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자유의지를 주어 타락케 했나요?
[질문]
신앙생활 하면서 항상 제일 궁금했던 점은 “하나님은 애초에 왜 인간을 당신을 거역할 수 없는 즉, 선악과를 따먹지 않음으로써 타락으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설명을 들어도 명쾌해지지 않습니다.
[답변]
“저 총각의 부인은 미인입니까?”라는 질문은 아예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질문으로써 일고의 가치도 없고 답변할 필요도 없습니다. ‘총각’이라는 단어 자체는 결혼하지 않아 부인이 없다는 뜻인데 부인에 대해 물었기 때문입니다. 질문하고 답변할 수 있는 범주와 한계 밖의 논의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의문들도 잘 따져보면 사실상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함유하는 의미와 성경적 정의가 무엇입니까? 가장 기본적인 뜻은 “인간을 포함한 이 땅에 존재하는 만물을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만드시고 지금도 그에 따라 세상만사를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본 주제와 연결해서 설명하자면 처음부터 인간을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안 따 먹을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드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또 그렇게 하신 것에 악, 허물, 오류, 착오라곤 단 한치도 개입되지 않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발전된 정의로서 성경이 계시해 놓은 바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정의에 반(反)하는 질문은 질문으로서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을까?” 같은 것입니다. 지금 질문하신 내용도 정확히 또 엄밀히 따지자면 그와 같은 부류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뜻조차 모르는 불신자는 괜찮지만 성경을 아는 신자로선 끄집어내선 안 되는 질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유하자면 이런 꼴입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왜 나를 이렇게 키 적고 못 생기게 낳으셨어요? 이왕이면 키 크고 잘 생기게 낳아주셨어야지요?”라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묻는 불효자 아니 바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철모르고 어렸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누구나 들지만 초등학교에만 들어가도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자 불만임을 알기에 금방 포기하고 이미 그렇게 태어난 가운데서 자기 성장을 스스로 도모합니다.
완전하지 않는 비유라고 전제한 뜻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 부모는 자식을 자기가 설계해서 낳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당신만의 설계도에 따라 인간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이미 태어난 이후의 상태에 대해 불만은물론 의심도 할 수 없는데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에겐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물론 처음 예수를 믿어 창세기를 배우게 되면 누구나 궁금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커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 줄 알면 부모에게 그런 의심과 불만이 없어지듯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면 더 이상 의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 비유는 그래서 자식의 부모에 대한 태도에만 적용됩니다.
신앙이란 또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철저한 자기인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뜻을 안다면 필연적으로 인간이라는 단어의 뜻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고 인간은 토기인데 토기장이가 귀하게 쓰이는 토기든 천하게 쓰이는 토기든 마음대로 만들 권한이 있다고 변증한 대로입니다. 구원을 주려고 택하는 예정에 대한 변증이지만 인간을 당신의 뜻대로 종류별로 만들 수 있는 분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근본적인 본성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신앙이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창조한 이후의 상황과 사건에만 신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모든 학문 사상 철학도 인간으로써 실존하게 된 이후에 이 땅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모든 자연과 상황에 맞추어서 고안 발전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과학도 하나님이 이미 창조(발명)해 놓은 것 안에 운행되는 원리를 역으로 추적(발견)한 것일 뿐이듯이 신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기존에 실존하지 않는 것들과 일어날 수 없는 일들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오직 당신께 순종하게만 하는 방식으로 만들지 않았느냐는 불만은 도무지 발생할 수 없는 일을, 심지어 하나님이 되어야만 해결되는 의문을 갖는 셈입니다. 창조 이전으로 돌려야 하지 않느냐는 반발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 혹은 불순종할 수 있게끔 만들었으니까 자유의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의지는커녕 의지도 아닙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자 바로 그것이 인간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인간이 인간 밖의 일을 논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인간이 해선 안 되는 일입니다.
다시 부모와 자식의 비유로 돌아갑시다. 이미 키 적고 못 생긴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 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 즉,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선 따질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불효는 될지언정 성립되지 않는 불만은 아닙니다. 키 적으니 체육관에 가서 키 크는 운동도 하고 그런 영양제도 사먹어야 하니 용돈을 더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왕에 못나게 태어났지만 몇 군데 성형수술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사정도 모르는 철없는 짓일 수는 있어도 전혀 틀렸거나 말이 안 되는 요구는 아닙니다. 신자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고 응답은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듯이 말입니다.
또 다른 집 부모는 자식이 말만 하면 다 들어주던데 우리 집은 그 집보다 못 사는 것 같지 않는데도 왜 친구 부모처럼 하지 않는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는지 불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종교는 잘 믿으면 만사 형통한다고 가르치는데 기독교는 거룩하게 살라고만 하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모를 때는 비슷한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돈으로 해결하는 부모는 자식을 망칠 뿐이며 오히려 힘에 겨운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 공부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참 사랑임을 조금만 이성이 깨여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준 모습과 처해진 상황 아래에서 그분의 더 깊은 뜻을 알아서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한마디로 사탄의 꾐에도 넘어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뜻을 헤아려서 그에 걸맞게 반응해야만 참 신앙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흑암의 세력에 당당히 대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왜 사탄의 방해를 방치하느냐 따지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헛된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본 질문에 가장 보편적인 답변은, 가장 보편적이라는 표현은 핵심적이고 본질적 진리라는 뜻을 이미 함의하고 있음, 인간을 물질이나 기계나 동물로 만들지 않고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당신을 찾고 순종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려는 뜻입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알기 쉽게 말하면 “두 발로 서는 동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 외에 더 심오하고 은혜로운 변증은 사실상 필요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까지 연결하는 것은 믿음이 성숙된 신자에게 행하는 신학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8:5-9)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천사보도 못하고 동물보다 뛰어난 존재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뜻은 이 땅의 물질계 안에서 하나님 대신에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영계에서 활동하는 천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니까 물질은 물론 식물이나 동물과도 같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자연법칙과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들을 다스리려면 그 둘에 묶이지 않는 자유의지가 필수적입니다. 또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신 영도 있어야 했고 하나님은 그렇게 완벽하게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그 창조된 본연의 상태로도 에덴동산을 아름답게 잘 가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전혀 부족함 없이 참 기쁨과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천사처럼 그 존재하는 형체도 달라서 눈에 보이지 않게 영계에서 활동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사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기를 따르는 선한 천사들과 거역하는 사탄과 졸개들이 생기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입니다. 그것을 인간이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보도 조금 못한 인간도 당연히 그렇게 만들었어야 하고 이미 사탄이 존재하는 이상 오히려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모든 피조물과 다르게 두 발로 서는 동물로 만드셨습니다. 두 발은 이 땅을 딛고 서야 합니다. 육신적 생명은 물질계의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으며 육신적 생명의 나고 죽음은 완전히 하나님에게 달렸습니다. 반면에 다른 동물과 달리 두 손은 하늘로 펼쳐들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을 따로 받은 유일한 피조물이자 이 땅의 청지기로서 이 땅의 유일하고도 참 주인인 하나님께 두 손을 벌려 기도하면서 교통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계시 받아 그 뜻대로 이 땅을 다스리고 또 그런 고귀한 신분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두 손 벌려 감사 경배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어도 하나님 말씀에 정진하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구체적인 구원 진리를 몰랐어도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은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자유의지를 주신 의미대로 순종했듯이 다윗도 자유의지를 갖도록 만들어진 인간의 정체성을 정확이 깨달은 것입니다. 다시 비유하자면 키 적고 못나게 (악에게 속아 넘어갈 수도 있게) 태어났어도, 오히려 그런 것이 성장하고 온전해지는데(인간 창조의 경륜을 깨닫고 참 인간답게 사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부모에게 감사한(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인간의 정체성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인물이 구약시대에 그것도 다윗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하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의심은 하지 않았으나 그 원인이라도 알고자 몸부림쳤습니다.
본 질문의 뜻은 왜 자유의지를 주어서 결과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그 후손도 같은 어려움을 겪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욥도 비슷한 맥락으로 내 쪽에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는지 이유만이라도 알고자 따졌습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백 개가량의 물질계의 원리에 대한 질문을 욥에게 답해보라고 던집니다. 욥이 알 수 있는 질문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물질계에 일어나는 일도 즉, 창조된 이후의 현상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영계에서 사탄과 내기한 사정을 네가 알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뜻입니다. 결국 욥은 아래와 같은 고백을 하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겸손하게 항복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1-3)
욥으로선 물질계를 다스려야 하는 인간인데도 자연에 일어나는 어떤 상황도 그 이유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경륜에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아름답게 생육 번성시킬 소명에 충성 순종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이후의 일도 그분의 잘못 허물 책임을 따질 수는 당연히 없고 이유마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믿음으로 그 고난을 잘 인내하고 나중에는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무조건 선하므로 그분만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식도 인간 부모가 행하는 일이, 이미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형성된 후에, 마음에 안 들 수 있고 이해되지 않을 때 많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 그런 훈련을 시키는 것이지 부모 본인이 잘 되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세상 모든 인간은, 신자라면 더더욱 이미 자유의지를 갖도록 창조된 이후이므로 욥은 말도 안 되는 고난에도 그랬는데, 그렇게 된 바탕 위에서 그분께 순종 감사 경배 찬양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천사보다 못하지만 이 땅의 만물을 다스리는 소명을 수행하는 데에 아무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차고도 넘치도록 만들어주셨기에 오직 찬양밖에 그분에게 돌릴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인간 식의 생각에 묶여있다는. 말하자면 원죄의 본성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서 더욱 순종하겠다는 순전한 의도보다는 그렇게 만든데 대한 조금의 불만이나 원망이 내포된 질문이라면 말입니다.
11/1/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