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오왕과 다니엘

조회 수 1337 추천 수 31 2008.10.20 19:34:25
다니엘 처럼

사실 다니엘서는 그동안 여러차례 읽었습니다만 매번 남다른 감동을 느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공감하시겠지만 성경에 보면 항상 감동적인 장면들은 시대를 초월해서도 여전하지요. 세상의 문화는 아무리 감동적이라 해도 새월이 지나면 조금씩 흐려지는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속담이 생각 납니다. 듣기좋은 꽂노래도 한두번이지 라는말이 있듯이 세상의 모든 풍조는 지나가기 마련 입니다.

개인적으로 항상 감동을 느끼는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요셉이 애굽에서 죽을 고생 하다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총리가 되서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과 상봉하는 장면입니다. 그 정을 참지 못하고서 목을 놓아 울어버리는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얼마나 형들에 대한 애증이 교차했을까요. 원망도 했을 것이며 그리움에 잠못들었을 어린 요셉이 막상 눈앞에서 쌀을 구하고자 찾아온 미운형들을 보고서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까를 짐작해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미움보다는 사랑이 더 절실했기에 그만 그들을 얼싸안고 대성통곡하는 그 장면은 지금도 제 마음을 뜨겁게 하는 장면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진한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감동은 정말 또다른 묘한 울림으로 언제나 제 기억을 사로 잡고 있습니다. 먼저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것이라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를 통해 가슴을 조리며 온 밤을 지새웠을 다리오 왕의 모습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얻고서도 변함없이 충성되이 왕을 위하여 거짓없이 섬겼다는것을 입증하는 대목입니다. 당시 온 나라를 다스리는 엄청난 권세를 누리는 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모든 도를 관리하는 총리들의 으뜸이 된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했다는 것을 다리오왕이 인정했기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였지만 사람으로서 알수 없는 비밀한 일을, 은밀한 일들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다리오왕조차 감탄을 한 것입니다. 왕으로서 다니엘에게 엎드린 것은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다니엘을 통해 계시한 두렵고 엄위한 하나님앞에 엎드린 것이지만 그런 다니엘을 전적으로 신임을 했습니다. 총리들에게 미리 모든 일들을 전해들은 다니엘이 지혜롭게 민첩하게 왕을 위하여 손해가 없이 하였습니다. 이말은 다니엘과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총리들의 저의를 알고서 말하자면 결제서류에 도장을 선택적으로 했다는 의미를 포함 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다니엘의 신분은 포로의 신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적국의 나라 즉, 원수의 국가에 포로였었는데 세상말로 인생 역전을 해서 원수의 나라에서 왕과 같은 권세를 누리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중한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니엘은 왕을 섬기는 것이 사실은 왕을 세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하면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 되어서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포악한 왕이라해도 보편적으로 정의를 원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속성중의 하나로서 비록 죄로 인하여 희미해졌고 왜곡되었지만 인간의 도덕적인 것은 어느시대를 통해서도 그것은 확인이 됩니다. 불완전하기는 해도 말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모든일을 자기의 권세를 사용해서 철저하게 행하였습니다. 다니엘이 다른 총리들에게 고소를 당한 것은 그가 불의를 했거나 뇌물을 받았거나 그런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그런 부정과 부패의 관행들을 근절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기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챙겨왔던 모든 부서의 행정들이 다니엘로부터 관리를 당하니까 소란스러웠던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귀신들여 점하던 여종을 구해주자 그들의 주인들이 돈벌이가 끊어졌기 때문에 유력자들을 충동질 시켜서 바울을 잡아 때리고 핍박을 한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정치나 경제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곳곳에서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불법행위로 연루가 되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는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법과 윤리를 고수하려다가 모함을 당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런분들이 훨씬 많지만) 뇌물을 수수하고 편법을 동원하고 하는 일들로 법의 심판을 당하는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의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상관 없습니다. 그가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하나님의 공의가운데 선을 위하여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의 신분이 갑자기 총리가 되었어도 그는 자기의 신분이 하나님의 종이라는것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매일 하나님 앞에 하던 기도를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반드시 기도를 열심히 하자라고만 생각하면 곤란 합니다만 뜻을 정한 것을 힘써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눈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의 사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총리들이 다니엘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은 그들의 가치에 동의하거나 한패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자리와 죄인의 길을 따르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다니엘을 고소할 꺼리를 백방으로 찾았지만 흠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으로 고소거리를 만들려고 간악한 꾀를 사용합니다.

"이 나라 정승들과 대신들과 지방장관들과 고문관들과 총독들이 모두 의논한 바가 있습니다. 임금님이 법을 한 가지 만드셔서, 금령으로 내려 주시도록 요청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법은, 앞으로 삼십 일 동안에, 임금님 말고,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집어 넣기로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임금님이 이제 금령을 세우시고, 그 문서에 임금님의 도장을 찍으셔서, 메대와 페르시아의 고치지 못하는 법을 따라서,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리우스 왕은 금령의 문서에 왕의 도장을 찍었다.(단6:7-9)

왕의 입장에서는 좋은일입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참 난감한 일입니다. 그의 입장은 그러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

다니엘은 알고 있었지만 늘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기를 모함하려는 무리들의 간계를 모를리가 없습니다. 좀 참았다가 삼십일이 지난후에 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자기를 감시하는 눈들이 있다는걸 모를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니엘이라면 아직까지는 절대적인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니까 변명을 하고 충분히 위기를 모면할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무릎굻고 기도한것이 고소에 해당하는지 면밀하게 따진다면 정확한 증거로 인정될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다니엘은 그때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이 위험에서 구해주실 것을 간구 했을까요? 저들의 음모를 무너뜨리게 하옵시고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실것을 간구했을까요? 그는 늘 하듯이 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기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오히려 감사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 원대로 하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그는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장에 내 눈앞에 닥친 위기때문에 울고 불고 한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 모든것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기이한 일들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추억하며 감사를 하였습니다. 자기 개인의 만족을 위하여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여기까지 인도하심에 감사한 것입니다.  다리오왕에게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하자 그때에야 비로소 왕은 속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왕의 행동때문에  더욱 감동을 합니다.

그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임금님, 유다에서 잡혀 온 다니엘이 임금님을 무시하고, 또 임금님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무시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왕은 이 고발을 듣고 몹시 괴로워하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해가 질 때까지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단6:13-14)

왕이 다니엘 때문에 몹시 괴로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요? 다니엘을 아끼고 위하는 왕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하고 큰가를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단지 자기에게 충성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 때문에 그럴수도 있습니다만 왕이 다니엘을 구해보려고 저녁때 까지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왕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부분 입니까? 법을 집행해야할 왕이 이렇게 까지 고민하며 애를 썻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관심이며 사랑입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무산되었고 집요하게 고소하는 총리들과 방백들의 성화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왕의 마음이 얼마나 상심되었는지 금식을 하고 오락을 금하고 잠을 못이뤘다고 합니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네가 늘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하여 주시기를 빈다."

그 뒤에 왕은 궁전으로 돌아가서, 그 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즐거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동이 틀 때에, 왕은 일어나는 길로 곧 사자 굴로 갔다. 그 굴 가까이에 이르러서, 왕은 슬픈 목소리로 외치며,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늘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사자들로부터 구해 주셨느냐?"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었다.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나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다니엘을 굴에서 끌어올리도록 명령하니, 사람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끌어올렸다. 그가 자기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아무런 상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리오왕과 다니엘의 대화를 읽으면서 매번 감격하는 장면입니다. 도대체 다니엘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오늘날 성도라는 우리들은 그리고 저 자신은 과연 이렇게 주위 사람들로부터 감동을 만들어 내는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빛과 소금은 고사하고 앞가림조차 못하는 저를 보면서 매번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나같은 쓸모없는 죄인을 위하여 몸소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심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다니엘의 발끗조차 흉내낼 수 없는 못난 사람입니다. 매번 넘어지고 자빠지고 쉽사리 죽지 않는 자아때문에 괴로워 합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세상을 다 얻은것 마냥 조금만 기분이 좋으면 우쭐거리면서 대단한 믿음인양 가르치고 쉽게 정죄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조금 응답을 받거나 말씀에 은혜를 느끼고 진리에 대하여 눈꼽만큼 본 것으로 전부를 본 것인양 떠버립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정말 감동을 받아야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입니다. 그 십자가가 아니라면 세상에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죄인이 죽어야 하고 못 박혀야하는 거치른 나무 십자가에 죄인인 내가 죽는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살수 없기에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어주신 이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께서 죽임 당하신 그 십자가를 보아야만 우리는 진정한 생명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절망속에서 다시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 나의 생명의 영원한 보장이신 예수.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없이 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가려주신 예수. 날마다 정죄하고 참소하는 사탄의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서신 예수. 그 몸에 난 상처와 손에 묻은 상처를 보이시며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신 예수. 예수 이름으로 살고 예수 이름으로 죽는 자리에 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예수. 그에게만 오직 나 보이기를 원하네. 그에게만 가기를 원하네. 그 사랑으로만 살기를 원하네. 그 이름으로 만족하며 그 이름을 불러 찬양하며 그 이름을 증거하며 그 가신 길을 따라 살려하네.

나는 다니엘 처럼 요셉처럼 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등뒤에서 나와 함께 걸어가시는 주님으로 인하여서 오늘도 감사하며 나아 갑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2008-10-21. http://cafe.naver.com/pray153/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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