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제서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하나님께 권한을 받지 않았던들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들의 죄가 더 크다.'

12 빌라도는 가능한 한 예수를 놓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이 큰소리로 말하였다. `만일 총독께서

이 자를 놓아 주신다면 각하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13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다시 예수를 그들 앞에 데리고 나와 돌을 깔아놓은 광장 위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14 때는 바로 유월절 전날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하였다. `자. 여기 당신들의 왕이 있소.'
15 그들이 소리쳤다.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뭐라고? 당신들의 왕을 나더러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빌라도가 되묻자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 하고 대제사장들이 소리질렀다.

16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현대어성경- 요한복음 19장)





사도신경에 대하여



많은 이슈와 논란이 되는 주제들이 참 많습니다.

거기에는 사도신경의 오류와(성경과 다른 혹은 없는것) 교회사적으로 과거 로마 카토릭에 의한 전승이라는 점에서

이미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고 하는 개신교에서 무조건 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과 획일적으로 강요당하는 교회의 강제성에 대하여 이의를 재기하는 주장들도 만만찮은게 사실이고 교단과 교리의 다른 노선에 따라서는 장로교단과 선을 긋고 자기들만의 자유함과 신학적인 입장을 밝히고 사도신경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한때는 이단을 가려내는 기준의 하나로서 사도신경을 이용했었고 사실은 지금도 은연중에 또는 암묵적으로 정통교단에 속한 교회와 단체는 그것이 기준이라고 교회적으로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것이 현실입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한때는 누군가에게 그것을 힘을 주어서 강조하기도 했었습니다.



개인적인 저의 견해를 밝힌다면 이렇습니다.

제 생각일 뿐이지 다른이들에게 강요하거나 동의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토착화된 한국교회의 실정과 문화적인 면에서 사도신경을 가지고 옳고 그르냐로 간다면 그것은 논란만 이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단의 책임있는 지도자들이 각성하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합의를 내어서 성도들에게 가르친다면 모를까 그러한 일은 상상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도신경뿐만이 아니라 십일조,주일성수등 연결되어있는 성경과 동떨어진 무수한 제도와 규범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부에서만 소리를 낼 뿐 극단적으로 모든것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시작해야 가능 할까 말까 라는 비관적인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노아 홍수 이후의 새로운 인류의 행보를 보더라도 이미 인간에 의한 삶은 결국은 바벨탑의 연장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종교 개혁은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개혁에 힘을 내시는 분들께 찬물을 끼얹어서 죄송하지만 그것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성경에서의 깨우침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실패할거 뭐하러 힘을 쓸까 하면서 그만두자는 거냐고 항의 하신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혁에 대한 의지를 포기할 수 없다고 답하겠습니다.

좀 비약적 이지만 어차피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의 뜻으로 이루실 거라면 전도는 해서 무엇하는가 라는 질문과도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도를 계속 해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룩하신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선전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할때도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을 선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임하심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 순종하면서 나아가는 개혁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하시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적이며 개인적인것을 포함)은 사람의 어떠함이 아니라 사람의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성경 전체의 일관된 흐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실패와 좌절은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의 여정속에서도 여지없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적인 힘에다가 개혁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약속하셨고 그 시기가 너무 오래 걸리자 결국 시도한 것이 인간적인 지혜로서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이스마엘)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들어 납니다.



이삭도 결국은 야곱보다는 애서를 장자로 적임자라 생각한 것이었고 야곱도 자기의 지혜와 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보려다가 엄청난 고난속에서 늙어서 모든 소망이 다 끊어지고 난 후에야 죽은줄로만 알고 포기했었던 요셉을 만나서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그는 말년에 가서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고 열두 아들들에게 알맞는 복을 빌어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통하여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도록 사명을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기댈것이없었고 바랄것이 없었고 나올 것이 없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스스로 함께 하시면서 외형적으로는  어떠한 능력이나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내적으로 주님의 약속이 있었을 뿐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마치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언약과 같습니다. 다만 한가지를 요구하셨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그렇게 붙어있으라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가장 연약한 제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는 확장되었고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넘어서 왔습니다. 그 과정에는 인간적인 실패와 저항과 오류와 미혹이 있어서 온통 흑암한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는 어둠 가운데서도 빛을 비춰주셨고 빛의 사람들을 숨겨 두셨고 시대 시대마다 고비 고비마다 빛을 들어내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애굽왕 바로를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고 가장 연약한 히브리 노예들을 사용하셔서 온 세계에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김없이 바벨탑을 쌓으려고 계속해서 자기의 길로 달려간 것입니다. 좋은 씨앗을 심었는데도 밤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심어놓은 것처럼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함께 자란것입니다. 이미 이스마엘이 약속의 씨인 이삭을 희롱할 때처럼 온 세상은 지금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이념과 사상과 철학으로 포장만 바뀌었고 디자인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모양으로 거룩한 외식을 집단적으로 전하면서 신실한 어린양의 피로 씻기움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는것입니다.




유대교로서의 전통과 관습에 의하여 공동체를 이룩한 것에서 벗어나면 출교를 당하는 것처럼 오늘날 이시대의 기독교라는 거대한 공동체 역시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 놓은 교리와 사상과 신 율법주의적인 교회전통의 틀로서 모두를 가둬두고 조종하려는 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해방된 복음안에서의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등지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죽은 전통과 형식에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입니다. 산 자는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갈 수 밖에 없으며 죽은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죽은 전통과 형식에서 적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분명하게 유대교와 달랐습니다.



유대사회를 움직인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를 등에 없고 더구나 로마정치와 타협함으로서 많은 기득권을 얻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보장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상당한 눈에 가시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권주의가 바로 그 시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것을 못보는게 불행입니다. 그러나 보는 자들은 더 이상 거기에 머물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이 주는 힘이며 생명을 향한 갈망입니다. 죽은자들로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미 고정화된 교인들에게 사도신경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한들 수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바르게 가르쳐야 하고 본을 보여야할 포도원 농부(지도자)들이 그렇게 살기를 거부한것이 잘못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주의 영의 인도함에 대하여 순종하는 자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 그들을 용납하시고 때가 되면 성령의 보여주심과 깨닫게 하심으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그러한 지체들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지체들이라면 사도신경에 대한 입장에 대하여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친절하게 혹은 여유를 두고서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되는 수고는 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가르칠때도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리기 때문에 상대하지 말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을 수가 없으며 결국은 외톨이가 되든가 개인 공동체에 머물러서 모두와 단절하며 살아야 할 수 밖에 없지요.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되 그것으로 정죄하는 기준이 되는것을 조심해야 할것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부모는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란 입으로 가르치는것 보다는 몸으로 살아가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이 선행되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신앙과 믿음이 비틀어지고 복음이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정말 가슴아프지만 교회를 구성하는 지금의 현대교회가 안고있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보이지 않지만 말씀에 순종하며 삶으로 살아가는 귀한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것을 조심합니다. 극히 귀하고 비싼 진주나 보물이 아무데나 널려있는 것이 아니듯이 산삼이 깊은 산 인적이 없는 곳에 숨어 있듯이 눈에 자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바라기는 아무데나 지천으로 이러한 보물과 같은 사람들이 널려 있기를 소원합니다. 바라기는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살고자 열망하는 성도들이 곳곳에 널려있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미 기존 제도권에서 그렇게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울 것입니다. 소신을 갖고 목회를 하려해도 단단하게 무장되어 버린 성벽(제도적인 장치들,개교회중심,교단중심,노회와 총회중심,교리중심,성경보다는 걸출한 신학자의 사상중심,인맥중심,학력중심,성공중심등등...)에 영향을 받는 현실속에서는 그렇게 살수 있는 환경이나 토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모두가 그렇게 시대와 풍조와 사상에 영합하거나 거절하거나 양자 택일을 해야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를 선택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할까요? 사람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중심이냐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보면 결국은 반석(예수 그리스도)위에 기초해서 집을 세우느냐 아니면 모래(인본주의적인 모든것, 사람의 전통과 제도와 규례들)위에 기초해서 집을 세우느냐의 선택입니다. 중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결국 한쪽을 택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의 문제 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주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주인되는 것도 사실은 내가 아니라 사단입니다. 재물을 섬긴다는것도 깊이 들어가 보면 사단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돈에 대하여 이미 결정했습니다.

돈은 일만악의 뿌리며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고 세상은 돈에의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돈으로 사는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지 돈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돈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까?



사람의 중심이 돈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믿는자에게는 돈이 중심이 아니라 말씀(언약)이 중심이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다 하면서 돈이 중심이라면 그는 결국 믿음으로 주의 말씀으로 사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못살겠으니 돈이라도 많아야 겠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돈을 섬기겠다는 것이며

세상이 원하는 삶도 돈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돈으로 안되는게 있습니까?

돈때문에 생기는 사건들이 선함보다는 불의함이 더 많지요.



현대교회도 겉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믿음을 말하지만 섬김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돈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현대교회가 원하는게 무엇인가를 보시면 쉽게 보입니다. 결국은 현대교회가 섬기는 주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주인이 다른데 거기에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해서 변하도록 하자구요? 사람이 바뀌면 제도가 바뀌면 잘될것이다고요? 주인이 그대로인데요?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무리 개선을 하고 판을 새로 깔고 개혁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해야 하겠습니까?

문제는 주인이 누구냐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주인이 누구냐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주인이 자기의 정체를 순순히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자기의 모든것을 말씀하시고 본을 보여 주시고 목숨까지 내어 주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통하여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우리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도들의 증언을 기록한 말씀을 듣고 보고 읽고 믿어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돈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으로 비교를 할 수 있습니까?



이제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아셨다면 우리를 이끌고 가는 힘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성경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외에는 없습니다. 성령안에서 교훈하시고 밝히 깨닫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더 우리를 다스리는 어떤것도 세상에서는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우리안에 계시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성도를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모든것을 밝히 알게 하시고 보게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과 눈과 귀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봅니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보기에 좋고 아름답고 지혜로울만큼 탐스러워 보여도 예수가 아니면 거짓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존경하는 지도자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사람에게 향하는 행동이 보이거들랑 주인이 다르구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사도신경이 성경과 다른 역사와 배경이 있다는것은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보면 얼마든지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터넷의 정보를 백퍼센트 믿을 수 있는가 하는것은 아니지만 우리안에 계신 성령께서 능히 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심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서만 개인적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도신경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초점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고발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에 대한 근거로 사도가운데 베드로의 말을 인용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 주었고, 빌라도가 그를 놓아 주기로 작정했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행3: 13)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증언은 빌라도의 책임에 대하여 변호하는것이 목적이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역설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곧 죄 없으시며 조상의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한 그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하게 전하는게 목적입니다. 빌라도 총독마져도 죄 없다고 놓아주려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의로우신 예수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가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살리셨으니 그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실질적으로 빌라도에게 권한이 있었고 그는 죄 없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했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양심을 자기의 욕망과 안전을 위하여 포기한것 입니다. 그가 만일 끝까지 양심적으로 판결하였다면 아무리 유대인들이 협박을 한다해도 그렇게 뒤로 물러갈 사람이 아닙니다. 수 많은 권모술수와 모략과 사선을 넘나들었던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로마황제의 신임을 얻은 총독입니다. 산전수전을 경험한 빌라도가 누구의 협박따위에 굴복하겠습니까? 그것은 빌라도 역시 불의한 재판관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며 죄 없으신 예수님 때문에 목숨걸고 바른 판결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판결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도 분명히 예수님을 고난에 처하도록 폭력을 가한자가 맞습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을 결코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봅니다.



'네가 하나님께 권한을 받지 않았던들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들의 죄가 더 크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자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입니다. 사실은 모두입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백성들도 전부가 동의를 한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자들입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 누구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죄가 어린양의 피를 원한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무죄한 양의 피를 요구하였고 우리의 죄를 인하여 죄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밖히신 것입니다. 빌라도의 죄나 우리들의 죄나 동일한 죄인입니다. 빌라도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운데 죄의 거짓이 남아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교만함이 그렇게 우리를 속이고 복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성경을 곡해하게 만들고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헛되게 하도록 미혹시킵니다. 사실은 우리에게 사도신경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거나 말거나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고백해야할 신앙고백은 성령께서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니,



우리가 영원토록 고백해야할 내용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순간마다 고백해야할 고백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 나의 생명 나의 반석이신 주를 찬양합니다.



1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마음 속으로부터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여라.
2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3    주님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
4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해 주시고, 사랑과 자비로 복을 베풀어 주신다.


5    평생을 좋은 것으로 흡족히 채워 주시고, 네 젊음을 독수리처럼 늘 새롭게 해주신다.
6    주님은 억압받는 모든 사람에게 의롭고 공정하게 대하신다.
7    모세에게 주의 길을 알려 주셨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의 행적을 알려 주셨다.
8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9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
10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12    동이 서에서부터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시며,
13    부모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듯이, 주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
14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으셨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진토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15    인생에게는, 그 날이 풀과도 같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16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곧 시들어,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다.
17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주의 사랑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고,

주의 의로우심은 자손 만 대에 이를 것이니
18    곧 언약을 지키고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사람에게 그 사랑이 이른다.
19    주님은 그 보좌를 하늘에 두시고서,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신다.
20    천사들아, 주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능력이 있는 용사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21    주의 군대들아, 그의 뜻을 실행하는 종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2    주님께 지음 받은 사람들아,

주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곳에서 주님을 찬송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시편103편)



이렇게 우리가 주의 영으로 고백할 때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모든 어둠에서 모든 사로잡힌 곳에서 건져주시며

간교한 꽤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악한자가 쏜 화살을 막아주시며 강한 팔로 잡아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비밀한 곳에 숨겨주십니다. 은밀한 곳에 우리를 피하도록 하시며 악한자의 눈을 멀게 하시고

노략하는 개들과 이리들의 소굴에서 구하여 내십니다. 눈을 열어서 보게하시며 혹시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것입니다. 이렇게 굳건한 믿음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 평강에 평강으로 채워주시고 원수의 눈 앞에서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직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더 이상 구속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미 우리를 그의 피로 모든 불의에서,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그의 사랑과 십자가의 구속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고 소망해야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말씀입니다. 그의 이름입니다. 그의 행하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룩하신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그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의문과 욕망과 자랑과 옛 사람과 옛 죄의 멍에가 못 박혀 버렸고 끝나 버렸습니다.



더이상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의 권세는 끝장나버렸습니다. 모든 규례와 제사와 법들은 다 십자가에서 끝나버렸습니다.

우리를 영원토록 구속할 멍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입니다. 사랑의 멍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나에게로 오라 하십니다.





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를 오라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의 멍에를 메라 하십니다. 우리만 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메자고 하십니다.

평안의 메는 줄로 묶고 주님이 메신 멍에를 함께 메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모든 짐을 내려주시고 가벼운 짐을 얹어 주셨습니다. 그 짐은 오직 주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안에 있을 때 주님께서 행하십니다. 주의 영을 보내셔서 한 마음으로 주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강건하게 하십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손을 내미시며 친구라고 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여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과 함께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과 뜻은 지금 무엇에 근거하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입니까?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입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영원한 자유함과 쉼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 두서없이 마음 가는데로 쓰다보니 왔다 갔다합니다. 이왕 시작한거 마무리를 억지로 하다보니 저도 헷갈립니다.

걍 편안하게 지나가소서^^*



2009/03/13.ⓒ사랑그리고편지.



조재춘

2009.03.19 02:23:33
*.29.165.127

왔다 갔다 함에도 불구하고 핵심은 바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멘!!!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귀한 나눔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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