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진정으로 믿는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서독의 전 수상 아데나워는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면 세상에 희망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지평선상의 가느다란 한 줄기만큼의 희망의 빛도 볼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상 가장 잘 증명된 사건 중 하나라고 믿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부활의 확실성을 논증한 후에 만약 부활이 없으면 불신자보다 신자가 더 헛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그것이 없다면 비록 썩어 없어질지라도 이 땅의 풍요를 누리는 불신자보다 못한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보물이 있다고 믿고 온갖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며 평생을 탐험했는데 막상 지도에 표시된 곳에 도착해보니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활은 이 땅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과 심판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이 땅에서 어떤 죄를 지어도,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살아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으며 하나님이 없으면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 기준도 없어집니다. 아니 그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활이 논리적인 타당성, 개연성, 필연성으로 증명될 문제는 아닙니다. 약 백 년 전 런던에 일단의 법률가들이 모여 예수의 부활이 과연 법정에서 다룰 수 있을 만큼 증거가 충분한지 검토해 봤는데 역사상 가장 근거가 확실한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교적 교리, 근거 없는 소문, 어떤 사상적인 도그마, 단순한 기대 추측 소망, 현실 세계에 대한 반발 내지 도피심리, 논리적 당위성에 근거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베드로 도마 같은 제자뿐 아니라 500 명이 넘는 증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삼층천까지 올라가 하늘의 비밀을 보고 들은 자였습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바울의 논증이 없어도 그 부활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당시의 핍박이 두려워서 부활이 없었다고 부인하고 다녔어도 절대 거짓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무리 부인한들 그분은 영원토록 살아계신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면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있으며 필연적으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이 있고 또 부활과 영벌은 자동으로 따릅니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심지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아 부활이 없었어도 신자의 부활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오셔서 부활하신 까닭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죄와 사단과 사망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서 구원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고자 하는 소망이 가식적, 인위적, 맹목적이어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죄에서 구원 자체가 무효이며 역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부활은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로 따를 뿐입니다. 구원을 얻은 후에 새삼 부활을 열심히 믿으려 하거나 소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원은 바로 부활입니다.
바꿔 말해 부활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한 통치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구원도 동일한 의미와 권능을 가집니다. 예수 믿는 것이 종교적 신념 체계를 통해 정서적 평강을 추구하거나 죄를 용서 받았기에 영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단순한 작업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부활 가운데 들어선 것입니다. 천국 보좌 앞에서 그분께 감사, 경배, 찬양을 돌리는 것과 똑 같은 삶을 실제로 이 땅에서부터 사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분과 동역하여 이 땅에 그분의 거룩하고 신령한 나라를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실현하고 확장해 가는 작업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동행하기에 신자의 그 작업에 거칠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을 믿었는데, 영생을 얻었는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데, 그래서 가장 근본적으로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데, 부활에 대해 의아해 하면 논리적인 모순을 떠나서 아예 그 믿음이 아무런 권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부활은 먼 장래의 일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이 없으면 신자의 인생이 더 불쌍하다면 부활이 있기에 신자의 인생은 가장 고귀해진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이 순간 이 장소에서 바로 나를 통해 벌써 실현되고 있기에 예수님의 권능과 영광도 내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어야 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 부활의 영광과 권능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아데나워 수상이 말한 대로 세상의 유일한 빛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빛이 아니라 신자가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 부활 신앙을 소지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서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9/2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