABC같은 이야기입니다. 따로 권면할 필요조차 없이 상식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자 정도 되면 오로지 자기 자랑하려는 바람에 생기는 다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목사,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열심 때문에 자기 맡은 역할은 죽어도 수행해야겠다고 덤벼서 다툼이 생깁니다.
지체가 몸을 위해 있지 몸이 지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체가 하는 역할이 몸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다르면 그 지체는 없느니보다 못합니다. 예컨대 신체에 발가락이 없어선 안 되지만 있을 필요가 없고 또 아무 기능도 못하는 여섯째 발가락이나 발가락 위에 난 사마귀 같은 것은 정작 지체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조차 세상의 것이나 방법을 앞세우는 자는 그 맡은 직분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의 지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담임 목사도 몸이 아니라 지체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위해 살고 죽어야지 목사의 기능과 역할만 강조하면 자칫 쓸데없는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분쟁의 근원이자 그 한 복판에 설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교회에서 가장 필요 없는 지체는 자기 역할만 강조하는 자입니다. 대신에 가장 필요한 지체는 오직 복음을 위해선 그 역할을 잠시 유보할 수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에는 정말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체가 얼마나 많은지요?
8/3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