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던지는 너무나 심각한 질문
마태복음 강해(188)



http://youtu.be/YjZEbjthG3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3-26)


허풍쟁이(?) 예수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온 부자 관원에게 예수님은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자 그 관원은 재산이 많아 근심하며 물러갔다. 그러자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면서 다시 강조하기를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다르다. 얼마가 되었든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리 비유라고 해도 가능성이 제로인 예를 들었다. 낙타는 죽었다 깨어나도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동원한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 지나쳐 허풍쟁이로 오해 받을 만하다. 낙타와 바늘귀 비유의 이런 불합리성을 해결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그중에 설득력과 타당성이 있는 해명이 둘 있다.

먼저 낙타의 헬라어가 카멜로스인데, 배에서 돛이나 닻을 올리고 내릴 때 쓰는 굵은 밧줄은 카밀로스다. 모음의 철자 하나만 다르다. 바늘귀를 아무 연관 없는 동물과 비교하는 것보다는 굵기는 해도 같은 실 종류인 로프에 비교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래서 아마도 성경저자 마태나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수로 오기(誤記)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전히 밧줄은 바늘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약점은 있다.  

고대 성곽에는 항상 크고 작은 문 두 개가 있었다. 큰 문은 주간에 사람, 수레, 가축 등이 통행하는 문이다. 그러다 해가지면 통행금지가 발효되고 대문은 닫는다. 밤중에 특별한 경우에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있는데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엎드려야 겨우 통과할 수 있기에 바늘귀문이라고 불렸다. 이스라엘에선 낙타가 가장 큰 동물로 취급되었는데 등에 혹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땅에 납작 엎드려 기다시피 해야 겨우 통과할까 말까다.

실제로 바벨론 탈무드에도 코끼리가 흔하고 가장 컸으니까 부자가 천국 가기는 코끼리가 바늘귀문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격언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서 전래되는 경구를 인용하여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바늘귀문을 통과하듯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낮아져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이해한다. 이 해석은 구원 가능성이 완전 제로가 아니다. 또 부자 관원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돌아감으로써 영생을 놓친 사건과 연결하면 그 영적 의미도 적절하기에 더 타당성 있는 변증으로 여겨졌다.  

변증이 과연 필요했는가?

지금에 와선 어느 쪽의 변증이 옳은지 아무도 모른다. 약대가 아니라 밧줄일 경우는 모음 하나만 다르고, 바늘귀 대신에 작은 성문을 의미하면 ‘문’이라는 단어 하나가 빠졌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무척 힘들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두 해명으로 본문 내용이 완전히 명확해진 것이 아니라 미진한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제 의견으로는 구태여 그런 해명을 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은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 “심히 놀랐다.”(25절) 이는 단지 크게 놀랐다는 뜻이 아니다. 엄청 크고 위급한 일을 겪었거나,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한 일을 보아서 쇼크를 먹고 크게 당혹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반문했던 것이다. 이 질문은 99.9%가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지 않는가?

만약 예수님이 바늘귀 대신에 밧줄 혹은 바늘귀문에다 비교했다면 제자들이 그렇게 놀라자빠질 리는 없다. “선생님이 과장이 좀 심했어!” 정도로 그치고 그런 양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누가 천국 갈 수 있는지 따지듯 질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이 기사를 마가와 누가도 기록하면서 똑같이 바늘귀라고 표현했다. 성경의 동일하거나 유사한 내용을 그 기록한 형식, 어법, 단어 등을 상호비교해서 비평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마가가 세 공관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저작되었고 마태와 누가는 그것을 참조하여 보완해서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마가가 착오해서 다 같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설령 그 주장이 옳다고 해도, 마태와 누가가 보완기록하면서 이 비유를 접했을 때에 좀 이상하다, 허풍이 심하다고 여기고 다시 더 자세히 알아봤을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누가는 몰라도 마태와 마가는 그 현장에 있었을 텐데 두 사람이 동시에 동일한 착각을 한다는 것은 개연성이 거의 없다.  

제자들이 너무 놀라서 반문하자 예수님은 또 어떻게 대답했는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절) 구원이 인간 쪽의 노력으로 쟁취가 불가능함을 확정적으로 선포했지 않는가?

제자들은 심히 놀랐고 이어서 예수님과 대화한 내용에 비추어보면, 그들은 이 비유를 부자는 천국에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고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의 허풍이 심한 것도 아니요, 사도나 필사자들이 착오로 잘못 기록한 것도 아니다.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해 보인다.

제자들이 심히 놀란 까닭?

당시에 유대인들은 현실의 부귀영화를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간주했다. 그 반대로 나면서 불구이거나 문둥병 같은 불치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겼다. 세상에서 출세하여 권력과 명예와 재물이 늘어나고 또 자식을 많이 낳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은 증거라고 자랑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세 가지의 감사 제목을 갖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남자로 태어난 것과, 율법을 소유하게 된 것을 감사했다. 단지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보고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교제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영적으로 너무 어리석어 보이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21세기의 오늘 날에도 그것도 이단도 아닌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에서 현실의 형통이 하나님 은혜라고 가르치고 믿는 자들이 많다. 아니 작금에는 그들이 주류가 되었다. 현대의 신자들이 본문의 현장에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부자 관원이 근심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고, 또 예수님의 낙타와 바늘귀 비유를 직접 들었을 때에 심히 놀라지 않을 자가 과연 몇 %가 되겠는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삼 년간이나 따르긴 했지만 그들도 뼈 속까지 유대인이긴 마찬가지였다. 현실의 형통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만 간주했고 하루에도 세 번씩 동일한 감사기도를 했다. 그러다 아무래도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겼기에 예수님께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고 요청한 것 아니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전부 지키고, 장로들의 유전을 어긴 적 없으며, 현실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추고서, 불쌍한 자들도 잘 도우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 부자 관원이 천국 문에 가장 가까이 서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오히려 그는 천국 문에서 가장 멀리 서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럼 과연 누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당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자가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받았는가?  

어떤 명제나 진술이 진리가 되려면 그 역(逆)의 역도 진리로 성립해야 한다. 쉽게 말해 1+1=2가 진리가 되려면, 그 역인 2-1=1도 진리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99.9% 어려운 것이 성립되려면, 그 역인 가난한 자가 천국 가는 것도 99.9% 쉬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뜻이 결코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가 되려면 아무래도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부정한 방법도 동원하는 등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윤리적으로 책망하려는 뜻도 아니다. 가난한 자라도 장발장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을 넘지 않는 자가 없다. 도덕적 죄로 따지면 모두가 오십 보 백 보다.

예수님의 뜻은 현실적 부자와 가난이 구원을 결정지을 요소가 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받은 증거도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뼈 속까지 스며있는 구원관이, 또 하루에 세 번씩 하는 그런 감사 기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지적한 것이다.  

간혹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므로 어쨌든 부자가 된 것 안에도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있다고 반발한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인간사를 다스릴 때에 당신께서 계획과 뜻을 가지고 기쁘게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경우와 단순히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수동적으로 묵인 허용하는 두 경우가 있다. 이중에 후자를 모르거나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서로 다른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은 성실히 공부하여서 정상적이고도 의로운 직업을 택하여 남을 도우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떳떳하게 살기에 부모도 그를 기뻐하고 자랑하게 된다. 다른 아들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사기, 투기, 탈세 등으로 큰 부자가 되어서 떵떵거리며 살아도 부모로선 다 큰 자식 야단칠 수 없고 말려도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아들이 망하게 방해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떳떳하고 의롭게 살려는 신자의 인생은 당신의 특별한 계획과 뜻을 가지고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주도하신다. 반면에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자의 삶은 그냥 그대로 방관할 뿐이다. 혼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버니까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만약 후자의 경우마저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하시므로 그분의 은혜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 주장의 깊은 속내는 떳떳하게 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것이다. 또 그렇게 도와주는 하나님만 찾고 따르겠다는 심보다.    

따라서 본문에서 정작 따져봐야 할 사항은 부자가 천국갈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사람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이다. 당연히 구원을 주는 일인데 무슨 그런 간단하고 빤한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하나님만이 구원을 주실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면 몰라도 당시 유대인들은 구원을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부자 관원이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온 것 자체가 자기가 구원을 주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 아닌가? 예수님 말씀의 더 깊은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생의 길을 물은 두 관원

성경에는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온 두 관원의 기록이 있다. 둘 다 당대에 재물, 권력, 명예를 다 갖춘 자였다. 최고의 지성인이자 종교인으로서 상위 0.1% 안에 드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심히 놀랍게도” 둘 다 예수님이 제시한 영생의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먼저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엄마의 태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지 당혹해했다(요3장). 또 부자 관원에게는 살펴본 대로 주님은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서 당신을 좇으라고 하자 재산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럼 예수님의 이 두 대답의 내용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당연히 같은 것이다. 결코 다를 리도 없고 달라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마다 구원의 길을 여러 가지로 제시해 당혹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구원은 동일한 한 가지 길 뿐이다. 그 같은 길을 각자가 현재 처한 상황과 영적 실상에 맞추어서 인간 이해 수준으로 낮추어서 말씀했을 뿐이다.  

둘 다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부자 관원의 경우는 성경에서 더 이상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구원을 받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나중에 공회가 예수님을 잡아 죽일 모의를 하자 피고인의 변론도 듣지 않고 판결하는 것은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변호했다.(요7:50) 율법을 가르치는 자가 오히려 율법을 위반한다고 따진 것이다. 또 십자가 사건 이후 그 비싼 몰약과 침향을 무려 백 근이나 갖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도왔다.(요19:39) 성경이 이런 사실을 기록한 것에 비추어 그는 구원 받았음이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

현실적으로 동일한 조건을 가진 두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의 정반대로 나뉜 이유는 무엇인가? 둘 다 예수에 대해 살인모의를 하는 산헤드린의 동료 관원들의 눈치를 무릅쓰고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었지 않는가? 영생에 대한 소망을 넘어 열망을 가진 자들이었지 않는가?

부자 관원의 경우는 하나님 앞에도 떳떳하게 서고 싶고 세상에서도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특별히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려 든 것이다.

니고데모의 회심(回心) 경위

니고데모 또한 처음에는 즉,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 못하고 돌아갔을 때만 해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영생의 길에 대해서 너무나 궁금해졌을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 나야 하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계속 그 의미를 탐구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유심히 계속 관찰했을 것이다.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통달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주로 유대사회에서 완전 소외되어 멸시 받아 눈물과 한숨과 고통으로 지새는 사람들과만 교제하며 치유하고 가르치는 모습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러니까 공회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변호할 수 있었지 않겠는가?

그러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을 목격했을 것이다. 세상에선 어떤 악한 짓도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위해 오직 선만 베푼 정말로 양 같이 순하고 깨끗한 그분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이 도리어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 그럼에도 그분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죽으셨다.  

비로소 그는 이사야서 53장에서 예언한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수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주님이 자기를 죽음으로 내몬 유대종교 권력자들마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잘못을 범했다고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때까지의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 그는 부자 과원과는 달리 그 둘이 절대 병행, 공존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당신 앞에서 떳떳해지려면 세상에서의 떵떵거림은 포기하라고 해서 당신께 무조건 모든 것을 바치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영혼이 더럽고 추하게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죄인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생성되는 모든 것들이 더럽고 추할뿐이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자신도 그 중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당장에 역사상 가장 사악한 살인 모의를 곁에서 바라보고도 말리지 못했고 간접적으로 동참했지 않는가? 정말로 자신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임을 절감한 것이다. 그 동안 하나님 앞에 선행으로 일등 해서 떳떳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얼마나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큰 죄인지 알게 된 것이다.

유일하고도 동일한 영생의 길

예수님이 부자 관원과 니고데모에게 영생의 길로 제시한 것은 똑같다. 아주 간단한 한마디 말씀이다. “당신을 좇으라.”는 것이다. 부자 관원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좇으라고 했다. 그렇게 구제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예수님과 전 재산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물었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사역과 가르침의 현장에 직접 참여는 하지 않았어도 주님을 줄곧 지켜봤다.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십자가 사건에 이르도록 자기에게 제시해 준 영생의 길과 연관해서 묵상했다. 그도 분명히 예수님을 좇았고 그래서 영생을 얻었던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대답도 동일한 뜻이다.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 죄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성령이 한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본질이 바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구원 받지 못할 죄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도 구원의 길로 “나를 좇으라.”고 답해주셨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좇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두 관원 다 구원의 길을 물으러 왔다. 구원의 방법을 가르쳐주면 그대로 따라서 하나님의 합격 점수에 들겠다는 뜻이었다. 인간의 공적과 자격과 능력으로 자신의 주홍 같은 죄를 양털처럼 희게 해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오직 십자가 어린 양의 피의 공로와 의에 의지해서 그분 앞에 설 수 있을 뿐이다.  

누가 구원 받고 안 받고의 최종 결정권은 어린아이도 알다시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 그런데 구원의 길이 어떤 길인지 가르쳐 달라고 묻는 것은 구원의 과정을 인간이 선택, 판단, 결정하여 자기 능력으로 수행하겠다는 뜻이다. 예수님 그분을 좇는 것이 아니다. 부자 관원은 처음 물으러 왔을 때의 그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예수님의 참 뜻은 당신을 따르라는 것인데도 자기 생각에는 전 재산을 팔라는 것이 구원의 길로 여겨지자 자기 능력 밖이라고 여기고 근심하며 돌아간 것이다.  

니고데모는 구원의 결정권은 물론이고, 구원의 과정마저 인간이 판단 결정 참여 수행할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교만인지 알게 된 것이다. 구원의 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의의 공로다. 다른 어떤 것도 구원의 길, 영생의 소망이 될 수 없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의 실체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빈털터리가 되어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결단하고 헌신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결코 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실감하듯이 그렇게 실천하는 것은 아직도 까마득하다. 처음에 생각을 바꾸는 것조차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바꾸어 주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믿을 계획도 생각도 없었고, 꿈도 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과 원수가 되어 살고 있었다.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 쳤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자랑했다. 하나님 앞에서도 얼마든지 떳떳하다고, 스스로 떳떳해질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전혀 짐작하지, 아니 꿈도 꾸지 못했다. 이 어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인간이 구원의 방법을 안다고 해서 온전히 실행할 수 없다. 항상 강조하듯이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조차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필요도,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이유가 하등 없다. 또 니고데모나 부자관원 같은 세상에서 상위 0.1%의 최고 의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너무나 당연한 구원의 교리를 다시 풀어 설명하려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이며 소중한 일인지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어 대속 사역을 완성한 것뿐 아니라, 나의 구원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당신의 은혜로 그분이 주관하셨다는 것이다.

부자 관원도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제자들이 심히 놀랬듯이, 바로 그런 경이함과 당혹함으로 우리가 구원 받은 사실에 심히 놀라야 한다. 하나님이 어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셨는지 저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놀람과 당혹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저에게는 도무지 그럴 수 있는 자격과 의와 공로라곤 하나도 없기에 평생을 두고 감사해야 한다. 하루에 세 번씩 유대인 같은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감사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늘의 영광으로 이끌 것을 계획하시고 우리를 예정하여 선택하셨다. 하나님을 내 눈 앞에 실제로 보여야만 믿겠다고 반발할 때에도, 정말로 하늘에서 번개를 내려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그런 완악한 말을 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따뜻이 지켜보고 계셨다. 구원의 과정마저 그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신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바꾸어주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만이 인생의 소망, 목적, 위로, 기쁨, 안식, 만족, 평강이 되게 해주신 것이다.

구원의 전 과정을 주관하시기에 태초부터 우리를 예정하셨다. 또 그러기에 반드시 당신이 계획하신 그 영광의 자리까지 그분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 진리의 역(逆)의 진리는, 우리가 현재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욥 같이 도무지 이해도 안 되는 고난 가운데 있어도 그런 영광으로 가는 필수코스 위에 있다는 뜻이 된다.

예수님이 당신을 좇으라는 것이 천국의 구원을 주시려는 것만이 아니다. 이 땅에서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교회에 나가 기독교적 규범을 따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우리가 부자 청년의 자리에서 니고데모의 자리로 옮기워졌다는 것이다. 부자 관원은 재물이 다 없어지면 걱정거리가 많아질 것을 염려했지만, 니고데모는 그 반대로 재물이 다 없어져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과 권능 안에 있기에 오히려 걱정거리가 없어진다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그 비싼 몰약과 침향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당신께 무엇이든 다 바치라고 요구하시자 않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계획하신 영광의 자리로 이르게끔 당신께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주도하시기에, 또 그래서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에서 한 순간도 벗어나게 놓아둔 적이 없으므로, 무엇이든 감사하며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소유하는 모든 것이 없어져도 예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낙타와 바늘귀 비유로 오늘 날의 신자들에게도 너무나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계신다. 네가 세상에서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가? 아니면 그것들이 다 없어져도 당신을 좇아 하늘의 거룩하고 신령한 위로와 은혜를 누리며 떳떳하게 살고 싶은가? 둘 중 어느 것을 따를지 묻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그 질문은 처음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때에 사실은 이미 통과한 질문이다. 그보다는 네가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 것은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살겠다고 벌써 결단했으면서도, 왜 아직도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10/6/2013


사라의 웃음

2013.10.07 22:15:12
*.109.85.156

아멘. 종교적 열심과 특심, 최선의 선한일, 사회적 종교적 지위와 명성...들을 두루 갖춘 자의 고뇌에 단호히 대답하시는 예수님.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또 놀라는 제자들의 고정된 사고.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을 자가 들어갈 수 없다라 말씀하시는 의미를 정말 세밀히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생은 사람의 노력과 열심으로 될 수 없기에 오신 예수님. 어느 누구 하나 세상을 향해 탐욕스럽지 않은 자가 없기에, 종교적 탐욕까지도 어쩌면 종교적 열심이라 스스로 만족하며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조건이라 여길 수 있는 이런 인간들의 어리석은 부요의식들... 그러기에 오셔야만 했고 그 죄 대신 감당해 주셔야만 하신 예수님, 그렇게 구원받았음에도 여전히 탐욕으로 세상의 명예에 또 고개짓하는 이런 모습까지도 다듬으시고 고쳐가시는 아버지의 수고로우신 손길이 너무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운영자

2013.10.08 00:56:27
*.205.40.53

한가지 참고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에 올리는 설교문은 녹음한 그대로 녹취해서 타이프 한 것은 아닙니다.

대면설교는 제스쳐, 표정, 감정까지 의사전달에 동원되고
제한된 시간 안에 효율을 높이기 위해 생략, 단축, 반복의 기법을 동원하고
때로는 그 순서가 뒤바뀌거나 잊어버려 누락되는 구절도 생깁니다.

전체 대의를 전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으나
구체적인 면에서 자칫 오해나 이해 부족이 발생할 수 있기에
설교 텍스트는 항상 내용을 조금씩 보완 수정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0^

,김승태

2013.10.10 03:47:02
*.197.121.10

운영자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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