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창세기 강해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성경이 말하는 바는?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꼭 알아야만 할 사항들을 당신께서 계시해 놓은 책이다.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 특별히 죄에 빠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그 진리를 밝혀놓은 책이다. 성경을 읽는 독자더러 도덕적 종교적 감동을 받아 반성하여 고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저작목적이 아니다. 한 인간의 전부를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새 사람으로 재창조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뀐 후에는 당신께서 부어주시는 생명력으로 신자로 정말로 활기차게 살아가게 하는 일이 성경말씀을 통해 실제로 이뤄진다.

 

이렇게 한 인간이 뒤집어져 새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순전히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다. 그런데 그런 새 창조를 입는 신자의 입장에선 인생의 궁극적 원리를 깨우쳤다는 의미가 된다. 예컨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땅에서 정말로 무엇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하는가? 죽은 후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정말로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하는지에 대해서 확신을 얻게 되었다면 그 다음의 삶과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어떻게 이전과 똑같이 살 수 있겠는가?

 

성경은 모든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그런 인생의 진리를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주권적 절대적 네 가지 역사 안에 계시해 놓았다. 지난주까지 창세기 1-3장을 40번에 걸쳐 살펴보았다. 언뜻 아주 세밀하게 다룬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의 4대 주제 중에 창조와 타락 둘을 다루는데 40번으로는 사실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여 범죄 한 아담과 이브에게 적합한 형벌을 부과했다. 에덴동산에서 내어보내고 생명나무를 천국으로 옮김으로써 죄에 대한 뒷마무리를 완료했다. 이제 본문 4:1에서 어떤 이야기가 진전되는가? 인간 사회에 들어온 죄의 세력이 점점 확장되는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히 왜곡 파손되는 양상을 말라기까지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2장의 창조를 제외한 구약성경 39권 전부는 인간 타락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실낙원 이후의 최초의 사건

 

본문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일어난 첫 사건이다. 우선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물질적 현실적 여건이 열악해졌기에 고난과 염려가 생겼다고 단순히 이해해선 안 된다. 에덴 안에서도 아담은 열심히 노동을 했다.

 

하나님이 바로 곁에 임재 하셔서 인간과 직접적 상시적으로 교제 동행할 수 있었던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인간 쪽에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찾고 간구해야만 하고 하나님의 때와 방식에 한해서 하나님이 만나주어야만 한다. 이 또한 벌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녀들에게 불신자들은 갖지도 알지도 못하며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인생의 길잡이인 기도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화가 아니라 복이었다.

 

에덴 밖에 있다는 것은 또 예수님의 초림 때까지 사탄이 공중권세를 잡고서 인간을 유혹 시험하도록 하나님이 묵인해준 상태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처한 영적 환경이 고달프고 비참한 모습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쉬지 말고 범사에 기도해야 한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 있다는 뜻도 노동의 양이 많아지고 질이 떨어졌다는 측면이 아니다. 이젠 죄가 아무 절제 없이 힘을 발휘하게 되어 죄인들끼리 시기 경쟁 다툼이 빈발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고난은 죄로 인해 인간이 자초한 필연적인 결과다. 잘못은 자기들이 저질러놓고 불신자는 하나님 탓이라고 하고 신자는 하나님더러 뒤치다꺼리 해달라고 한다. 어쨌든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기 전의 하나님과 순전한 교제를 하며 누렸던 의미, 가치, 기쁨, 만족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도무지 부족하고도 불완전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동침은 어디서 이뤄졌을까?

 

성경의 모든 기록이 그러하듯이 본문도 자세히 보면 참 흥미롭다. 먼저 한 번 질문해보자. 아담이 이브와 동침하여 득남을 했는데 그 동침이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에 했을까 아님 에덴동산 안에서였을까?

 

창세기 3장에서 쫓겨난 이후에 4:1에서 동침했다는 기록이 나오니까 당연히 동산 밖에서였을까? 그럼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는 명령과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는 기록(창2:24,25)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성경은 신문기사처럼 육하원칙에 따르는 기록과는 다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창조기사가 두 번 나온다. 그러나 1장은 창조가 질서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했고, 2장은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밝힌 기사다. 1장의 창조 뒤에 2 장의 창조가 또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4:1의 기록이 3장 이후 사건이라고 단순히 이해해선 곤란하다. 아담과 이브는 2:24-25의 기록에 따라 에덴동산 안에서 이미 동침했다는 해석이 타당하다. 죄가 들어오기 전이라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했을 것이며 또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한 몸을 이룬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진술은 동침보다 득남했다는데 그 초점이 있다.

 

흥미롭다고 말씀드린 것이 동침 장소를 알아맞혔기 때문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통일교 같은 일부 이단들은 남녀의 성적교섭으로 죄가 출발되었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분명히 타락 전에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적 타락 같은 윤리적 죄가 죄의 본질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우위에 두자 선악과 금령을 위반한 것이 죄이며 그 후에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왔지 않는가?

 

또 그래서 아담과 이브의 첫째 후손 즉, 최초 인간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이 원죄 하에 태어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 것이다. 포악한 성질을 타고난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과 직접적 상시적 교통은 단절되었고 대신에 흑암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 살 수밖에 없는 절망적 운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아담이 감사하는가?

 

본문에서 두 번째로 흥미로운 요소는 이브가 잉태 출산했는데 아담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브에게 잉태의 고통을 더할 것이라는 벌을 내렸다.(창3:16) 그래서 이브는 지금 그 형벌로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있기에 하나님께 원망을 하고 있거나 침묵으로 그냥 감수하고 있다는 뜻인가? 둘 다 아니다.

 

남편 아담은 타락할 때에 아내 이브의 말을 따랐다. 하나님이 남편을 가정의 대표자 겸 영적지도자로 세운 소명을 위반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브에게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형벌을 내렸는데 실은 가정의 영적질서를 원래 창조 당시의 계획대로 회복시킨 것이다. 아담은 지금 그렇게 회복된 가정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새롭게 인식 헌신하여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이 또한 일부 이단에서 인류 타락의 책임을 이브에게만 전가시키는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어떤 이단은 심지어 이브가 사탄과 성적교섭을 하였기에 마귀의 후손인 가인 계열의 인류가 태어났다는 허무맹랑한 궤변도 늘어놓는다.

 

기독교는 절대 남녀를 차별하거나 남성우위를 표방하지 않는다. 남녀를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들었다. 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라고 했으니 상하주종관계가 아니라 동등하다는 뜻이다. 국제연합에서 미국 같은 강대국이나 아프리카 약소국이나 투표권이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가정에서 영적으로 분별, 판단, 시행하는 일차 책임을 아버지에게 맡겼다.

 

지금 이브가 하나님께 잔뜩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브는 생전처음으로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브에게 잉태의 고통이 더할 것이라는 벌을 내렸을 때부터 실은 “산 자의 어미”가 된다는 영광스런 약속이었음을 그들은 깨달았다. 지금 그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부부가 함께 확인한 것이다.

 

출산의 그 큰 고통을 득남의 큰 기쁨으로 승화시켜 부부가 함께 누리고 감사했는데 아담은 가정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뿐이다. 어쩌면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지도 모른다. 본문에서 ‘아담’을 사람 전체를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해석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쨌든 부부의 공통적인 고백이다.

 

요즘도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 티격태격 하다가도 아이 일로 인해 화해하지 않는가? 첫 득남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이 크다. 아담보다 자기 몸의 분신으로 여기게 되는 엄마인 이브가 훨씬 더 큰 기쁨을 느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 이민 온 첫날

 

본문의 이런 흥미로운 요소가 단순히 본문의 자구적 해석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대언하고 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입장이 당시 어떠했을까?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하나님을 부인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생긴 수치와 공포는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힐 때에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지금의 두려움은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 불안이다. 에덴에서 아무 과일이나 따먹던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잘못하거나 게을러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소산을 먹지 못해 굶어죽을 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열악한 여건이 주는 두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공포다. 아주 특별한 종류의 새로운 두려움이다.

 

처음 미국으로 이민 와서 첫 발을 미국 땅에 디뎠을 때의 심정을 기억하는가? 앞으로 뭘 해 먹고 살지 현실적 두려움으로 막막했다. 미국이 한국보다 환경이 더 좋고 이민자금과 계획을 마련해 왔어도 그랬다. 저는 사십 초반에 와서 지금 육십 중반이 될 때까지 솔직히 말해 항상 두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떠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하나님 은혜로 다른 이민자처럼 험한 고생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렇다.

 

그러다 어쩌다 한국을 방문하면 그 까닭모를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되고 두 발이 땅에 든든히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곳이라 그렇다. 든든히 내렸던 내 존재 실존의 뿌리가 잘려나간 기분이라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을 수밖에 없다.

 

지금 아담과 이브도 마찬가지다. 에덴의 본토를 떠났다. 친척은 없었지만 아비 집을 떠났다. 자신들의 뿌리가 잘려나간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과의 상시적 직접적 교통이 불가능해졌다. 그런데도 지금 아담은 놀랍게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는 감사의 고백을 했다. 믿음이 더 좋아진 것이다. 온전히 구원 받은 자답게 믿음 위에 굳건히 서있는 모습이다.

 

최초 인간의 구원

 

그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내가 이 땅과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덤볐었다. 범사를 내 뜻과 계획대로 내 능력으로 충분히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었다. 그랬던 그가 이젠 여호와로 인해 득남했다고 실토한다. 아내와 한 몸을 이루고 난 뒤에 새 생명이 잉태하고 이브의 태 안에서 자라고 출산하는 그 신비롭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역사 앞에 완전히 항복한 것이다.

 

당시로선 임신과 출산에 대한 상식이 전무했다. 배가 불러와도 그 안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태아가 가끔 움직여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성적 교섭으로 새 생명이 잉태되고 아기가 여자의 자궁에서 열 달간 자란 후에 출산한다는 지식이 없었다. 산파도 없었다. 아담은 인류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서 가인을 직접 받았고 탯줄도 손수 잘랐다. 지금처럼 교육을 받거나 주위에서 출산을 자주 보는 것과는 상황이 판이했다.

 

그 때의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라. 자기들 두 사람을 그대로 붕어빵처럼 판박이한 아기가 방긋 웃는 모습에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가슴이 충만해졌지 않겠는가? 자기들이 계획하거나 예상은커녕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생명이 얼마나 신비롭고도 경이로운지 절감했다. 생명의 소중함 고귀함을 비로소 깨달았고 살아서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나 감사했다. 하나님이 새 생명을 창조해서 선물로 주셨다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해석도 이들 부부에겐 가능하지 않았다.

 

아기가 짜증을 내거나 울어도, 죄송하지만 똥을 싸도 귀엽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다 아이가 까닭 없이 보채기만 하고 울음을 그치지 않은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밤새 안절부절 하며 꼬박 밤을 새운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틀림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직후에 에덴동산에서 바로 이런 충만한 기쁨을 느꼈겠구나,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을 피해 나무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바로 이런 염려와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을 것이라고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친부모를 거역한 자기들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새삼 너무나 부끄러워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며 먼저 찾아와서 용서하여 주시고 다시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그 위에 자식을 통해 당신의 생명이 아름답게 열매 맺고 이어지게 해주셨다.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자 축복을 하나님 당신께서 이루셨음을 직접 목격했다. 저절로 그분께 감사하고 기쁨의 눈물로 찬양하지 않았겠는가?

 

자기를 타락한 원인이 하나님 탓이라고까지 대들었던 아담에게 이런 극적인 변화가 생긴 계기는 무엇인가? 본문의 득남한 사건이 아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힌 사건이다.

 

창세기 강해 #35에서 살펴본 대로 어린 양이 자기들 죄를 전가 받아선 자기들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완전히 죽었다. 그 현장에는 양과 하나님과 딱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설명하거나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아담과 이브는 그 양과 자신들이 일체화 되는 것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양만 자기들 대신에 죽고 하나님의 가죽 옷이 입혀지는 순간 그들은 부활의 감격을 누렸던 것이다. 요컨대 최초 인간 두 사람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아담과 이브는 죄가 없는 순전한 아름다움을 체험한 유일한 인간이다. 타락으로 비참한 절망 아니 실질적 죽음에 빠진 최초의 인간이었다.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수치와 공포의 나락에 떨어졌다. 하나님 안에 있다가 하나님 밖으로 나간 필연적 결과였다.

 

그러다 하나님 쪽에서 다시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하나님이 직접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평생을 함께 하고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에덴 밖에 나와도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육신의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된 것이다.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선악을 알게 된 아담

 

아담과 이브에게 일어난 외적 변화는 거주지를 이동 즉, 이사한 것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동일했다. 반면에 그들의 내적 변화는 엄청났다. 여호와 인해 득남했다는 것이 단순히 자기들의 생명이 후손에게 이어짐에 대한 감사로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며 내 생명을 전부 바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을 역으로 바꾸면 여호와로 말미암지 않고는 득남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은 오직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뜻과 고집대로 행한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고 가장 큰 실패라는 것을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서 철두철미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갖춰져 하나 부족한 것 없는 낙원 안에선 하나님 밖으로 나갔다. 지금은 아무래도 모든 것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 낙원 밖에서 도리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갔다. 타락 전에는 하나님의 선이 너무 풍성해서, 정확히 말하면 오직 선뿐이라서 선이 선인줄 몰랐다. 이제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다 구원을 얻고 보니 성경이 진술한 그대로 선악을 알게 되었다. 악이 얼마나 나쁜지, 또 그 악과 비교해서 선이 얼마나 좋은지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그런 확신 위에 자기들 모든 것을 거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 오해나 착각은 말아야 한다. 지금 말하는 선은 윤리적 의로움이 아니다. 최초 인간이 깨달은 인생의 진리 즉, 오늘의 성경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꼭 알게 해주고 싶은 그분의 진리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선이고 하나님 밖에 있으면 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면 선이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면 악이다.

 

아담은 하나님께로 오는 것 중에 소중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없으며,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 인간 역사도 단 하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풍성하고도 오묘한 사랑을 자기들 삶의 구석구석에서 발견하여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선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타락 전이나 후나, 에덴 안에 있을 때나 밖으로 쫓겨 나온 지금이나, 하나님의 자기들을 향한 사랑의 끈이 끊어진 적은 물론 느슨해진 적도 단 한 순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또 그런 앎을 소지한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신자는 물론 모든 인간의 선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인간의 악이다.

 

실낙원에 숨겨진 또 다른 하나님의 진리

 

본문에서 흥미로운 요소로 하나 더 첨가할 것이 있다. 성경은 본문에서부터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하게 타락하게 되는지 본격적으로 진술할 참이다. 실제로 친 형제를 살인하는 인간적 윤리로 따져도 최고의 범죄로 곧바로 이어진다. 그전에 본문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혜와 긍휼에는 티끌만큼의 변개 수정 취소 포기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렇다면 다른 말로 쉽게 바꾸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걱정 의심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나머지는 인간에게 달렸을 뿐이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길은 그분의 사랑 안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 수밖에 없다. 잠시 우거하다 들의 꽃처럼 시들게 마련이다. 타락 이후로 인간의 참 실존의 뿌리가 잘렸다. 영원한 본향은 천국에 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두 발을 온전히 디디지 못한 채 항상 갈급하고 허망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록 그분과의 직접적이고 상시적인 교통이 단절되었어도, 그래서 그분이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신자만은 성령 안에서 기도를 통해 그분과 대화할 수 있다. 특별히 예수 십자가 은혜를 통해 매일 매일 당신만의 충만한 생명을 공급 받을 수 있기에 정말로 열심히 기쁨에 차서 활기차게 살아야 한다.

 

여러분의 현재의 삶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만 번창해 정말 힘들고 고달플 수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금방 나아질 기미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는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만만 터져 나오고 도무지 이해도 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럴수록 예수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뜻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너무 영적으로 신령하게 신학적으로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바라볼 때 어떤 심정인가? 무슨 짓을 해도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무릅쓰고 해줄 것 아닌가? 때로는 아이를 위해서 훈육 연단도 시킬 것이다. 그게 바로 주님이 지금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과 뜻이다. 우리와는 비교도 못하는 풍성한 긍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그럼 더 이상 두려울 것이 무엇 있는가? 그럼에도 염려가 끊이지 않으면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주신 뜻대로 쉬지 말고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럼 여호와로 인해 득남하게 되었다는 아담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지난 극심한 고난마저 여호와로 인해 겪었고 그 안에서 여호와의 선을 풍성히 맛보았다는 고백까지 할 수 있게 된다.

 

1/24/2016


master

2016.01.26 15: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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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소망을 거두시는 하나님 (마13:24-30) 마태복음 강해 (147)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태복음강해 #148 - 마13:31-35) [1]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13:31-35) 마태복음강해(148)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

풀무 불에 던져질 자는? (마태복음강해 #149 - 마13:36-43)

풀무 불에 던져질 자는? (마13:36-43) 마태복음 강해(149)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

선택이 아니라 교환이다. (마태복음강해 #150 - 마13:44-46)

선택이 아니라 교환이다. 마태복음 강해(150)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151 - 마13:47-50) [4]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151)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사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

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태복음강해 #152 - 마13:51-52) [1]

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태복음 강해(152)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1,52) http://youtu.b...

사탄의 프라시보 효과 (마태복음강해 #153 - 마13:53-58) [1]

사탄의 프라시보 효과 마태복음 강해 (1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숙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

천하 제 일의 부자는? (마태복음강해 #154 - 마14:1-12) [2]

천하 제 일의 부자는? 마태복음 강해(154)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1) (마태복음강해 #155 - 14:13-21) [1]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1) 마태복음 강해 (155)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

내 생애 최고의 추수감사절 (행16:24-26) [2]

내 생애 최고의 추수감사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2) (마태복음강해 #156 - 마14:13-21) [1]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2) 마태복음 강해 (156)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3) (마태복음강해 #157 - 미14:13-21) [2]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3) 마태복음 강해 (157)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

예수님의 참 이름 (마태복음강해 #158 - 마14:22-27) [2]

예수님의 참 이름 마태복음강해 #158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저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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