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고난주간 설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22:31-34)

 

 

인간이 고안한 최고 극형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0년에 로마의 노예반란을 그린 영화 스팔타커스의 마지막 부분에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반란이 실패로 끝나고 모두 포로로 잡혔다. 로마군 사령관이 대장 스팔타커스와 심복 부하에게 칼을 한 자루씩 던져 주고 서로 싸워서 이기는 자는 십자가에 처형하겠다고 했다. 칼에 죽으나 십자가에 죽으나 마찬가지인데다 로마에 반역을 했기에 어차피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데도 이상한 명령을 내린 셈이다. 영화에는 복잡한 스토리가 있지만 간단히 말해 자기 권력을 과시하며 노예들을 조롱거리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칼을 받자마자 방금 전까지 서로 아주 신뢰하고 존경하는 사이였는데 너무나도 격렬하게 싸운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그만큼 극심하다는 반증이다. 상대를 아끼는 마음에 차라리 내 칼로 단번에 찔러 죽여서 십자가 처형만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배려였다.

 

이번 주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고통을 스스로, 기꺼이, 주도적으로 감당하려 예비하신 고난주간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신자들로선 그분의 수난을 기념하고 동참하는 뜻으로 여러 가지 행사를 한다. 금식하며 기도하고 세상의 죄악은 물론 유흥도 멀리하고 검소하고 경건하게 보낸다. 십자가를 만들어 지고 실제로 언덕길을 메고 올라가는 체험을 하고 심지어 손바닥에 직접 못을 박는 재현까지 한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기념하려는 그 취지는 선하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작금 교회와 신자들이 고난주간을 보내는 모습을 엄밀히 따지면 초점이 조금 어긋난 것 같다.

 

알다시피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한 사형 방식 중에 최고로 고통이 심한 것이다. 손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과 그 때 흘리는 피 때문만이 아니다. 죄송하지만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오징어가 덕장에서 서서히 말라비틀어지는 모습으로 죽어간다. 평균 3-4일, 길게는 일주일 열흘까지도 그렇게 달려 있어야 한다.

 

당연히 물은 마시지 못하니까 심한 탈수 현상이 생기고 머리는 빠개질 듯이 아프다. 무릎을 구부리지 못하게 뼈를 꺾어버리니까 나무에 달린 육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근육은 찢어진다. 의식이 살아 있는 채로 벌레가 기어 올라와 몸을 파먹고 새들이 눈과 장기를 쪼아 먹는 것을 꼼짝없이 그대로 당해야 한다. 그런데도 숨이 넘어가지 않으니 그 고통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어떠했는가? 너무 쉽게 운명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평가절하하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능멸을 당했다. 채찍으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다. 단순히 가죽 채찍이 아니라 쇠 방울이 달린 것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기도 한다. 손바닥과 발목에 큰 대못이 박혔으며 또 가시 면류관으로 이마가 찢긴 그 고통은 분명 엄청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균보다는 훨씬 일찍 돌아가셨다. 뼈도 꺾이지 않았다.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려 옆구리에 창을 찔렀을 때 이미 운명하셨다. 그 모든 상황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완전하게 성취하려는 뜻이었다. 또 인자로 오신 메시아로서 최악으로 비참해진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영적 이유 외에 예수님이 그렇게 일찍 운명하신 현실적 원인은 그 전에 이미 완전히 탈진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십자가 사형수와 비교해서 육체적 고통을 더 많이 받은 것은 아니다. 밤새 능멸 당했지만 사형수라면 어차피 잠을 못 이루고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한다. 예수님의 경우 가시 면류관만이 특이했지만 그것이 탈진한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탈진한 원인으로 육체적 피로보다는 정신적 고뇌가 훨씬 더 컸다고 봐야 한다. 그럼 또 고난주간을 보내는 신자들의 인식과 태도도 그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고 외출했는데 돌아왔더니 숙제는커녕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학급을 지휘 통솔할 책임을 등한히 했다고 반장만 대표로 엎드려뻗쳐 해서 몽둥이로 호되게 맞는다. 학우들로선 얼마나 아플까, 사실 반장은 조용히 공부하라고 열심히 독려했어도 자기들이 놀았으니 아무 잘못한 것 없는데 너무 미안해진다. 예수님에 대해 그런 식의 송구하고 안쓰러운 마음만 지닌 채 고난주간을 지낸다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공사역 삼 년간 정말로 당신의 소명을 열심히 수행하시다 십자가에서 완성하려는 마지막 주간이다.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초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분의 고뇌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왜 그런 고뇌를 하셨는가? 그것이 오늘날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으며, 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따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일주일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금식 기도를 해도 별 의미가 없다.

 

큰소리만 치는 베드로

 

오늘의 본문은 네 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다. 성경 독자라면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실제 신자라면 다 잘 알고 있다. 주님은 수제자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어김없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인간의 체질과 의지력과 도덕성과 심지어 믿음마저 얼마나 연약한지 여지없이 실증된 사건이다.

 

베드로는 누구인가? 삼년 간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천국복음을 직접 배웠다. 수많은 기적에 동참했고 잠시나마 물 위를 주님과 함께 걷기도 했다. 변화산에서 천국의 영광을 목격했고 죽은 자를 살리는 현장에도 수차례 있었다. 그럼에도 상대가 십자가 처형을 안 당하게끔 목숨까지 걸며 안간힘을 썼던 로마의 노예에 비추어도 너무나도 비겁하고 치사했다.

 

그러나 엄밀하고도 솔직하게 따지자면 우리가 베드로를 비난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안 된다. 그는 재판정에 따라가기라도 했다. 만약 저가 그 당시 살았다면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을 것이며, 예수님의 제자로 뽑히지도 않았고 그분을 따를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대중 속에 있되 아주 치사하게 맨 뒤에서 대제사장의 눈도장만 찍으려 시늉만 했을 것이다. 성경은 지금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베드로에 비추어 보면 바로 너야말로 더럽고 추한 죄인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뇌, 표현이 이상하지만 당신께서 받으신 극심한 스트레스가 무엇이었는지 첫 번째 해답이 간단히 나왔다. 수제자 베드로의 그런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 아시고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삼 년이나 가르쳤는데 유다는 배신했고 베드로는 부인했다.

 

베드로는 주님과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즉,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쳤다.(33절) 겟세마네 동산에선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자르는 대담한 행동을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항거나 말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자 아이쿠 자기만 손해 볼지 모르겠다는 약삭빠른 계산을 했고 비천한 하녀 앞에서 역정을 내며 스승을 부인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직접 야단치지 않으셨다. 사탄에게 일시적으로 농간을 당했다고 한다. 대신에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당신께서 기도하셨다고 한다.(32절) 그러니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세우라고 당부했다. 주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고 승천하실 것이다. 십자가 복음의 권능과 진리를 성령이 강림하여 제자들에게 깨우쳐 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전에 예수님더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그 믿음의 반석 위에 기독교를 든든히 세울 것이다. 처음 그를 부를 때에 주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소명에 충성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순교를 주님처럼 기꺼이 주도적으로 감당했다.

 

그의 큰소리가 역사상 최고의 뻥이 될 뻔했으나 주님이 실현시켜 주었다. 예수님이 기도하여 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 신자의 체면까지 살려주는데 억울한 것은 물론 고난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신분과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야 한다.

 

베드로의 부인이 뜻하는 바는?

 

마태와 마가의 평행 기사에는 예수님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그랬고 수제자 베드로마저 부인했다. 그럼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길을 철두철미 혼자서 올라가신 것이다. 인간 제자들의 도움, 영향, 심지어 수종도 받지 않고 철저하게 고독한 행군을 하셨다. 대신에 엉뚱하게 길가에서 구경하던 구레네 시몬의 도움을 받았다. 동고동락했던 열두 제자들마저 외면했는데 과연 오늘날의 우리가 그분의 고통에만 감성적인 동참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니 그럴 자격이라도 있는가?

 

우린 예수님을 따르지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분과 원수의 자리에서 대적하고 있었다. 골고다 언덕에서 그분의 육신적 고통을 목격을 하지 않았다. 그분의 고통을 이해는 물론 상상도 할 수 없다. 안쓰럽고 송구하게 여기는 것 자체도 엄밀히 말하면 영적 교만일 수 있다.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으로 이룬 구원을 통째로 공짜로 선물 받았을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당한 육체적 고통에 감성적으로나마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열두 제자, 그 중에서도 사실은 베드로뿐이다. 우리의 감정이 동원되어야 하는 측면은 영생을 얻은 은혜뿐이며 그것도 평생토록 감사 찬양해도 모자란다.

 

태초부터 영원한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예수님에겐 아담이 타락한 이후 십자가에 운명하기까지 오직 한 가지 스트레스뿐이었다. 이 세상의 죄악과 그 배후의 영적인 흑암의 세력을 죽기까지 분노하고 저주하셨다. 그와 동시에 죄 중에 빠져 사탄에 미혹된 영혼들에 대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와 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다.

 

성경이, 특별히 본문이 말하는 바는 그런 예수님을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싫어서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예수님이 뭐라고 설명하셨는가? 사탄이 밀 까부르듯 즉, 제 마음대로 농간했다고 한다. 기괴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겁준 것이 아니다. 현실적 정치적 메시아만 대망하게 만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세상의 출세와 영달에 눈이 멀었다. 바로 앞의 기사에서 제자들은 누가 큰지 다툼을 벌렸다. 스승이 마지막으로 비장한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 입성을 하자 지금껏 보여준 권능으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리라 기대했다. 다들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할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예고했었는데도 아예 안중에 없었다. 사람이 마지막 때에 부활한다는 것은 종교적 교리로만 인정했지 실제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유대인들

 

예수님의 3년간의 공사역 동안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에 호산나 찬송하며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막상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들의 그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대신 죽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죄 중에 빠져서 어리석고도 치사한 모습의 인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다. 당신께서 오히려 인간의 영적으로 비참한 실상을 잘 아시고 너무나 불쌍히 여겨서 죄에서 건져 깨끗케 해주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 한명의 예외 없이 모두가 재물, 권력, 명예를 쌓아 자기를 치장하고 이름을 높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는 곧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몰려들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피해서 배를 타고 도망가 버렸지 않는가? 더 큰 문제는 그런 목자 잃은 어리석은 양 떼를 바르게 가르치고 돌보아야 할 종교지도자들의 부패가 더 심했다. 종교는 넘치도록 번창하는데 참 믿음은 눈을 닦고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 고난주간에 주님은 인간을 그렇게 제 멋대로 미혹 조종하는 사탄에게 극도로 분노하셨다. 또 그 아래 노예로 묶여 있는 인간에 대한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긍휼을 도무지 주체할 수 없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하기 직전에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은 통분하며 우셨다고 한다. 친구를 잃은 슬픔도 컸지만 죄의 삯인 사망에 묶여 있는 인간의 비참한 실상에 대한 비통함과 이 땅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에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아마 마지막 주간 내내 주님은 속으로 그렇게 통분하며 우셨을 것이다. 제자들과 사람들 몰래 눈치 못 채게 우시느라 탈진하신 것은 아닐는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이제 신자들이 고난 주간에 주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해야할지 분명해졌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이 약속을 붙들고 죄로 타락한 이 땅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 땅의 성 무너진 데를 찾아서 대신 막고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해 심판할 것이라고 선포했다.(겔22:30) 이 말씀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 한다. 에스더 왕비에게 모르드개는 동족을 구할 사명을 주었는데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민족은 하나님이 따로 구원하겠지만 소명에 충실하지 않은 네 책임은 반드시 물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엄위하신 하나님을 확실히 기억해야 한다.

 

신자는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다. 우리끼리만 천국 가라는 뜻이 아니다. 신자더러 이 땅을 거룩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신자가 고난주간을 보내는 방식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일 년의 다른 51주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도 좋다. 그러나 최소한 이 한주 간만은 이 땅의 죄악을 깨끗케 해 달라고, 아직도 미혹된 영혼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무엇보다 사탄의 훼방과 궤휼을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나아가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자기가 신자로 부름 받은 그 길을 온전히 걸어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회개해야 한다. 내가 예수를 믿은 후에 살아가는 방식이 세상 사람과 정반대가 되었으므로 그들이 나를 외면하기에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고독한지 따져봐야 한다.

 

세상과 정반대라고 해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에 모여 찬양과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과 명예만 추구하여 나를 치장 자랑하기에 바빴던 인생관 가치관을 완전히 깨트려 뒤엎었는가? 대신에 내가 처한 여건과 소속한 공동체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나눠주고 있는가? 그분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는 수단과 통로로 나의 전부를 온전히 헌신하고 있는가?

 

이전에는 못 이긴 척 눈만 몇 번 찔끔 감으면 엑스트라 마니가 생겨 마누라 선물도 하고 흥청망청 재미있게 놀았는데 이젠 단 한 번이라도 과감하게 거절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전의 동료들이 차츰 나를 싫어하고 멀어지는가? 그럼에도 전혀 외롭지 않고 상처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기쁘고 감사할 수 있는가?

 

나아가 그런 부정부패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더 정직하고 성실하며 실력 있게 맡은 바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아무리 구박해도 대들지 않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까지 내어주고 있는가? 그 사람의 인생에 고비와 문제가 생겨 힘들 때에 오히려 찾아가 위로하고 기도해주고 내가 가진 것도 아끼지 않고 나눠서 도와주는가?

 

그래서 그들이 정말로 예수 믿는 자들은 별종의 인간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는가? 그들에게 신자들로부터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느끼게 해주는가? 그래서 그들 스스로 힘든 일이 있을 때에 기도해달라고 거꾸로 찾아오게 하는가?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신자라고 경외하는가? 아님 존경이라도 하는가? 최소한 인정이라도 하는가?

 

예수님 말씀대로 머리 둘 곳도 없이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사람이 거의 없는 그 길을 걷고 있는가? 넓고 편안하고 사람이 많은 쪽 길은 이제 더 이상 부럽지도 않고 그 길로 돌아갈 생각이 과연 전혀 없는가? 대신에 지금 걷은 이 길이 너무 좋아서 평생을 감사 찬양할 수 있는가?

 

물론 신자도 연약하고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지라 인간적이고 감성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바로 그런 때에 교회로 모여야 한다.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얼마 안 되는 동료들끼리 위로, 격력, 권면, 도전, 기도하며 다시 힘을 얻고서 함께 손잡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신자더러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정말로 예수님 따라가는 삶을 살아보라. 그래서 불쌍한 이웃과 형제들을 견고케 세우는 일을 한두 번이라도 해보라. 얼마나 신나고 기쁘고 보람찬지 모른다. 더 이상 세상 것이 즐겁지 않게 되며 좁은 길을 걷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생각도 못하게 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무너진 곳을 찾아라.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너무 거창하고 힘든 일일 수 있다. 그렇게까지 못하더라도 당장 자기 집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성벽이 없는지 살펴보라. 애들이 말을 잘 듣지 않고, 수입은 적고, 남편이나 아내가 내가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성벽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바로 그런 것이 무너졌다고 여기고 그것만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본인이야말로 성벽이 무너진 곳이다.

 

예수님은 아무 항변도 변명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말을 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인간은 말로써 알아먹고 고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 할 것도, 그 배후에 사탄이 있음도 다 아셨다. 당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막아줄 수 있었다. 베드로를 당장 야단치지도 않았다. 대신에 기도만 해주면서 나중에 스스로 돌이키라고만 했다.

 

내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이 정말로 힘들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혼자만의 슬픔, 고민, 한숨이 무엇인지 잘 살펴야 한다. 아니 그렇게 힘들고 고달픈 중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은 아닌가? 제대로 상대의 어려움을 살피지 못하거나 그런 줄도 전혀 모르는 내가 바로 무너진 것이다.

 

우리 모두 너무나 연약하고 어리석어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 없이도 살 수 있는 자는, 단 한순간이라도 필요치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에스겔 선지자는 무너진 성벽을 대신 막을 자를 찾는다고 했다. 가정의 무너진 성벽을 자기가 대신 막아서야 한다. 역대하 7:16에서도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줄 자부터 스스로 겸비해져야 한다.

믿음이 좋다는 증거는 오직 하나다. 예수님처럼 남들의 잘못을 다 잘 알고 있어도 결코 정죄, 야단, 비평도 않는 것이다. 그 잘못으로 인한 피해는 내가 다 감당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들고나가 대신 기도해주는 것이다.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육신적 고통이 안쓰러울 정도뿐이라면 아직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식의 동참은 오히려 더 원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진짜로 괴로워했던 바로 그 괴로움에 동참해야 한다. 주님은 고난주간 내내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울어주었다. 우리도 이번 주에 이웃을 위해서 울어주어야 한다. 그것도 자기 가정에서, 특별히 부부사이에서부터 그래야만 한다.

 

3/2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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