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사랑의 진짜 본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2-7)
바울 사도는 사랑의 특성을 15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전부를 관통하는 핵심이 하나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의외입니다. 저자가 동일한 문구를 반복 사용하는 것은 가장 강조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참고’로 시작해 ‘견디느니라’로 마칩니다. 나아가 “아니하며”가 8번이나 나옵니다. 아니 한다는 것도 사실은 참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또 ‘모든 것’을 견디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매사에 끝까지 인내해야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응당 갖추어야 할 상대를 좋아하고 희생하며 섬기는 모습과는 딴 판이지 않습니까? 그가 열거한 15가지 특성도 잘 따져보면 상대에게 무엇인가 바치거나 유익을 끼치는 구체적 행동은 없습니다. 거의 모두가 사랑을 베푸는 쪽의 마음 상태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참 사랑은 신적 기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그분의 사랑을 제대로 닮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흔히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과 다른 점을 그 양의 크기와 질적인 완전함으로만 따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이신 아가폐 사랑도 당신께서 전부를 바쳐 희생하시고 우리를 대신 살렸다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 부모도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본질은 죄인을, 심지어 당신과 원수 된 죄인을 시종일관 여일하게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일시적, 가변적, 상황적, 개인적, 혈연적, 타산적으로 사랑하거나, 선호도나 기호 또는 감정에 좌우되면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도 질과 양에선 하자가 없을 수 있으나 영구적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인간과 가장 다른 점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도에 조금이라도 변질되면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어야만 합니다. 끝까지 사랑하려면 무조건 무제한으로 주어야 하고 필연적으로 목숨까지 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사랑은 믿음 소망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폐해져도 하나님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끝까지 가야 한다면 사랑이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마저 수단이 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적 기원에 바탕을 둔 사랑 앞에선 인간적 모든 수단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 합니다. 사랑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면, 즉 아무리 성령의 은사가 많아도 교회 안에서 끝까지 모든 것을 참지 않으면 성도간의 분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목적이라면 신자의 삶 자체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더라도 천국을 바라는 믿음과 소망 안에서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나기를 소원할 때만이 매사에 끝까지 참을 수 있습니다. 비로소 사랑은 참되어지고 능력도 온전히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참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매사에 끝까지 참습니까?
9/1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