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1:9-13)

창세기 강해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째 날이니라.”(창1:9-13)



전 세계에 현존하는 언어가 약 6,900개가 된다고 한다. 아무리 문화와 문명이 미개한 종족이라도 언어는 있다는 뜻이다. 이는 다른 동물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다. 원숭이는 낫을 놓고 기억 자를 가르쳐도 그 형상은 기억해도 말과 문자로는 절대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하여 그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물도 기초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수천 마일을 이동하는 철새 떼에 지도자가 있다. 잘 알다시피 개미와 벌은 위계질서를 갖춘 공동체 생활을 한다. 그러나 동물의 말에는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는 음절(音節)이 없어 단어로 발전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동물의 말은 옛날 군대에서 깃발이 소식을 전하듯이 신호와 상징에 불과하다. 배가 고프다, 이리 오라는 정도의 의미이지 어떤 개념을 담은 구체적 추상적 단어와 문장으로 진전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에 부여한 중요 의미 중에 다섯 번째를 알아볼 차례다. 하나님은 어떤 대상을 창조한 후에 이름을 붙이셨다. 뭍을 땅이라고, 물을 바다로 칭하셨다.(10절) 동일한 표현이 그 앞의 5절과 8절에도 등장한다. 지난주와 본문의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하나님이 계획한 그대로 창조한 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자연스런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이름을 붙였을까?


문제는 하나님이 당신께서 각 피조물에게 이름을 정말로 그렇게 붙이고 또 육성으로 불렀을지 여부다. 이에 대해 구태여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모세를 비롯해 창세기를 저작 편집하고 읽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고와 인식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만 이해, 해석, 수용, 반응했다. 비록 사고와 행동의 주체는 자신들, 즉 인간들일지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과 마음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마련해주셨다는 것이다.


최초 인간 아담이 최초로 한 일도 에덴동산의 각 생물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창2:19) 그 이전에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동산에 두시고 다스리게 했다(15절). 그럴 수 있는 여건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다. 또 당신께서 각종 들짐승과 새를 지으신 후에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동물)을 이끌어 오신 분도 하나님이었다(19절).


아담이 각 생물에 이름을 붙인 것은 상징이나 신호가 아니라 말이었다. 인간은 이미 자음과 모음으로 구분되는 음절로 나뉘는 언어 능력을 하나님께 받아서 보유했기 때문이다. 각 단어에 의미를 담아서 상호 교통해야만 돕는 배필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아담이 이브와 함께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도 언어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이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려야 할 소명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첫째가는 수단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교통하며 당신의 뜻과 계시를 지각하여 순종할 수 있는 통로다. 나아가 인간이 당신과 관계를 이어가며 교통하는 체험을 인간 언어로 기록, 보존, 승계할 수 있게 하려는 뜻이다.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택하신 중요 이유가 바로 그 일을 담당케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과 그 사역을 유대인으로 알게 하고 모든 열방에게 전파하여 다른 민족들도 당신의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선민으로선 가장 먼저 중요하게 하나님에 대해 깨달은 것이 바로 창세기 1장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절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대로 종류별로 완벽하게 창조했다. 모든 종들에게 당신의 고유의 기능과 역할을 맡겼다. 언어의 능력은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주었다. 인간이 각 피조물의 특성과 모양을 파악해서 이름을 붙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인간이 이름을 붙였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칭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이 그렇게 칭하셨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이 그분의 전지전능하고 거룩한 손에 붙들려서 그분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는 첫째 기준


이는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첫째 기준이다. 불신자는 만물을 비롯해 자기의 주권자는 물론 창조자가 따로 있다는 인식이 전무하다. 자기는 오직 자신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를 간섭 조종할 수 없고 그런 존재가 있다면 죽을 만큼 싫다.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다고 믿기에 그분 뜻대로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이 세대에 이르러선 자기를 이 땅에 존재케 한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은인인 육신의 부모마저 거역하게 되었다. 우스개로 북한의 김정은이 남한을 공격하고 싶어도 남한의 중학교 2학년들이 겁이 나서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중학생만 되어도 더 이상 부모의 도움, 지도, 간섭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부모가 거꾸로 절절매는 시대가 되었다.


신자는 자기가 이 땅에 아무 의미 목적 계획 없이 무작위로 존재케 되었다고 결코 믿지 않는다. 자신이 이 시간, 이 장소, 이 모습으로 불쑥 내팽겨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의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하고 거룩한 계획을 알아서 그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자다. 내 이름을 부모가 붙여주었어도, 그 훌륭하고 선하신 부모를 주신이가 하나님이다. 나의 이름도 하나님이 알고 계시며 하늘의 그분의 생명책에 이미 등재되어 있다.


한 개인이 현실의 이 땅에서도 출생하면 동회에 출생, 이주, 사망 신고를 한다. 그 나라의 국민으로써 그 국가의 통치에 복종하겠다는 의미다. 회사도 하나의 법적인간 법인으로써 그 상호를 법원에 등록하면 다른 회사가 그 이름을 사용 못한다. 회사의 운영을 법에 정한 규정대로 행할 것이며 특별히 사업이 망해서 청산하는 절차도 법원에 지시에 따르겠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을 정확히 따지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알고 있고 그 이름을 당신의 나라에 주민등록 해놓았음을 신자가 아는 것이다. 처음 믿음을 가져서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신자 인생의 통치는 물론 마지막 청산도 오직 하나님의 관활 하에 있다. 내가 내 지정의로 판단 결정 시행하는 것은 단순히 내 존재의 일시사용권을 그분께 부여 받은 것뿐이다.


나의 궁극적 소유권은 물론 결정권은 하나님 그분께만 있다. 나는 하나님이 허락하고 계시해준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뿐이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완전하신 계획과 뜻 안에서만 내 자유의지가 작동된다. 그럼에도 나의 나 됨에 그 의지는 충분하고도 넘치며 나의 의지와 그분의 의지가 단 한 치도 모순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님 주인 됨의 두 가지 모습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나 자신의 주인 됨을 다 믿는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주인으로 모시는 모습이 두 종류로 나뉘고 유감스럽게도 그 둘 중의 하나는 부족하거나 옳지 않은 믿음이다. 우선 내가 하나님의 것이 이미 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그에 순응하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려 노력하는 믿음이다. 이 둘 중에 전자가 바른 믿음이다. 후자에 그리 하자가 없어 보이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더러 하나님과 재물 중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라고 명령 형식으로 말씀하지 않았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했다.(마6:24) 인간의 본성을 설명했다. 사람에게 동시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다고 했으므로 사람 자체를 두 부류로 나눈 셈이다. 신자라도 당장 저부터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재물의 유혹에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신자란 하나님이 이미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음을 아는 자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으려 노력하는 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헌신하여 거듭나면 성령이 임재 하여 영원토록 내주한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기보다 사실은 신자를 하나님이 당신의 소유로 삼아 주신 것이다.


예수 믿은 후에 신자가 죄의 본성에 넘어간다고 해서 간음, 도적, 폭행 등을 일삼지는 않는다. 그보다 가끔 내가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여 자기 욕심과 뜻을 고집하는 것이다.


믿음이 성숙하고 강해진다는 뜻도 신령한 은사나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나, 매일 성경보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 이전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가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재정립하여서 그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을 지으려 할 때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금지 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전쟁을 많이 치러 손에 피를 많이 묻혔기에 아들 솔로몬더러 짓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배경에 있는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내가 항상 너희와 동행했다. 너희가 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 집을 이루고 당신께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 건축하여 그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삼하7:5-17)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크게 다른 점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크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타종교처럼 구원을 위해 인간의 노력, 희생, 수고, 공적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그 체질이 진토 같으며 영혼이 타락해서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당할 수도 없다. 인간이 신의 경지에는 절대로 다다를 수 없다.


창조를 부인하고 진화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반드시 과학적 타당성 때문이 아니다. 철학적 신학적 이유가 더 커다. 하나님이 필요 없고 인간끼리 유토피아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와 우주의 주인이고 각 자 인생의 주인은 각 개인이라는 사상, 아니 신앙이다.


다윈은 가뜩이나 제 멋대로 살고 싶은 인간에게 그럴 수 있는 핑계를 완벽하게 제공했다. 성경적으로 따져 흑암의 세력과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농간에 모두 놀아난 것이다.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세 번 시험했던 의도와 동일한 것인데, 주님은 그 시험을 물리쳐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었는데 반해 다윈은 그 시험을 그대로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길이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신음하는 인간이 너무 불쌍하고 비참해서 하나님 당신께서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선 구원을 받으려 인간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고 그렇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모든 이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고 찾는 자가 없었다. 간혹 하나님을 형식적 종교적으로 찾아도 그분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이 없었다. 우리 각자의 구원 체험을 뒤돌아봐도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실 계획, 의도, 소망이 전무했지 않는가? 죄 중에 빠져 그분과 원수 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느 날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성령으로 당신의 십자가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시키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지 않는가? 당신의 열두 제자를 당신께서 택하셨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소유로 삼아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아주셨거나, 내가 그분을 주인으로 삼으려 노력하거나, 결국 주인이 되기만 하면 그만 아닌가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분과 원수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그분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었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반면에 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셨으면 남들은 그러지 못했는데 내가 그랬으니 내 쪽에 영적인 우월성이 드러난다. 회개하고 헌신키로 결단한 것도 내 공로가 된다. 나아가 내 쪽의 그런 잘난 것에 대해 필연적으로 보상을 요구하거나 바라게 된다. 이는 엄청난 차이이며 정반대의 믿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부모가 자식을 낳은 것과 같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아니 자식에겐 세상에 나올 의사와 계획과 소망조차 없었다. 일단 출생하고 나니까 부모가 부모이고 나는 그 부모의 자녀인 것이다. 이 관계는 영원토록 세상 어느 것도 개입, 변질, 수정, 취소, 포기케 할 수 없다.


쉽게 말해 자식이 효도를 열심히 해야만 자식이 되고, 반대로 부모도 자식에게 많이 베풀어야만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불신 세상에서조차 천하의 패륜아로 지탄 받는다. 너무나 불행하게도 최근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그야말로 세상에 망조가 든 것이 분명하다.


자식을 향한 사랑이 완전하지도 않은 육신의 부모도 이럴진대, 천하 만물의 주인이자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 정성, 열심, 치성을 많이 바치면 그에 비례해서 그분께 복을 받으리라 믿거나 기대하거나 상상해선 천하의 패륜적 신자라는 말이다.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대하는 것 같으면 하나님으로서의 자격에마저 하자가 있다고 의심, 불만, 불신하는 것은 신자라고 할 수도 없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자 출발은 예수님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죄에서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음을 아는 것이다.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신자가 그분의 것이 되어 있는 그 관계를 건드려 해코지할 존재와 세력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지금 신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변화된 신분, 위치, 소속, 특권, 은혜, 축복을 아는 정도를 넘어서 실제 삶에서 제대로 실현하며 누릴 수 있는 실력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사탄은 하나님에게 절대 맞설 수 없다. 사탄을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님에겐 식은 죽 먹기다. 단지 더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당신께 회개하고 돌아와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하려고 일시적으로 그 활동을 묵인하실 뿐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말씀의 검으로 일순간에 멸망시킬 것이다.


사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 즉, 이미 그분의 소유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티끌만치도 방해할 수 없다. 대신에 어떻게 하든 신자더러 그 사실을 모르게 하거나 알고 있다면 수시로 잊게 만들려 든다.


그래서 사탄이 이 땅에서 하는 일은 세 가지뿐이다. 첫째는 불신자더러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만든다. 필요하다면, 아니 거의 대부분 현실의 형통과 출세를 보장해주어 부족함을 모르게 한다. 풍족해서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게 마드는 것이다. 둘째는 교회에 출석해 예수를 믿어보려는 교인더러 하나님이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진리를 왜곡시킨다. 자꾸 너희가 구원을 얻으러 하늘로 올라가라고 부추긴다. 셋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완전히 항복한 신자더러 하나님이 이미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게 만든다. 하나님을 나의 것으로 모시려고 노력하라고 다그친다.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신자가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는 결단과 헌신은 단 일회로 충분하고 완전하다. 예수를 영접할 때에 그분께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지 않는가? 그럼 이미 그분의 것이 되어 있고 그 구원의 취소는 물론 변질도 영원토록 없다. 주일 예배 때마다 그분을 주인으로 삼으려 노력하는 것은 자기 자아가 아직도 십자가 앞에서 철두철미 깨어진 체험이 없다는 반증이다.


바꿔 말해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객관적 교리로만 수용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거래하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한다. 헌금, 봉사, 선행, 기도, 전도, 등등 종교적으로 선한 것을 최대한 많이 올려드린다. 신자라면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했으므로 30배 60배의 뻥 튀기 식의 대박 은혜를 달라고 떼를 쓴다는 것이다.


육신의 부모 자식 간에도 거래는 않는다. 초등학교 그것도 저학년 때에 잠간 제대로 훈련시킬 목적으로만 한다. 그 때도 부모 쪽에는 합리적이고도 의로운 계획을 갖고 시행할 뿐이다. 만약 자식이 부모에게 평생을 두고 거래를 요구하고, 부모도 자식에게 평생 하자는 대로 다해주면 둘 다 망할 뿐이다. 인간 부모는 어쩔 수 없어 자식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지만 하나님에게 그런 법은 절대 없다. 신자가 망하는 줄 아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허락하시겠는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뜨겁게 오래 했어도 참 만족과 기쁨이 없는 까닭이다.


양날을 가진 검처럼 한국교회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가장 큰 단점이 되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과 교제는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한다. 그러나 교제만 너무 뜨겁게 하다 보니 하나님과 동행은 세계에서 최고로 약하다는 점이다. 작금 의식 있는 신자들과 신망 있는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보다 더 부패했다고 한탄한다. 한국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초대형교회가 많아지고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박수치고 눈물 흘리며 찬양하고 기도하는데도 대체 왜 그런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복을 받으려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려고만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까지 비천한 모습으로 내려오셨음을 잊었다.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칭해주신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뭍과 물을 나눠선 땅과 바다라고 칭했다. 인간에게 언어를 허락했다. 이것이 아주 간단한 사실처럼 보이지만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하여서 진정으로 감사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뜻은 하나님 쪽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뜨겁게 우리와의 교제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와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자는 뜻이 아니다. 신자도 구역모임, 신우회, 기도모임 등으로 신자와의 교제에 그쳐선 안 된다. 하나님과 교제는 그분의 뜻과 계획을 알기 위한 것이다. 신자는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과 동행케 하려고 신자와 교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소유로 삼아주시고 언어를 주셨다. 또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인간의 언어를 통해 당신을 열어서 보여주신다.


주지할 것은 지금 여러분더러 성인군자가 되라거나, 사도들처럼 복음을 위해서 순교하라는 뜻이 아니다. 너무 그렇게 헌신하려다 보면 자칫 하나님을 다시 내 주인으로 모시려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 노력한 것이 한국교회가 타락하는 한 원인이 되었듯이 말이다.


믿음이란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그것을 훼방할 세력 하나도 없음을 알고 그에 걸맞게 반응하는 것이다. 사탄은 신자로 그 진리를 잊게 하려고 급급하다. 사탄은 신자 앞에서 꼼짝 못하고 오히려 초조해할 뿐이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따라가면 그분이 승리케 해주신다. 단, 내가 그분의 소유가 되어 있듯이, 내게 일어나는 승리도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임을 알고 그분의 이름만 높이려 헌신하는 신자에게만 그렇다.


4/26/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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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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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신년예배-빌3:10-14)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 (빌3:10-14) 신년예배 설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

  • master
  • 2018-01-07
  • 조회 수 752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태복음강해 #148 - 마13:31-35) [1]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13:31-35) 마태복음강해(148)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 마14:28-33) [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주기도문#1-마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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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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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 마18:1-4) [2]

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http://youtu.be/Bce9n74I0g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나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

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강해 #195 - 마21:1-11) [1]

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강해 (195) http://youtu.be/RU-_SvdrAC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 마26:57-62) [2]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http://youtu.be/_azfFGIzNqs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부활절 - 요17:1-5)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2013년 부활주일 설교 http://youtu.be/-mgg9qhnS_s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마태복음강해 #202 - 마21:33-41) [1]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 마태복음강해 (202) http://youtu.be/ialeYLn6HV4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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