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고별설교

조회 수 1174 추천 수 33 2009.01.19 23:23:42
바울사도는 자기의 남은 시간이 곧 임박한것을 예감하였습니다. 서둘러서 예루살렘으로 가려 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들로 인하여 지체가 되자 그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내가 생각할 때 끝인것 같고 지금이 아니면 아닌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떠나면 큰일이 날 것같은 염려로 인하여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지혜자들은 그러므로 때를 잘 분별하는 사람들 입니다.

물론 다 아는이야기지만,
남을 때와 떠날 때를 확실하게 알고서 행하여야 합니다. 전도서에 보면 "때"가 있다는 것을 잘 교훈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전3:1-6)

이렇게 분명한 때가 있는데 그 때를 알지 못하고 머뭇 거리다 큰 낭패를 당하는 일이 허다하게 많습니다. 사실을 고백 하자면 개인적으로 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얼마나 부끄럽고 미련하고 무지했는지 아찔할 뿐입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을가 하면서 가끔 아내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는 진짜 대책 없이 정신없이 살았다는걸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면에서 때를 잘 살피면서 지혜롭게 사역한 우리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종종 실수하는것은 어떤 공동체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을때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도와주는 자리에 있다보면 본의 아니게도 공동체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그 힘을 사사로운 개인적인 욕심이나 성취를 위하여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그런 자리에 있는 지도자로서의 기준을 제시하였고 그렇게 실천했다는 점에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진정한 리더쉽과 섬김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최고의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섬겼는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바울이나 초대교회 사람들의 삶이 우연히 그리된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바울이 빌립보에 보낸 서신서에서 아주 확실하게 그리스도인들의 가치와 자세에 대하여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개역개정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빌2:6-8)쉬운성경.

바로 이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그 동안, 나는 유대인들이 지어 낸 모함으로 몹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겸손히,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공중 앞에서나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 모두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과 우리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사무엘 선지자의 입에서 동일한 고백이 나온것을 상기시킵니다. 사무엘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기름부으신 왕 앞에 서 있으니, 내가 무슨 일이든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내가 누구의 소나 나귀를 훔친 적이 있소? 내가 누구를 해치거나 속인 일이 있소? 내가 몰래 돈을 받고 잘못한 일을 눈감아 준 적이 있소? 내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있다면 다 갚아 주겠소.'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속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해치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서도 공정하지 않게 무엇을 가져간 일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이 말한 것의 증인이시오. 또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왕도 증인이오. 여호와와 왕이 내가 아무런 잘못도 행하지 않았다고 여러분이 말한 것의 증인이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여호와와 왕이 우리의 증인이십니다.'(삼상12:3-5)

소망하기는,
저도 만약에 작별할 순간이 올 때 사무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모두에게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비록 광야에 머리둘 곳 조차 없는 형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과거를 회고하면서 당당하게 인사하며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느날 한 순간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작은 일상 속에서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와 성도들과의 교제가운데 매일 매 순간 순간 마다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합니다. 혹은 직장에서 혹은 어떤 공동체 안에서 또는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로서 스승으로서 제자로서의 삶의 모습이 바울의 고백처럼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나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더 그렇겠지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신중해야 할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대형 교회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비난의 대상으로 보여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렇다면 작은교회는 상관 없을까요?
따지고 보면 오십보 백보의 차이일수 있습니다. 작은 교회라고 투명하고 건전하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을까요? 문제는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가 아니라 우리의 욕심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착각 말입니다. 내가 아니면 교회가 흔들린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유지하는 전통이나 제도역시 똑같습니다. 저것을 만약 포기하면 큰일 날 것처럼 생 합니다. 문제를 자꾸만 쉬쉬 하면서 덮어 버리는게 은혜라고 생각하는 현상말입니다.

은혜지상주의나 믿음지상주의나 기도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살펴서 아니라면 포기하고 개혁할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사역의 절정에서 오늘 장로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자기의 고생과 수고와 당연한 댓가를 요구했읍니까? 그는 오히려 성령의 강권 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가 가는 그 길에는 무슨일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 나는 성령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께서 내게 경고해 주셨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줄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이제 나의 설교를 들으신 여러분 중에는 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행20:22-25)

감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피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수고했기 때문에 이제 조금 쉬어간다고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미리 앞날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억지로 가지 않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뜻을 이번만은 불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욕심일까요? 바울의 개인적인 업적을 위하여 무리하게 감행한 것일까요?

바울이 만일 개인적인 업적이나 인간적인 박수를 받고자 했다면 그에게 부여된 탁월한 은사를 계속해서 발휘하면 되는것입니다. 그동안 세운 교회를 순방하면서 살피면서 순례하면 그만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요즘식으로 하면 탁월한 부흥 강사 아닙니까? 아마도 일년 스케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가 세운 교회가 당시 얼마나 방대한 지역일까요? 아마도 서로 지원비 명목으로 연보해서 바울을 도왔을 것입니다. 그것도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길을 포기 했습니다. 그가 눈물로 기도하며 염려하며 세운 에베소 교회를 장로들에게 맡기면서 죽음의 길로 간것입니다. 모두가 눈물로 만류하였습니다. 가면 다시 살아서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잡았습니다. 그냥 여기서 말씀을 가르치면서 우리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안정적인 목회를 내려 놓았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비웠습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비우고 내려 놓고 떠났습니다. 한곳에 정착하여 머문다는 것은 당장은 좋겠지만 결국은 부패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의 영성이 시들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빈 들이며 광야입니다.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성은 오직 주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이 계속 전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한채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말씀을 따라서 가는 길입니다. 아직 가본적이 없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걸으며 믿음으로가는 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한 밤중에 빛난 별을 보고 수천리 길을 떠나온 것처럼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머무를 수 없습니다.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바울은 결심합니다만,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 하는 것은 자기의 안위나 생명이 아닙니다. 그의 고백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행20:24) 그가 염려하는것은 단 한가지 입니다.

내가 떠난 뒤에 어떤 사람들이 사나운 이리처럼 교회에 들어와서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나는 압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왜곡되게 말하고, 제자들을 유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것입니다.(행20:29-30)

바울이 염려하는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입니다.
거짓교사들과 거짓 복음이 성도들의 영혼을 혼란하게 하며 미혹하게 하며 파괴할 수 있는 불법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본다면 바울의 사역이 강해질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거짓 교훈들과 거짓 복음과 투쟁하는일 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이 그에게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렇다해서 바울이 무조건 누군가를 대적하고 그를 위험에 빠트리는 무분별한 비판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사도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연약한 성도들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자유와 권리까지도 포기 했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 아무것도 아니지만 혹시라도 연약한 자가 자기의 자유를 보고 실족할까 두려워하여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영적인 지도자들 가운데 이러한 바울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기를 소원합니다. 얼마나 주님이 좋아하실가요. 바울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에베소의 양떼들을 지켜야 할 장로들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거듭 부탁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줄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이제 나의 설교를 들으신 여러분 중에는 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설령 누군가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들과 모든 맡겨진 양 떼를 잘 살피고 그들을 잘 돌보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행20:25-28)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내가 삼 년 동안을 밤낮으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쉬지 않고 교훈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능히 세울 수 있고 모든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 누구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아시듯이 나는 언제나 직접 일을 해서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했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열심히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행20:31-35)

바울의 고별사를 보면서 이 시대에도 여러분과 제가 그 뒤를 이어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어떤 신분에 있든지 그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낮은곳에서 일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의 변함없는 신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2:9)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그 공동체에서 진정한 섬김이 입니다. 자녀로서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제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거룩한 존제입니다. 낮아지신 주님처럼 섬기는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할 때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섬김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면 무엇이 구속할 수 있으며 어떤 부귀와 명예가 들이밀고 온다할 지라도 바울의 길을 가기를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도 충분히 주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시고 책임지십니다. 걱정하지 말고 주님이 가라시면 그길을 향하여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서 가는 인생이 됩시다. 떠나라는 것을 문자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떠난다는것,비운다는것,놓는다는 것은 마 으로 부터입니다. 그러나 만약 육신의 죄악을 부추기는 장소라면 몸도 당연히 떠나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순간은 산으로 들로 바다로 무인도로 떠날수가 없지요.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마음두지 않는것,
물에서 살되 가라앉지 않고 수영을 해서 물길을 거슬러서 목적지를 향하여 해엄을 쳐야합니다. 죽은 시체와 물건들처럼 흙탕물에 떠밀려서 가는 인생은 죽은삶입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세상의 물결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역류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 바울처럼 말입니다.

오늘 바울의 고별 설교를 묵상하면서 다시한번 각오를 다짐합니다.


주님. 약하고 둔한 마음에 빛을 비춰 주소서. 어두운 마음에 주님의 밝은 빛으로 담아주소서. 좁은 길을 가는 발길에 힘을 주옵소서. 내 눈을 열어 보게하옵소서. 육신의 소욕을 대항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가득히 충만하게 부어주옵소서. 오직 주의 영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주만이 나의 생명이며 빛이시며 피할 바위시며 산 성이시며 구원의 뿔이시며 믿음의 반석입니다. 아멘.

2009/01/20.ⓒ주사랑.

조재춘

2009.01.20 02:02:52
*.29.165.137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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