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글을 읽은 적이있다. 새장안에서 나이 많은 새가 다른 새들에게 창공을 날으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런데 그 가르치는 새는 새장밖을 한번도 날아본 적이 없는 새이다. 그저 주워들은 이야기로 다른 새들에게 열심히 사실인 듯 가르치고 있다. 그 가르침으로 새들은 푸른 창공을 한번이라도 실감나게 상상하여 볼 수 있을까? 드넓디 넓은 공간을 맘껏 비행하는 그 기분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을까?
지도자의 가르침은 그 지도자의 상태의 문제라 여겨진다. 푸른 창공을 날아본 새만이 참다운 날개짓을 가르칠 수 있듯 영적지도자 또한 거듭남을 체험한 자만이 거듭남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 있는자만이 생명을 전할 수 있듯이....
오래전 예수님의 초상화로 엿보게된 그 분의 어떠하심은 고즈녁한 들판에 어린양 한마리 품에 품고 계시는 분이셨다. 아니면 푸른 초원에 지팡이 잡으시곤 양 떼들이 뒤뚱거리며 따라가고 주님은 앞장서서 걸어가시는 모습 속에 예수님은 화도 내지 않으시고 부드러운 미소가 늘 떠나지 않으신 정말 푸근하고 부드러우신 성품일 것만 같았다. 때문인지 나의 지도자에 대한 소망도 늘 조용한 인품에 너그럽고 자상스럽고 사랑이 넘쳐 넘쳐 흘러내리다 못해 사랑 덩어리이신 분만을 찾고 찾았었다. 그런 모습이면 지도자로서의 자질로는 100%로 여겼었다.
우리의 바램은 예수님의 보혈로서 죄 사함의 은총 보다는 이 곳에서 좀 더 나은 삶과 더불어 고상한 모습의 신앙인으로 표정도 우아하고 인품, 성품 나무랄 곳 없는 그런 모습으로 자라나면 되는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도 교회에서 추구하는 것이 성경과는 너무도 다른 것을 추구하는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지도자의 가르침으로 멋진 삶을 연출할 수 있는 그런 추구함이 내게 잔뜩 있었다.
성전의 장사꾼들을 향해 노를 발하시는 예수님,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 대놓고 말을 하실 수 있는 위엄, 헤롯에게 여우라고 분명하게 표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저 들판에 고요히 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덮어버리려는 우를 참 자주 범하는 것 같다.
창공을 날아본 새는 다른새들에게 날개짓을 가르칠 때 그게 아니야, 이렇게 날아야지. 날개를 더 올려, 더 올려... 얼마든지 소리치며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날개짓은 쉽지 않음을 알기에, 자신이 날아본 창공이기에 쉽진 않지만 분명 날아 오를 수 있기에, 어서 어서 날아 올라 저 높은 창공을 유유히 날아 보라고, 그 날음은 정말 신비라고... 애타게 작은새들에게 가르치는 새의 맘을 가끔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의 은혜는 우리를 저 넓은 창공처럼 아름답고 자유로운 공간으로 초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맘껏 날개를 펴고 고요히 유유하게 저 넓은 창공을 맘껏 날아다닐 수 있는 기가막힌 선물을 주셨다. 몸은 비록 누추한 이곳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은 이미 주님의 품속에서 그 자유로음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이 놀라운 일들을 매일 매순간 맘졸이시며 기다리시는 주님의 맘을 한번 헤아려 본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맘을 닮아 어서 어서 저 높은 창공을 날으라고 힘을 다해 가르치는,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려 늘 애태우는 지도자님들께도 머리숙여 감사를 드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