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두 렙돈과 성전-제 2 호-

조회 수 1146 추천 수 40 2008.09.20 23:30:31
두 렙돈과 성전의 비밀

예수께서 성전을 가리키며 그 웅장합과 아름다운 미석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무서운 재앙의 말씀을 하신 장면을 기독교 신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복음서에 마태,마가,누가복음에 공동으로 기록한 기록중에 한가지 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기자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이유라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낀 생각이 유독 강열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또 한가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모아진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 될 일에 대하여 더이상의 변개함도 없이 확실하게 뜻을 이루신다는 확실성을 들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다 이루셨고 이루어 졌으며 이루실 것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재림하실 것만 남은 것이므로 사실 구약 성경에 예언한 선지자의 선포가 다 이루워진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들은 이제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늘에 속한 신분들 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는 이유라면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은 성결한 삶을 살도록 소금과 빛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죄악에 빠져서 죄를 씻지 못한채로 죄와함께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며 믿으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즉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것입니다만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은 넘쳐 나지만 정작 영적인 생명이 살아있지 않은채 세상의 모임과 친목 단채이상을 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려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치가 그대로 교회 라는 이름만 바꿨을 뿐 구별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인들은 많으나 성도들의 모습이 삶속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슬픈 현실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종교적인 종교인들이 많고 교회에 소속한 교인들은 많지만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양 들이 있기는 한데 정작 영적인 생명인 예수의 영으로 사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현재 제도권속에 있는 교회 구조적으로는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며 세상과 다를바 없는 종교인들만 무성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일지기 종교 개혁자들이 소리높이 외친 성경으로 깊숙히 들어 가는 것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고의 나팔소리를 전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 것처럼 불행한 시대는 없습니다. 오늘 이시대의 교회는 정말로 성경의 소리를 정확하고 진실하게 가르치고 있는지요? 성도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지요?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라면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로서 모르면 모르겠다하고 아는것은 솔직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돌들이 말을 할 것이며 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하는지 이제 부터 본론으로 들어 갑니다.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대부분 이 본문은 헌금 강조용이나 당위성을 강조해서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과부의 헌금행위를 높이 평가한 것 처럼 성도들 역시 생활비 전부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헌금하자로 갈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 읽어가는 성도라면 그의 신학적인 배경 없이도 충분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듯 해서 좀 답답합니다. 오늘날은 예전처럼 신학자들이나 전문 목회학 박사 아니어도 일반 성도들의 눈과 귀가 훨씬 성능이 좋다는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중세 교회사때처럼 특정 사제단이나 읽을 수 있는 감춰진 성경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언어와 각종 주석서들을 참고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가 열려진 것입니다.

아직도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은듯하니 성경 본문을 똑 때어서 그 부분만으로 설교를 하시니 그럴듯한 헌금 강조용으로 둔갑할 수 밖에 없고 일부 성경을 읽기를 싫어하는 교인들에게는 그저 아멘으로 은혜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배후에는 사단의 교묘한 전략이 적중을 한 것일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하기는 너무나 쉬운일인데도 교회의 권위주의로 인하여 감히 기름받은 주의 종을 거역하거나 대적하거나 비판하는 것으로 억압해서 저주 설교까지 하는 강단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만 알만하고 지혜가 있으시고 능력있으신 몇몇 목회자들 역시나 자리 지키기 위해서 교단과 노회의 눈치보느라 함구하고 피해가거나 적극적으로는 동의하는 과감한 모습까지도 보이니 암담합니다만 하나님 앞에 지금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처신 해야할까는 분명해 질 것입니다.

먼저 본문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과연 헌금을 내야하는 적용인지 말입니다.

주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과 또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이 모든 사람은 그들의 풍족한 데서 하나님께 연보로 넣었지만, 그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생계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시더라.(눅21:1-4)

이 부분만 보면 그럴싸 해 보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 기록자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충분한 단서들을 곳곳에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대적인 상황과 배경과 문화를 이해하고 앞 뒤의 연결 구절들을 함께 살펴야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보물을 찾거나 퀴즈를 푸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특정인 들에게만 보여지는 신기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에게 누구나 열려진 책입니다. 구원 얻은 성도라면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백성이 듣고 있을 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는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좋아하고 또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니, 그들은 더 큰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시더라.(눅20:45-47)

여기서 부터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은 분명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과부의 집을 집어 삼키는 위선적인 서기관들을 조심하며 경계하며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기관들은 종교적인 기득권자들은 더 큰 저주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주님께서 과연 과부의 헌금 행위를 칭찬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난한 과부들이 헌금을 잘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셨겠습니까?

주님의 다음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주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과 또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이 모든 사람은 그들의 풍족한 데서 하나님께 연보로 넣었지만, 그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생계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시더라.(눅21:1-4)

제자들에게 "그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생계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신 말씀의 본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생활비를 다 넣었으니 저 과부의 내일 생활은 어찌 될 것인가?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 어찌 할까요? 하고 질문할까요? 여러분들이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제자라면 즉시로 몰래 과부의 뒤를 따라가서 왼손 오른손이 모르게 그 집 마당에나 문 앞에 먹거리라도 혹은 밀가루라도 놓고 오지 않았을까요? 너무 작위적인 생각인가요?

여기 과부는 사실은 그 당시의 수 많은 과부들의 대표입니다. 가장 소외 되고 연약한 소자들 중 과부인데 성전안에는 많은 부자들이 있었고 그 풍족한 중에 헌금을 하면서 유희를 만족을 종교적인 행위로 위안을 누리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봐야할 의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특히나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런 서기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주님께서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는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좋아하고 또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니"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해야함을 누누이 강조 했을 것이며 말라기서를 인용해서 하나님의 것을 십일조를 유난히도 강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것을 경고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이 부분을 갖고 또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시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고집을 합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박하와 아니스와 커민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과 공의와 자비와 믿음의 더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이라. 너희는 이것들도 마땅히 행하고 또 저것들도 저버리지 말아야 하리라. 너희 눈먼 안내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마23:23-24)

어느분의 글을 잠시 인용합니다.

그리고 23절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면, 먼저 예수께선 그들이 하고 있었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예로 들고 계신데 -누가복음에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 도대체 박하와 회향이니 운향과 근채니 이런게 무언지나 아십니까? 사전을 찾거나 영어 단어와 비교해 보시면 이것들이 민트, 허브 등의 향신료 종류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품목들은 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논쟁하던 바로 그 품목들인데, 하나같이 개인의 밭에서 정성 들여 김매고 키우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씨만 뿌려 놓거나 아니면 들에서나 산에서도 구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파, 마늘, 깻잎, 들깨 뭐 이런 양념 종류들과 심지어 들풀에 대한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까지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것을 예수께서 기특하게 여기셔서 황당한 '양념'의 십일조를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주장도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이것들도 버리지 말고 저것들도 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예수께서 십일조를 지지하셨으니 우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황당하다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십일조를 강조할 구실을 찾긴 찾아야 할텐데... 고민하다 결국 찾아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기에 앞 뒤 가리지도 않고, 게다가 가장 권위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니 더욱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래서 냅다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해라 하셨다고 소리 지른게 분명합니다.

원글보기 참고: 출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 포커스

이런식으로 성전이나 회당에서 서기관들이 가르쳤으니 아마도 노이로제가 걸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가난한 과부들의 작은 물질 마져도 하나님께 바쳐야만 한다는 강조를 오랫동안 들어 왔었던 과부들에게는 정말 모처럼 일한 품 삯을 렙돈으로 만졌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내가 그동안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는데 이거라도 값아야 하겠구나 하며 연보궤에 넣었을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평소에 돈을 손에 쥐어본 일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과부가 살아가면서 돈을 번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대사회에서는 어린아이와 노인과 여자는 숫자에도 들지 않잖아요? 일을 해도 물물 교환식으로 농작물이나 소출의 얼마를 때어서 삯으로 받아서 하루 하루를 연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과부의 두 렙돈은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며 처음이자 마지막 헌금일 수도 있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과부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공동체를 꾸려야 할까를 미리 제시해준 교육현장인 것입니다. 그 일례로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교회의 특징이 그 중에 핍절한 자가 없었다이며 서로 나누어서 공용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과부들을 위한 매일 구제의 일도 활발했었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집사들을 세운 이유는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들의 구제에 차별이 생기는 불상사가 나타났고 그것때문에 공동체 안에 원망과 불평이 나오자 긴급대안을 제시한 것이 집사를 세워서 구제를 하게 하고 사도들은 말씀전하는것에 집중하자고 한 것이지요.

이러한 주님의 의중을 모르는 사람들이 따라 나와서 하는 소리가 뭔줄 아시는지요?

몇 사람이 성전이 얼마나 우아한 돌들과 예물로 단장되었는가 성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그 날이 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니(눅21:5-6)

주님 보시지요. 이 건물들과 성전을 건축하는데 돈 없이 되었겠어요? 우리들이 낸 풍부한 헌금으로 지은 이 건물들을 보시지요. 과부의 두 렙돈으로는 어림도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도 돈이 있어야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성전도 멋지게 건축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성전을 보세요? 어마 어마한 돈이 들어서 건축했고 저희들은 그 돈을 모으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자꾸 저희들이 낸 돈을 가치 없게 취급하시니 섭섭합니다.

제가 스토리를 써 봤지만 어쩌면 성전을 자랑하는 서기관들이나 부자들이 주님께 하고 싶은 말이 이런거 아닐까요? 마치 사울왕이 사무엘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좋은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하고자 남겨놓았다고 말입니다. 분명 하나도 남기지말고 진멸하라 하셨는데도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최고로 좋은 제사를 드리려고 진멸하지 않았으니 자기는 어김없이 말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너무 억을하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꾸만 자기들을 위선자라고 질책하시는것에 대하여 항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만 왜 욕을 먹는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저 시기하고 샘이나서 그러는것으로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사회에서 좋은일도 많이 하고 선교도 하고 행사도 하는데 돈이 없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구구한 변명을 합니다. 이 건물을 보십시오. 주님. 하나님의 교회는 최고가 되어야 하나님도 높아지지 어떻게 천막이나 지하 컴컴한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게 좋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을 길러야 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가 되어야 교회가 무시를 당하지 않겠답니다. 그래서 깨끗한 부자들이 교회안에 많이 나타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요?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그 날이 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이것이 두 렙돈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면 너무 억지일까요? 제가 유명해 지고 싶어서 억지로 지어낸 것일까요? 사실 과부의 두 렙돈의 기사는 결국 오늘날에도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유대인들처럼 세상 부귀와 가치관을 추구하게 되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처럼 쓸모없는 폐기처분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로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자선사업이나 구제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초대교회처럼 불상사가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구속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처럼 그 한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갖고 성경적인 복음과 구원에 대하여 가르쳐서 주님앞에 세워야 하는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단지 교인수만 늘이려고 종교적인 만족감을 고취시켜서 행위로 만족하며 많은 헌금과 십일조 생활로 의무를 다하면 믿음에 합격점을 주는 식으로만 간다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것을 감찰하시는 분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의 제도적인 교회의 전통이 좋고 편안해 보여도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의 구원자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예수께서 사도들을 통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들의 전한 복음은 십자가 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전통이나 규례나 관습이 아닙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으며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자는 구원과 영생이 주어짐을 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와서 그 십자가의 구속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죄를 씻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누리는데 돈과는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거치는 것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목적과 자세가 어떻해야 함을 날마다 가르치고 떡을 때며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뿐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 너희 목마른 자들은 누구든지 물들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으라. 정녕, 와서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쓰며 배부르지 않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열심히 경청하고 좋은 것을 먹으라. 그리하여 너희 혼이 풍요함 속에서 스스로 기뻐하게 하라.(사55:1-2)

그 명절의 가장 큰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하시니 (이것은 주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라.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직 성령을 주지 아니하셨음이라.)(요7:37-3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마11:28-30)

그들이 성전에서나 각 집안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을 쉬지 않더라.(행5;42)

오늘 우리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뒤로한채 사람들을 끌기위하여 그들의 관심에 눈을 맟추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로 모을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들어야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전하지 않는다면 다 헛수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부의 두 렙돈 기사를 통해서 헌금 강조만 하고 있다가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버림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교회들인 성도들 각각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값을 주고 사신 주님의 성도들이 꼭 명심하고 잘 알아서 더이상 속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 세운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과 직분자들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직분이나 공로나 명예가 아무런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가르치는 것 만이 있을뿐입니다. 누가 크냐 하고 비교할 건덕지도 없습니다. 내가 뭔가를 했노라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며 과연 성경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고 듣고 있는가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아직도 성전 자랑하는 것에서 머무른다면 주님의 마지막 경고마저도 헛된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008-09-19. 나그네 칼럼-제 2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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