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없는 마라톤 경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인간이라면 사춘기 때부터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을 품지 않은 자 없을 것입니다. 심각성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열심히 고뇌해보지만 바른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허둥지둥 인생을 사는 자가 대부분입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 가야할 방향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의 형통만이 인생의 목적이 됩니다. 이는 마치 길을 잃은 자가 우연히 마라톤 코스에 휩쓸리다보니 출발점과 종착점이 어딘지 또 지금부터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남들이 뛰니까 자신도 열심히 뛰는 꼴입니다.
바로 불신자들의 삶의 형태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향해서만 달려갑니다. 그리고 어디인지 모르는 목적지 대신에 현재 가고 있는 과정 즉 자기가 지금껏 이룬 업적으로만 자신을 평가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자기가 가진 재물과 명예와 권세의 질과 양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립니다.
너무나 어리석지 않습니까? 옷과 차와 집이 자신의 진짜 됨됨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더 웃기는 것은 남들은 그렇다 쳐도 자신마저 자기를 그런 것들로 평가합니다. 업적이란 그 특성상 절대 만족을 모르며 또 자기보다 앞선 업적을 이룬 자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작 구해야 할 정체성에 대한 답은 미지(未知) 혹은 불가해(不可解)로 남겨두었으니 항상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크 엘롤은 “자아로부터의 해방이 함축하는 최종적인 측면은 ‘내 손으로 한 일’로부터의 해방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업적에 매여 살면 절대 자아로부터 해방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답을 정답이라고 오인하거나 정답을 찾을 생각이 전혀 없으면 평생 가도 정답을 찾지 못합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선 우선 잘못 가고 있는 길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업적 위주의 삶에서 해방된 자입니다. 다른 말로 이 땅의 일시적 성취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도덕적으로 성결해지기 위해서 인격을 갈고 닦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불신자도 죄를 멀리하고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려 노력합니다. 또 이 땅의 성취가 아니라 해서 초자연적 신비만 추구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즉 사도로서의 업적은 가장 앞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업적을 이룬 힘이 자신이 아니요 오직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고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이루지 않은 업적을 자랑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마라톤 코스를 일등으로 완주하고 자랑한들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분의 일을 해야 하며 바울처럼 위대한 종교적 업적을 많이 남길 수 있습니다. 또 그 업적은 후대의 신자를 위하여 소중하며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물이 불신자의 자아를 대체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일이 아무리 위대해도 신자의 정체성이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찰스 링마는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과 이뤄낸 업적이 내 존재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당신을 도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역자로 나를 부르셨지만 그분은 무엇보다도 나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사실상 하나님은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내 모습을 사랑하신다. 나의 존재를 결정하는 핵심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용납이다.”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은혜는 그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는 힘이었지 정체성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링마의 말로 바꾸면 하나님이 용납해 주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9절)라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만 자신을 두었습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이 신자의 근본적인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인해 그분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원래의 고귀한 존재로 회복된 것입니다. 나아가 세상을 그분과 화목 시키는 소명을 이루기 위해 그분과 함께 동역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참 자아를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았기에 신자는 당연히 계속해서 그분 안에서만 그 자아를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며 이 땅에 그분의 뜻을 실현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자신을 통해 사람들에게 확연히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오직 예수 안에서만 존재하고, 사고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여전히 자신은 연약하고 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고 있어야 합니다. 출발점은 골고다 십자가 언덕이었으며 도착지는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감람산 언덕입니다. 예수로부터 출발하였다면 당연히 그분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 없는 신자는 자아 자체를 상실한 셈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았습니까? 또 현재 그 자아를 충실히 실현하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없이 단지 고상하고 위대한 종교적 업적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칫 교회 안에서마저 향방 모르는 마라톤 코스를 남들이 뛰니까 멋모르고 따라 뛰는 꼴이 될 뿐입니다.
9/18/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