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헝그리맨의 거듭남

조회 수 1171 추천 수 63 2007.01.07 08:46:48
  
           김교신

성서조선 第 6 號 (1928年 11月)  
  
한 사람이 회개하고 나사렛 예수를 주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게 됨에는 반드시 성령의 크나 큰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는 각기 개성과 주위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소원과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메이지 유신 때에 일본 청년 50여명이 구국의 정신으로 혈서를 쓰며 맹세하고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들을 때마다 그 장한 기개를 부러워했으며, 인생의 절정을 지난 후에야 바야흐로 지난 죄와 나중의 복을 생각하고 마음을 다하여 도를 깨닫고자 하는 예가 많은 것을 볼 때에 그러한 사정을 동정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는 50년 전 일본 청년과 같은 고상한 야심이 주된 동기가 아니었다.    또 세상 살면서 지은 죄를 씻고 다음 세상에 다행히도 극락세계에 들어가기를 애원할 필요도 없었다.

나의 관심사는 죽은 다음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었고, 철두철미 지금 생의 문제뿐이었다.    죽은 다음 천사가 되거나 또는 지옥 불에 타거나 이런 것이 나의 심령에서는 크지도 긴급하지도 않은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내 현재의 육체와 마음을 이대로 가지고서 현생에서 하루라도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이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나는 나이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는 뜻이 확고하게 섰고, 마흔에는 모든 일에 혹함이 없게 되었으며, 쉰에는 천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사물의 이치를 들어 저절로 알게 되었고, 일흔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느니라’ 하는 공자의 말씀을 학습할 때에 이것이야말로 내 일생의 과정표라고 생각했다.

아니, 공자보다도 10년을 단축해서 ‘60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거리낌이 없다’ 의 경지에 이르리라고 속으로 다짐하며 낮이나 밤이나 애태웠었다.

그러나 애태우면 애태울수록 ‘도덕이 닦이지 아니하면 공부를 해도 그 공부 가 헛된 것’ 임을 한탄하게 되었다.    예순은 고사하고 여든에도 목표한 경지에 조금이나마 이를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자못 낙망의 바닥으로 떨어질 위기에 이르렀을 때, 나에게 다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며 일어서게 한 것은 청년 전도사를 통하여 온 기독교 복음의 소리였다.


그는 간증하기를 “일흔에 완성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스무 살 청년이라도, 믿고 따르는 순간부터 원해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하였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내 일생의 소원인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음’ 에 이르는 제일 좋은, 하나뿐인 길이라고 스스로 해석하고 너무 좋고 기뻐서 뛰고 또 뛰었다.

그 후로 다시 한번 노력하기를 시작하였다.    마음의 소원인 유교의 도덕을 기독교 전도사가 말한 대로 성령의 권능을 빌어서 빠르게 이루려는 노력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음’ 이라는 공자의 말씀과,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 것은 죄”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그 정도가 심각할 만큼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

‘원망은 솔직함으로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으라’ 하는 인간적인 교훈과,    “적을 사랑하며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뺨을 대라” 하는 초인적인 교훈을 비교하면     마치 연못과 태평양의 폭을 견주는 것이었다.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하라” 하는 두 구절을 생각할 때에 기독교의 전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덕률로만 보아도 기독교의 교훈에는 유교의 그것보다 훨씬 깊고, 멀고, 높고, 큰 무엇이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원대한 도덕률을 발견할수록 기독교에 대한 나의 열심은 점차 높아가고 간절해졌다.    그리하여 산상수훈의 아름다운 구절들은 한 점, 한 획도 남김없이 성취하리라고 자신하면서 도덕이라는 봉우리를 향하는 나의 순례의 앞길은 양양하기만 했다.

이러한 때에 어떤 기독교 교사에게서 산상수훈 해설을 듣게 되고는 나의 기독교관이 그 뿌리부터 동요하게 되었다.    공자의 언행보다도 더 아름답고 장엄한 기독교 도덕률을 “신자 각 사람이 살아서 실행하고 이루어 내는 것에 기독교가 기독교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라고 내가 감동 받은 것을 듣고는, 교사는 솔직하고도 대담하게 이를 부정했다.    성서에 그 근거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나의 실망이 심상치 않은 것을 염려하며 친절하게도 그 선배는 “다음 세상에서 거룩해지는 약속이 있다” 며 나를 위로하려 하였다.    그러나 ‘죽은 다음’ 또는 ‘다음 세상’ 따위의 말은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오히려 실망과 분개만 더할 뿐이었다.


떡을 달라는 자에게 돌을 던져 주니 무슨 만족이 있는가?    고기를 구하는 자에게 뱀을 주니 어찌 위안이 되랴?    내가 원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세상의 약속이 아니다.    이 육신 이대로 살아 생전에 1년이라도, 하루라도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기를 소원할 뿐이다.    이 이상은 필요 없으며, 이 이하는 불만이었다.

기독교가 만일 이 요구에 응하지 못한다면 내가 더 이상 기독교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공자에게로 돌아 가는 것은 심각한 절망을 다시 한번 반복할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슬프다, 나의 구도 생활은 여기에 이르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노력에서 절망으로, 번민에서 포기로 떨어지려 할 즈음에 나는 다시 한번 자아를 굽어 보았다.     전에는 내가 ‘의를 보고 행하지 못함은 용기가 없음’ 이라는 구절을 볼 때에 과연 ‘지금의 나는 용기가 없는 인간이지만, 점차 수양하고 단련하면 나중에는 큰 용기의 사람이 되리라’ 하고 생각했었다.    용기란 무엇인가?    전에 가졌던 개념대로는 나도 선을 수련하면 프랑스 함대를 인천 앞바다에서 일거에 격퇴하고 의기양양하던 대원군의 용기만큼은 생길 소질이 있다고 자임했었다.

그러나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의 용기를 배우고, 스데반과 사도 바울의 용기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기를 우러러 볼 때에 이러한 종류의 용기는 타고난 그대로의 나에게는 아예 추호도 없음을 발견하였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 (마태 6:24) 하는 것은 명백한 도리이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는 것은 보름스(Worms) 회의에 선 루터의 결심을 요구하며, 이스라엘을 인솔하고 홍해를 건너던 모세의 의기가 필요하건만, 슬프도다, 내 안에서 어찌 이것을 발견할꼬!

“그런 즉…..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들에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구구절절이 지당한 도리이다.    지당한 도리를 실천함에는 비상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용기의 조각 그림자도 내 안에는 없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으니 슬퍼한들 흡족하랴?    그러나 나에게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두 주인, 세 주인을 섬기며 생활하는 사람이다.    내가 목숨을 위하여 초조해 하고,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것은 개나 말의 본능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정말 공중에 나는 새보다도 못하고 들에 자라는 백합화보다도 부족한 자인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먼저 구하는 것은 그 의도 아니고, 그 나라도 아니고 오직 탐욕의 덩어리인 것을 보고 놀랐다.

내가 의를 보고 행하지 못함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의에 반응할 만한 용기가 전혀 없는 것이 이유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전에는 나는 성선설을 믿으며 천품의 선한 부분을 잘 발육하면 어린 나이에 뜻을 세우고 장래에는 완성할 것이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자신을 좀 더 명확하게 알게 됨에 이르러, 선한 성품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또 선을 보고도 이를 감히 실행할 만한 용기도 전혀 없는 가련한 죄악의 덩어리임을 알게 되었다.    자기 수양으로써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여 보리라 하던 야심은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슬프다,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여 줄 사람은 누구인가” 며 나는 급하게 호소하게 되었다.    전에는 내가 태평양의 서쪽 기슭에 서서 어찌어찌 하다 보면 저 건너 피안의 신천지까지 헤엄쳐 건너 보리라고 큰 소리 치며 교만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몸이 성난 파도에 부딪쳐서 생명이 위태로운 것을 보고 놀라서 구원을 부르짖게 되었다.

“대개 내 속(즉 내 육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있지 않음을 알았으니, 선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내게 있으나 그대로 이루는 것은 없다” 는 비통한 고백을 마지 못해 하게 되었다.

지극히 천하고 약한 죄인 중의 죄인 하나가 지극히 거룩하고 전능하신 왕 중의 왕 앞에 항복한 것.    자아의 수련과 발전이 아니고, 자아를 부정하고 자아를 포기하고 자살한 지경에 이른 것이 내가 믿게 된 동기였다.


도덕적 수양에 권태로워 지고 파산 당한 상태로 수습하기 곤란했던 자가 “건강한 사람은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사람이라야 쓰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선언하신 이에게 달음박질하여 간 것이 내가 예수께로 따라간 걸음이었다.




전체적인 활동을 분석하자면, 자신만의 색깔이 너무 강하면이 있지만,
이분에게 돌을 던지기는 어려운것같습니다 !!

사명은  각자 각자 !!!





정순태

2007.01.07 09:27:24
*.75.152.43

함석헌 선생과 함께 제도권 지도자들로부터 "무교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신앙 선구자!!!

김교신 선생의 주장에, 다소 급진적이고 강성적인 면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성경을 완전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좋은 자료 발굴하여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문수 형제님!
제가 보내드린 '물총'은 사실 가장 최근에 개발된 최강최신무기였습니다.
백보신권과 탄지신통의 묘리를 응용한 것으로서
형제님의 무한 내공을 손가락에 모아서 아주 살며시 방아쇠를 당겨야 합니다.
만약 적군의 모습에 겁을 먹고 격하게 격발하면, 그냥 물총이 되어 버립니다.
겁먹지 말고 평안한 마음으로 당겨야 진정한 "은총"이 되어 무엇이든 박살을 내게 되어있습니다.

이 엄청난 신무기를 제대로 사용치 못하시다니~~~~~형제님께서 엄청 겁먹으신 것 같습니다.^^^^^^^^^^(계속 웃는 모습^^)

아무튼 빨간 약 바르시고 얼른 나으시기 바랍니다. 샬롬!

김문수

2007.01.07 10:32:39
*.74.19.79

흠~~흠~~
순태 형님 !!
저같이 고루하고 정권단련에만 정진하는 골통에게
최첨단 신무기를 보내주시면 어찌 감당하겠나이까 ???

앞으로 물건보내주실때는
상세한 제품소개와 작동법을 함께 보내주시고
어리버리한 제가 이해하기쉽게 암호문서로 보내시지마시고 [오발사고가 발생할수있으니...]
순수한 한글로만 설명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형님께서 생사를 넘나들며 깨달으신 내공운용법의 전수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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