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5:6-9 고난 대신 염려를 맡겨라.

조회 수 960 추천 수 70 2009.09.20 17: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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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6-9)


종교와 신앙은 다르다.

본문이 말하는 고난은 현실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사람 전부가 아니라 너희 형제들 즉, 성도들만 당하는 고난으로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을 말합니다. 또 그 궁극적 배경은 사단인데 불신자를 동원해 초대교회의 불씨를 어떻게 하든 죽여 보려고 용을 쓴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에게는 선교지로 나가지 않는 한 종교적 핍박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적 고난은 항상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사단이 신자의 믿음을 무너뜨리려 훼방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또 사단이 직접 준 것이 아니더라도 고난으로 인하여 사단에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종류와 기원이 다르지만 믿음으로 이겨내야 할 온갖 고난을 겪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박해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해 주님 안에서의 궁극적인 승리를 소망하라는 영적 원리는 현대 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권면을 했습니다. 너희 ‘고난을’ 주께 맡기라고 하지 않고 ‘염려를’ 맡기라고 합니다. 고난은 현재 당면한 어려운 문제이며 염려는 그로 인해 마음에 생긴 걱정입니다. 이제 특이하다고 말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에게 현재 자신이 겪는 고난을 단순히 고해바치기에 급급합니다. 그리고선 자기가 원하는 시기와 방식으로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발생할 모든 일이 하나님 책임이라고 그분께 통보 내지 선언하는 꼴입니다. 분명히 미주알고주알 기도하여 하나님께 전부 의탁했으니 다 맡겼다고, 또 자기 믿음에 별반 하자가 없는 듯 여깁니다. 나아가 그렇게 가르쳐지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의 모든 사정과 소망을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그것은 신자가 행할 너무나 기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모든 사정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머리카락까지 센 바이지 않습니까? 아니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계획 아래 있지 않습니까? 사단의 직접적 훼방조차 그분의 묵인 하에 일어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하나님이 자기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일일이 보고한 것만으로 그분께 온전히 맡겼다면 뭔가 잘못된 것, 최소한 부족한 것 아닙니까?

일일이 보고만 하는 기도에는 분명히 기도라는 종교적 형식은 취했지만 믿음으로 반응한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최소한 그런 고난 가운데 신자로서의 자신의 심정과 각오라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종교와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신앙은 종교라는 형식을 필요로 하지만 신앙 없이도 종교는 얼마든지 융성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종교적 실력과 행동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참된 인격적 관계를 유지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염려를 하나님에게 맡겨야 하면 아직도 고난이 끝이 난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경우처럼 사단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일어난 신자와 교회를 향한 핍박이라면 인간 신자가 맞서 대적하기가 힘에 부칩니다. 또 언제 끝날지, 어쩌면 순교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고난을 대하는 신자의 믿음의 자세, 특별히 기도하는 내용이 지금껏 우리의 상식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이는 하나님

지금 베드로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든 내용이 아주 특이합니다.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알라고 합니다. 신자를 격려하는 내용이라면 “너희 형제들도 이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했지만 믿음으로 기도하였고 또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었으니 너희도 아무 염려를 하지 말라”는 식이어야 정상적이지 않느냐 말입니다. 대신에 다들 고난당하고 있으니 참고 견디거나 아예 당연하게 여기라고 말한 셈입니다. 사도가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 해야 할 권면치고 아주 빈약하고 무력한 내용이지 않습니까?

왜 이런 권면을 하게 되었을까요? 당시의 성도는 쉽게 순교까지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요컨대 성도라면 으레 핍박은 당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며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 핍박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일일이 고해가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도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교회를 넘어뜨리려는 핍박인줄 알고도 오히려 그렇게 허용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하신 계획과 놀라운 뜻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사단이 일시 승리한 것같이 보였지만 완전한 실패로 끝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는 세상의 핍박 아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성도가 흘릴 피 위에 견고한 터를 잡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단에게 초대 성도들을 희생양으로 바쳐야 한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시키려는 섭리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실제로 따라 가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였습니다.

나아가 신자들 스스로도 세상에 전혀 뜻을 두지 아니하고 자발적으로 예수님 가신 길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따랐기에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고난이었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이 서신을 쓴 베드로도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조차 자기에겐 과분하다고 여기고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전해지지 않습니까?

어차피 핍박은 있게 마련이고, 언제 끝날지 모르며, 순교될 수도 있고, 사단이 하는 일이라 인간이 이겨내기 힘들고, 심지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 아예 아무 말 않고 당하기만 하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아예 부질없는 짓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허무나 염세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땅은 외면하고 천국으로 도피만 바라는 종말주의와도 완전히 담을 쌓고 있습니다.

핍박이 심하여 순교로 끝나든 아니면 고난에서 지금 당장 구원을 받게 되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일어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베드로 사도가 옥문과 사슬이 저절로 열리는 기적을 통해 구출 된 반면에 스데반은 설교 중에 돌에 맞아 순교하든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만사를 진행시키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신 일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신자의 현재 형편과 무관하게 그분의 거룩한 통치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될 뿐입니다. 나아가 신자의 고난이 그런 통치에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신자로서도 응당 하나님의 이런 통치 원리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여 고난이 끝나야만 신자의 믿음이 좋은 것이고 또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당신의 영광은 신자의 고난 중에도, 초대교회 같은 경우는 일부러 고난을 받게 해서라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自存) 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자존(自尊) 즉,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세상 어느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으며 혹시라도 영향을 받아 조금치라도 손상당하지 않습니다.

역으로 따져 보십시오. 사단이 지금 어떻게 하든 초대 교회를 흔들어 넘어뜨리려 하는데, 또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성도들의 피 흘림 위에 교회를 세우려 하는데, 성도가 핍박을 없애달라고 아우성치거나 나아가 두려움에 떨며 염려하고 있으면 사단의 농간에 놀아나고 하나님의 계획에는 거슬리는 결과를 낳지 않습니까?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도 핍박 앞에 육신적으로는 두려워집니다. 구원해달라고 간절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 핍박이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흉계에서 나온 것이라면 마땅히, 아니 기꺼이 당하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분명히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그런 내용의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날의 신자에게는 선교지로 나가지 않는 한 종교적 핍박은 거의 없지만 현실적 고난은 여전히 있게 마련입니다. 사단의 방해, 세상의 죄악, 신자의 잘못 등 어떤 연유로 고난이 생겼든 신자의 유익과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직간접으로 반드시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미 신자의 모든 사정을 꿰뚫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결국도 반드시 그분의 능하신 손 안에만 있습니다. 그럼 신자가 그분께 맡길 것은 당연히 고난이 아니라 염려여야 하지 않습니까?  

압도적인 사단

베드로가 고난 대신에 염려를 맡겨야 한다고 든 또 다른 이유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사단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단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성도를 대상으로 훼방하고 궤휼에 빠트리려 합니다. 고난 중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사단의 먹이 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단은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 어긋나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사단이 신자에게 알게 모르게 아주 조금씩 방해하며 허물어 나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넘어뜨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삼킨다”는 것은 불시(不時)와 일시에(一時)에 즉, 성도는 전혀 눈치도 못 채는 상황에서 사단에게 완전히 집어 먹힌다는 뜻입니다. 물론 삼키워졌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거나 신자에게 내주하는 성령의 권능이 완전히 무력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신자가 사단의 흉계에 일시적으로, 순간적으로,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신자는 항상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는 처음에는 조금씩 들다가 자꾸만 커져갑니다. 처음부터 순간적으로 최대치에 바로 도달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예컨대 강도가 당장 칼로 목을 자를 듯이 덤비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핍박도 차츰 그 세기를 높여갔지 않습니까? 또 신자가 근면하고 깨어 있는 일 자체도 계속해서 동일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염려한다고 순간적으로 삼키어진다면 조금 앞뒤가 안 맞는 말 아닙니까?

물론 외적 측면만 보면 사단은 성도들로 전혀 눈치 못 채게 야금야금 쳐들어와 조금씩 넘어뜨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눈치 못 채고 당한다는 것은 사실상 이미 완전히 넘어갔다는 반증입니다. 본인이 의식하기는 아주 조금씩 당한 것 같지만 이미 깨닫고 난 뒤에는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은 분명히 삼켜진 증거이지 않습니까?

죄는 분명 신자로 조금씩 무너트립니다. 그러나 죄의 원흉 사단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신자를 완전히 삼켜 놓고도 마치 삼켜지지 않은 것처럼 신자를 속입니다. 단순히 조금씩만 당하고 있다고 여겨지기에 언제든 내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이겨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이라는 생각은 바꿔 말해 바로 “믿음을 스스로 바로 세워서 혼자서 사단을 이겨낼 수 있다는” 헛된 자신감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사단이 가장 잘 쓰는 수법은 신자로 자신을 얕보게 만들거나 아예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단은 신자의 믿음조차, 말하자면 예수님의 예에서 보듯이 말씀과 기도 가운데도 얼마든지 농간을 부릴 수 있습니다.

솔직히 지난 모든 신앙 경험에 비추어 따져 보십시오. 믿음을 강하게 해서 사단을 이겨낸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또 앞으로도 말씀과 기도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사단은 절대로 그렇게 녹녹하지 않습니다. 일시에, 불시에, 삼켜 놓고도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 없는 것처럼 위장합니다. 깨달으면 이미 끝인 난 상태입니다. 마치 암처럼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다가 발견되면 이미 증세는 심각하게 진행된 후인 것처럼 말입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사단은 거미가 날아다니는 벌레들을 거미줄로 묶는 것처럼 신자를 다룹니다. 파리는 자기 가고 싶은 곳을 제 마음대로 날라 다닐 수 있기 때문에 거미를 우습게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거미는 컴컴한 구석에서 진을 치고 하릴 없이 그저 거물만 만듭니다. 그것도 눈에 빤히 보이는 거물을 말입니다. 파리는 그 거물에 잡힐 염려는 전혀 없다고 자신하고 실제로 잘 피해 다닙니다.

그런데 빛이 거꾸로 비취는 순간에, 혹은 구름이 빛을 가리는 순간에, 또는 파리 스스로 한눈을 파는 순간에 거미줄이 전혀 안 보인다는 사실을 파리는 모릅니다. 전혀 꿈도 못 꾸던 어느 순간 거미줄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나 여전히 거미줄이 연약하고 처음에는 사지가 마음대로 움직여지기에 얼마든지 끊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미줄이 자신의 사지를 이미 완전히 다 묶고 있습니다. 또 놀랍고도 기가 찰 노릇은 자기가 움직일수록 거미줄이 자기를 칭칭 감아서 진짜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거미는 파리가 완전히 힘을 소진하고 늘어질 때까지 가만 놓아두고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파리는 거미 구경도 못하고 죽어버릴 수 있습니다. 왜 죽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보잘것없는 약한 줄에 묶여 죽다니 하고 너무 억울하다고 한탄하며 죽을지 모릅니다. 요컨대 파리가 눈에 보이지 않던 거미줄에 걸리는 순간 이미 완전히 삼키워진 것입니다. 빠져나올 뾰족한 방도가 없습니다.

베드로도 사단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우는 사자”로 비유했지 않습니까? 백수(百獸)의 왕 사자가 울면서 온 천지를 헤매고 다닐 정도면 그 배고픔은 대단합니다. 사자에게 물리는 순간 단숨에 집어 삼키워집니다. 물론 먹이와 사자 입의 크기에 따라 한 번에 다 먹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일단 사자에게 물린 상태에서 절대 빠져 나오지는 못합니다. 근신하고 깨어있으라는 말은 바로 문밖에 굶주린 사자가 날뛰고 있으니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염려는 누구에게나 자연발생적으로 생깁니다. 바울도 그랬고 심지어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고난으로 힘들어 하는 것 자체가 사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어도 그렇습니다. 아니 오히려 승리한 것이었지 않습니까? 반면에 그 핍박이 어서 빨리 끝나지 않는다고 염려하는 것이 사단에게 삼키움을 당할 틈을 보이는 것입니다. 또 그 염려를 지속하면 이미 삼키워진 증거라는 것입니다.  

정작 가져야 할 믿음의 실체

베드로가 박해당하는 성도들에게 심어준 소망이 무엇입니까?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때가 되면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핍박이 그치게 하고, 핍박하는 자를 망하게 하고, 너희들은 크게 축복해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염려하지 않는 신자는 높여 준다고만 합니다. 당신의 궁극적인 영광에 동참시켜 주신다는 것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확신하기에 그 영광에 동참할 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자라야 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결론을 보십시오. 왜 고난 대신에 염려를 맡기라고 하는지, 나아가 왜 고난보다 염려가 사단에게 틈을 주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10,11절)

하나님이 불안 초조 염려하는 신자의 정서를 치유해 줄 것이라는 의미는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염려하다 보면 그 생각에 묶여 완전히 염려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심리적 요법이 아닙니다. 신자에겐 그 삶과 존재 전부가 진리 안에 서 있느냐 아니면 사단에게 빌미를 주어 삼키어져 버리느냐 둘 중 하나의 경우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진리 안에 있으면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염려를 맡기라는 뜻이 현실의 고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주겠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처음부터 끝까지 신자를 통해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하기에 이 땅에서 잠시 고난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런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영광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평생토록 일부러 고난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또 신자의 정서를 온전케 세우고 생각도 바꾸어주며 현실의 고난에서 구원도 해주십니다. 신자가 고달프며 아프고 슬퍼하면 하나님은 더욱 안타깝게 여깁니다. 신자의 기도에 때가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신자를 거룩하게 다스리는 근본 목적은 오직 신자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게 하는 것에만 모일 뿐입니다.

그 영광이 드러나는 시점이 이 땅에서일지, 순교하고 난 이후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대신에 단지 너희를 견고케 한다고 합니다. 이 약속은 물론 모든 신자에게도 해당되지만 오히려 초대 교회와 관련한 언급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교회의 싹을 자르려 덤벼도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주인으로 모신 자들로 불러 모은 교회는 그분이 머리가 되고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만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단이 하나님의 계획을 절대 가로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그렇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조차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주권과 섭리 안에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서 자신의 온전한 믿음으로 인해 또 그 믿음대로 사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어려움과 핍박은 염려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교사로 자원하여 핍박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보면 십자가의 도를 싫어하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케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답게 사는 것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손해가 싫어서 진리를 타협 왜곡하지 말고 오히려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를 지키는 싸움을 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  

그런데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께 줄기차게 기도하며 인생에가 가장 중점적으로 추구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현실적, 개인적 어려운 문제만 줄줄이 아뢰어서 전적으로 맡긴 것뿐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알아서 하라고 요구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내 때와 방식대로 응답이 안 되면 그저 염려가, 나아가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만과 불신만 자꾸 솟아납니다.

고난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빛이 비취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고난은 그렇다 쳐도 자신의 형통을 통해서라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겠다는 소원이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이 골고다 십자가에 실현한 은총과 권능으로 붙들고 있으며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끄시고야 만다는 믿음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진 신자로서의 신분과 위치와 특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신자가 고난 가운데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오직 염려입니다. 또 믿음으로 스스로 바꾸어야 할 것도 심리적 치유나 사고의 전환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영광만 소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난이 있다고 믿음이 적다는 표시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좋다는 혹은 좋아지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사단의 식욕은 신자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것으로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단번에 삼켜버려야 겨우 만족하는 탐욕스런 존재입니다. 우는 사자와 같습니다. 다니엘을 참소한 자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서뜨렸지”(단6:24) 않습니까?

반면에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23절)고 하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사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은 너무 억지입니다. 믿음으로 그 두려움을 이겨냈다고 하기도 사실은 무리입니다. 그는 사나죽으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 아래에 자신이 붙들려 있다고 확신한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자신의 고난 대신에 염려를 맡긴 것입니다. 그는 사자 굴 속에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길 고난이 따로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고난 가운데 기도하는 것도 이미 사자 굴 속에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정작 하나님께 믿고 맡길 것은 염려뿐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절대성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정말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어떻게 드러낼 지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당장 전임 사역자로 헌신하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세속의 일을 통해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자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은 고난을 당하면 기도하여서 고난을 맡깁니까? 염려를 맡깁니까? 염려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은 해봤습니까? 혹시라도 염려를 맡긴다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고 기도했으니 염려가 없어지리라 기대하는 정도는 아닙니까? 자신이 죽든 살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길 진정으로 소원하면서 기도한 적이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만 비로소 염려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8/1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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