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유대교의 잡신에 불과한가요?

조회 수 102 추천 수 0 2018.11.15 07:44:31

여호와는 유대교의 잡신에 불과한가요? 

 

[질문]

 

인터넷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 아니고 유대교의 잡신이라는 주장을 접했습니다. 그 근거로 창세기 1장과 2장의 모순과 차이,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개념, 구약 여호와의 잔인한 행적, 유대인들의 다신교 신앙, 하나님의 혼잡한 명칭 등을 들었는데 상당히 당혹스럽습니다.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접근 해석해야 합니까?

 

[답변]

 

문서설의 문제

 

이런 주장은 1895년 독일의 빌하우센이 모세오경의 본문에 단어, 문체, 내용 등의 차이점들이 있음에 착안하여 모세가 아닌 훨씬 후대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자료들을 모아서 편집 저작한 것이라는 문서설에 기원을 둡니다. 그 이후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일반 역사 서적처럼 객관적 학술적 방식으로만 분석하여 여러 측면에서 그 사실성과 진리성에 온갖 의문을 제기해 왔습니다.

 

마침 인간 이성이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근대의 낙관주의 물결을 타고 초기에는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의 발전으로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과 관련된 발굴들이 이뤄짐으로써 그 이론의 허구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창세기의 족장들의 기록들에는 그 시대에 통용되었던 용어와 관습들이 포함되어 있음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당대인들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라 후대 편집설이 뒤집힌 것입니다.

 

결정적인 하자는 성령의 영감이 없이 오직 인간 저자들이 후대에 편집 저작했다는 가설로만 성경을 접근 해석한 것입니다. 성경 기록이 갖는 특수한 성격과 그에 따른 올바른 해석방법은 무시함으로써 이론 자체의 모순은 물론 신학적인 결점도 드러냅니다. 필연적으로 인본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고 결국 행위구원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실은 처음부터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비판할 목적으로만 성경을 파고들다 보니까 그런 이론들이 도출 개발된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전체로 보면 전혀 진리가 아니었지만 부분적으로 따지면 참고할만한 사항들은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경본문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방식은 보수주의자들 입장에서도 채택 활용할 바들도 많았습니다. 그에 따른 긍정적인 효과로 성경해석학이 크게 발전되었는데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더 정확하게 변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대적하는 자들의 활동을 묵인하면서도 오히려 당신의 당신 되심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분만의 절대적으로 완벽한 주권과 섭리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간까지 이어지는 이런 성경의 무오성 논쟁을 통해서도 입증되었습니다.

 

질문하신 문제는 아주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내용 같지만 실은 따져볼 일고의 가치도 또 믿음이 흔들릴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자유주의자들 주장의 결정적 하자가 구약성경 해석법인지라 해석법만 올바르게 적용하면 그들 주장의 허구성이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작금 대부분의 교회에선 성경해석법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신자들이 이런 주장을 접하거나 혹은 스스로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 계속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점진적 계시다.

 

구약성경에 대해서 가장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절대적 진리이지만 완전히 명백한 계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시는 처음에는 애매모호했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조금씩 점진적으로 밝혀집니다. 이에 대해 제 다른 글에서 설명한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구약성경의 계시가 신약성경의 그것과 다르거나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점진적으로 계시가 진행되었을 뿐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손바닥에 동전을 감추고 손을 움켜쥐고 있으면 아이는 그 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손가락을 하나씩 풀면 동전의 1/5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계속 펼쳐나가면 점점 뚜렷이 보입니다. 아버지가 손에 쥔 것은 처음부터 동전이었지 중도에 바꾼 것이 아니듯이 성경의 계시도 그러합니다.”(레위기강해설교 #8, 이웃을 심판으로 밀어 넣지 말라.)

 

그럼 손가락을 하나만 풀었을 때에는 아무래도 그 계시에 대한 기록은 명료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진술을 “받아쓰기” 식으로 직통 계시해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 인도를 받은 체험들과 그에 따른 자신들의 반응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성령은 각 저자의 체험 의견 믿음은 그대로 반영되되 하나님의 뜻과 상충되지 않게 했고 또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끔 단어 문구 표현법 등에도 영감을 주어 진리를 드러내게끔 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에는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미개하고 불합리하며 불완전한 표현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시들은 신약에 와서 완전하게 밝혀집니다. 신약과 구약은 반드시 함께 읽어져야 합니다. 구약의 참 의미는 신약에 의해서 해석이 되고 신약도 구약에 기초하여 그 의미가 보완되어져야 합니다.

 

거기다 각 저자들의 시대적 장소적 차이가 있었고 각자의 직업도 다 달랐습니다. 일부 표현상의 차이는 당연히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모여서 편집회의 한 번 하지 않았는데도, 그럴 수도 없었지만, 주제는 오직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통일이 되었고 각 책들이 전하는 진리들도 서로 상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다는 더 확실한 증거입니다.

 

구약성경은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적인 표현이다.

 

성경은 인간이 깨달은 종교적 사상과 윤리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초월자인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이 땅의 현실 삶에서 보호 인도하면서 당신의 뜻을 계시했는데 그 백성들이 그 받은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인간이 그분과 교통하면서 체험한 일과 그에 대한 감상 등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계시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출20:5, 34:14) 질투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어떤 이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이나 애정을 끄는 다른 대상에 대해 시기 경쟁 분노 저주의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 정의에 대입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약에선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스라엘이 관심을 갖는 우상들에게 대해 엄청난 진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상은 존재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외에 그 어떤 것도 신이 아니고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진리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런 선언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점을 제발 알아 달라, 또 그래서 절대로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숭배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경을 조금만 앞뒤로 따져서 비교 대조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문자적인 표현 하나로 하나님을 질투나 하는 미개하고 비도덕적인 원시적 신이라고 매도하는 자는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기에 그런 평을 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성경을 정말로 열린 마음으로 읽고 묵상 분별하면 여호와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려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부인하고 비방하는 사람이 도리어 영적으로 미개한 사람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출애굽 시킨 여호와임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합니다. 애굽인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무참히 패배시킨, 9가지 재앙이 다 애굽의 우상과 관련된 기적이었음, 당신이야말로 상천하지(上天下地)의 유일한 절대자 통치자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세상에 있지도 않는 우상들을 질투할 리는 없습니다.

 

구약성경도 문학 작품이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을 받긴 했어도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저작하여 인간이 그것을 읽고 그대로 따라야 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그 진술 방식에는 인간의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이미 소지 활용하고 있는 여러 문학적 기법들이 자연히 동원되었습니다.

 

또 글로써 한 번에 표현될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창조 같은 너무나 장엄하고 광대했던 사건은 도무지 글로서 담아낼 수 없습니다. 설령 일일이 기록해도 그 양은 전 세계 도서관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삼년 간 행한 기적들도 이럴진대 그 엄청난 창조에서 현대인들이 만족할만한 어떤 부족도 없는 세밀한 기록을, 그것도 수천 년 전 고대에 이제 막 문자가 발명된 시대에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실제로 일어났던 현상을 3D 영상으로 찍은 것이 아닙니다. 과학적 논문이나 자료가 아니라 이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어떻게 다스리고,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느냐에 관한 영적인 지침서입니다.

 

창세기의 1,2장의 기사의 차이가 나는 것도 각 장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먼저 1장에서 창조의 전체 구조와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이어지는 2장은 그 전체 창조 중에서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따로 떼어내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하나님이 가정 제도를 설립한 것과 그 의미를 진술해 놓았습니다.

 

당연히 세부적인 측면에서 이 두 장의 설명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선 오래 전에 제가 저작한 “그런 예수는 없다.”에서도 언급했습니다.(2장 성경대로 믿는다 - 창조 이야기의 딜레마와 교훈) ‘운영자책’ 사이트에 들어가면 무료로 이북파일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자를 갖게 된 민족 중의 하나입니다. 또 언어구조도 암송 낭독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여러 이야기를 대대로 전승하고 문자로 기록하기에 아주 적합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인간의 수준으로 성경만큼 정교하게 기록되었고 또 그대로 잘 보존된 책은 없습니다.

 

창세기 기록의 정밀성, 과학성, 논리성을 문제 삼는 것은 오히려 성경은 반드시 받아쓰기 방식으로 기록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어떤 이단처럼 그 원본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주장하든지 말입니다. 인간이 저작하여 여러 부분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그 진리성과 역사성을 입증합니다.

 

구약성경의 기록 전부가 영적 진리는 아니다.

 

구약성경은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기록되었는데 기록 당시의 인간의 실제 생활상에 맞추어 기록되었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쉽게 말해 그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성경적으로 아니 일반 윤리만으로도 죄로 간주되는 일들마저 마치 하나님이 장려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일부다처제와 노예제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도를 옳다고 승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에 당신께서 직접 개입한 기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영적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상태에서 그분이 개입했지만 앞에서 든 비유대로 당신의 손가락 다섯 개를 다 펼쳐 보이면 인간에게 오히려 혼돈 반발만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처 몰라서 이미 굳어진 생활방식은 그대로 둔 채 당신의 진리를 계시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족속들이 노예제도와 일부다처제를 죄악시는커녕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당시의 세태 내지 수준 안에서 그래도 하나님을 아는 백성만은 이방족속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가르친 것입니다. 아내와 첩을 동등하게 대우해주고, 동족은 노예로 부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뜻을 정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혼증서를 간음한 연고 외에는 발행하지 말아서 절대로 아내를 함부로 내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율법의 원래 정신은 여성의 권익 보호였다고 정확하게 다시 가르쳐준 것입니다.

 

이방 족속과 비슷한 하나님의 이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수준은 출애굽할 초기에는 타민족에게 비해 그리 띄어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사백 년이나 살았기에 온갖 나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교류하면서도 그랬는데 히브리인들의 언어, 관습, 문화에 그런 이방의 흔적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오염된 흔적들을 없애려고 아니 그 전에 아예 그들에게 물들지 말라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은 다른 말로 이스라엘의 도덕 종교 영성을 교육시킨 기록인 셈입니다.

 

한국에선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종교를 불문하고 절대자를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절대자는 하늘에 계신 신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가졌기에 공통된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도 한국어 성경을 처음 발간했을 때는 하느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통치하는 초월자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인간의 삶에 깊이 개입하여 인도하시는 내재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선 나중에 하느님을 전부 하나님이라고 고쳐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가르침이나 하나님 그분이 잘못되었기에 고친 것이 아닙니다. 번역자인 인간의 실수나 하자를 나중에 발견하고 번역만 수정한 것입니다. 초기에 하느님이라고 표기되었을 때에도 성경의 하나님은 여전히 초월자(超越者)와 내재자(內在者)를 겸한 절대자였을 뿐입니다.

 

‘엘’이라는 단어는 당시 중근동에 신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나 다름없었기에 자연히 히브리인들도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용하고 또 자기들 이름에 붙인 예들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그들의 신앙 자체가, 더 정확하게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가나안 신들의 신앙과 같다고 비방할 수는 없습니다. 한 때 성경에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고 해서 개신교 신앙이 다른 모든 종교와 심지어 미신과도 같다고 비방하는 것과 같은 오류입니다.

 

그럼에도 구약에서 ‘엘로힘’은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그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우상, 다신교에서 차용한 어떤 신, 여러 부족신들 중의 하나로 격하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약성경이 당시 사람들의 영적 수준에 맞춘 계시이자 또 이스라엘의 죄악에 찌든 모습은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이 역사한 것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성경해석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구약성경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배교와 하나님의 너무나 엄격해 보이는 심판의 상관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이후에 여호와만 섬기는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와 함께 애굽, 가나안, 바벨론 등의 여러 우상들을 함께 숭배하는 혼합 신앙을 가졌음을 구약을 읽을 때에 잊어선 안 됩니다.

 

출애굽 직후의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에서부터 그들의 영적 간음은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는 사백년 간 이미 애굽 신들에게 오염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방황하는 내내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고대에는 고기는 주로 신전에서 도축했으므로, 그립다는 타령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또 그래서 성경은 출애굽시킨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잊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신들을 함께 숭배했던 이유를 그들 스스로 고백한 내용까지 나옵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렘44:17,18)

 

애굽, 가나안 족속들, 바벨론 등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민족들은 거룩하게 사는 것은 전혀 관심 없었습니다. 오직 이 땅에서의 안락과 쾌락만을 추구했기에 그 신들도 그것을 보장해주는 신탁만 행했고 실제로 그 제사도 화려 장엄했고 사치스런 음식을 풍성히 나누었고 음주가무가 따르며 음란한 성행위로 마쳤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방제사의 화려한 모습에 현혹되었고 또 그들의 현실적 삶이 더 풍성해 보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직 돈만이 인생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무미건조하게(?) 거룩하게 살 것만 요구하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랐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와 여건을 조성한 것이 잘 알다시피 솔로몬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수여하신 거룩한 율법을 기왕에 소지했고 그대로 제사들을 지내며 또 수시로 선지자들이 회개할 것을 선포하니까 두려워서라도 여호와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문제는 성경이 그런 사실을 기록했다고 해서 즉, 이스라엘이 혼합신앙을 가졌고 하나님의 이름에 이방 종교적인 흔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을 갖고 구약의 하나님이 다신교를 인정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거듭나지 못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하게 사는 교인들이 많고 공개적으로 온갖 부정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지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에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구약의 하나님만큼 자비로운 분은 없다.

 

구약의 하나님은 원시적 종교의 신들보다 더 잔인하고 냉혹하다는 비평은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자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의 하나님만큼 자비가 넘치는 신은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제 책 “그런 예수는 없다”의 3장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 잔인하신 하나님- 가나안 정복 이야기에서 일부 변증을 해놓았으니 따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가나안 족속을 당장 진멸하지 않고 그 죄악이 흘러넘쳐 당신의 인내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창15:16) 도리어 당신의 백성들은 사백 년이 넘도록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되는 고난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진멸을 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가나안 정복 후에도 이스라엘더러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동족과 같은 대우를 해주라고 율법에 명시해놓았습니다.(레19: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신7:2) 하나님은 천천히 쫓아낸다고 했고 이스라엘더러도 급히 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것이 인종청소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진멸하라는, 더 정확히는 그 죄악에 절대로 물들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사기 시대는 어떠했습니까? 당신의 백성들의 타락이 당신의 인내의 한계에 이르자 이방족속들을 사용해 이스라엘부터 징계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따지면 이방 족속은 큰 복을 받은 것이고 이스라엘은 엄청난 참극을 당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잔인한 분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당신께 도움을 청하면 곧바로 가장 적합한 사사를 보내어 구원해주었습니다.

 

그 후 왕국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당신을 거역 배교하고 우상숭배까지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연속된 타락의 기록인 동시에 그럼에도 끝까지 기다려주고 용서하고 또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역사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윤리적 타락 때문에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징벌과 심판의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원인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인 당신 외에 다른 신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서 진정으로 돌이키면 곧바로 징계를 멈추었습니다. 심지어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다시 회복할 것을 약속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수도 없이 잘못한 이스라엘을 수도 없이 용서해주신 구약의 여호와야말로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신약의 예수님과 자비라는 측면에서도 단 한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십자가복음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 출애굽 시키고 율법을 수여하고 외적에게서 구하는 등의 너무나 큰 사랑을 계속해서 베풀었습니다. 율법에 드러난 당신의 뜻에 순종하여 당신을 주인으로 삼는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복을 주기에 앞서 하나님 당신이 어떤 분인지, 인간을 어떤 사랑을 대하는지 온 열방 앞에 드러내기 위한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이 우상숭배였다면 구약시대에도 십자가 복음으로만 죄인을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만 짓지 않으면 심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들 전부가 예수 십자가 사랑을 예표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도 그렇고 예수 십자가 복음도 다른 모든 죄들은 용서해도 하나님 당신을 거역하는 죄는 사함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원시복음(창3:15)이 그런 계시의 출발입니다. 그 언약은 점진적으로 구체화 됩니다. 아브라함으로 여호와를 열방에 전파하는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는 약속(창12:1-3)과 그것을 확장하여 믿음으로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까지 하셨습니다.(창15장)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후에는 제사장 나라로 세울 것이라는 피의 언약까지 맺었습니다.(출19:3-6)

 

그 언약의 완전한 실현은 유다 가문과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구원자의 영원한 통치로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삼상7:12-16) 이사야를 통해서 오실 그 메시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예언하셨고(사53장) 예레미야에게는 구원이 성령의 간섭으로 죄인의 영혼에서 이뤄진다는 약속까지 하십니다.(렘31:31-34)

 

이처럼 구약성경 곳곳에는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십자가구원의 진리를 다각도로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계시해 놓았습니다. 구약성경은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할 이유와 배경을 설명한 책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일과 그 의미와 인류에게 최종적으로 이뤄질 일들을 밝혀 놓은 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당신의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뤄나가셨습니다. 인간의 영적인 수준과 실제 현실생활상에 맞추어서 구원의 경륜을 조금씩 밝혀 나가다가 때가 차매 여인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구원의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갈4:4)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은 십자가 구원진리를 당신의 백성들이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당신께서 시각화(視覺化)하신 작업입니다

 

믿음의 책이냐 지식의 책이냐?

 

구약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해석법 몇 가지를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구약성경이 예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점진적인 계시임을 전제하지 않으면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접근 해석하는 데에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구약에 기록된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어 십자가에 죽여서 인류 구원을 이뤘다는 구속사로 보는 정통 보수주의입니다. 비록 단어 표현 설명들이 상호 모순되어 보여도 진리가 점진적으로 계시된 탓일 뿐이고, 이스라엘이 다신교 신앙을 가졌어도 성경이 아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신앙을 가지라고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난 하나님의 구속 원리에 주목합니다.

 

이와 반대로 구약을 단순히 유대교의 경전이자 이스라엘의 역사일 뿐이라고 간주하는 자유주의 입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출중한 도덕선생이거나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선각자로만 믿습니다. 필연적으로 윤리적 종교적 가르침에 주목하게 되고 또 그러니까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성경을 통전적(通典的)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단어 문장 기록 간에 모순들이 발견되면 그것이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의 하자로 간주합니다.

 

그들이 그런 주장을 내세우게 된 동기와 목적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히려 그들이 부분적, 문자적, 학술적으로만 따지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는 일반신자들이 성경을 보면 쉽게 다 볼 수 있는 것들조차 대부분 놓칩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는 성자 하나님으로 영원 전부터 선재하셨음을 확증합니다.(요1:1-15) 신약성경을 통해 구약성경의 계시를 보완 완성하는 예에 해당되는데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복수 명칭도 오히려 삼위일체를 확증하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주 여호와 유일신 신앙이라고 선언합니다. 오직 예수로만 해석의 열쇠로 사용해야만 그 전체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을 말하는 것임을 전제해서 읽으면 어떤 모순과 상충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주 특이한 책입니다. 이미 믿음을 갖고 성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야겠다는 동기로 성경을 보는 자에겐 책이 열립니다. 반면에 구체적으로 정확히 알아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따지는 자에겐 성경은 더욱 문을 닫습니다. 그 본인도 성경의 문자적 불일치 때문에 더더욱 믿어지지 않기에 스스로 자초한 불행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저작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참 신자에겐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역사합니다. 그렇지 않고 머리로 지식적으로 접근하려는 신자에겐 성령이 내주하지 않기에 성령의 조명이 전혀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11/1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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