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강해(194)



http://youtu.be/7wxKNidYDUY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마20:29-34)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여리고에서 두 소경을 치유해주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와 누가는 장님이 한 명이라고 했고, 특별히 마가는 바디매오라고 이름까지 밝혔다. 이런 차이를 성경의 오류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한 명이나 두 명이나 치유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니까 대충 넘어가라는 뜻이 아니다. 마가나 누가는 그 두 명 중에 소리를 지르며 간구한 한 명에게 더 관심을 가졌던 것뿐이다.

그보다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칭찬했다고 기록한 반면에 마태는 그런 언급이 없음에 주목해야 한다. 또 누가는 이 치유를 곁에서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했는데 반해, 마태는 예수님이 그 소경을 민망히 여겼다고 예수님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를 네 권 소지하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한다. 상호 비교함으로써 이런 상이한 기록들이 결코 오류가 아님을 합리적으로 변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더 정확하고도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강조하는 포인트가 각기 다른 네 명의 저자를 함께 만날 수 있다. 비유컨대 어떤 영화를 한 명의 비평보다 네 명의 비평을 참고하여 보면 놓치는 의미가 없어서 더 재미있고 이해가 잘 되는 것과 같다.

끈질긴 믿음이 좋은 믿음인가?

우선 소경의 믿음은 예수님이 칭찬한대로 대단했다. 단순히 끈질겼다는 점보다 무리가 야단쳤는데도 큰소리로 간구했다는 면에서 그렇다. 유대인들은 불구자를 문둥병자처럼 부정한 자로 간주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자로 여기고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예수님 일행도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재차 소리 질러 끝내 치유 받았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밤새 씨름하면서 복을 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끝까지 붙든 믿음과 방불하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특별히 사람이 이해도 못하고 오히려 비난하고 핍박하는 그런 상황에서라도 하나님만 믿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정말로 이런 끈질긴 믿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그런데 당시의 그 소경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가 눈을 뜨고 싶은 것은 평생의 소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은 포기한 소망이다. 나면서 소경의 개안수술은 지금도 불가능하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랍비가 앉은뱅이, 귀머거리 같이 나면서 불구자를 손만 얹고도, 아니 말씀만으로 완전히 고쳐주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비로소 나을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다.  

마가는 그를 “소경 거지”(막10:46)라고 말한다. 랍비를 만나러 갈 여행 경비도 없고 데리고 가줄 사람도 없다. 도무지 그 랍비를 만날 재간이 없는 차에 마침 자기 동네를 방문했고 또 구걸하려고 앉아있는 바로 그 길 앞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있을 바보는 없다. 믿음과 무관하게 죽기 살기로 고함을 지르며 간구할 것이다. 시쳇말로 밑져야 본전  아닌가? 누구라도 절박하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불신자도 병원에서 포기한 말기 암이면 기독교의 기도원에 기적을 바라고 찾아 간다.

야곱이 여호와의 사자와 밤새 씨름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날이 새어 강을 건너면 자기를 죽이려 눈이 벌건 형 에서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잘 돌아가는(?) 머리로 형에게 선물 보따리를 잔뜩 앞서 보냈지만 소문들 듣자하니 형도 이미 상당한 거부가 되었다니 과연 그 선물 공세가 먹힐지 두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에서는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아브라함이 조카 룻을 구하려고 가나안의 다섯 왕과 싸울 때에도 비록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과  연합했지만 집에서 기른 318명을 데리고 갔지 않는가? 당시 4백 명이라면, 특별히 개인을 상대로 해선 상당한 군대다. 야곱도 시종들이 있었겠지만 그 정도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비무장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형제끼리 싸워서 서로 죽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보호를 죽기 살기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두 소경의 믿음을 의심하거나 비하하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의 본질이 강인한 의지력이나 인내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칫 강하고 끈질긴 믿음만 강조하다 보면 고난을 당해 오래 동안 눈물로 울부짖으며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내 믿음이 소경 바디매오보다 못하고 약한지 자책감만 든다. 이는 믿음을 잘못 이해, 적용한 것이다. 끈질긴 믿음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올바른 믿음이라야 끝까지 견딜 수 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間隙)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이 소경의 믿음을 칭찬했다고 한다. 마태는 장님을 민망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동일한 인물을 두고 정반대의 평가를 했을 리는 없다. 믿음이 있긴 있으되 뭔가 부족한 측면이 있어서 민망했거나, 아니면 믿음 외의 다른 차원에서 민망했다는 뜻이다. 또는 둘 다일 수 있다.  

이 사건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고난 주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마무리 짓되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연결해 강조해서 가르치고픈 사항이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이후로 일관되게 강조했던 주제가 무엇이었는가? 천국에서 누가 큰가?,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주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는 누구의 몫인가?, 등등이다. 주님은 낮아지라, 종이 되어라,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라고 했다.

그런데도 지금 무리들은 소경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도리어 야단쳤다. 그 무리들 중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열두 제자들이라도 무리더러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어야 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큰 무리는 지금 유월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그들은 아마도 제자들로부터 우리 스승이 이번에는 아주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켜 주리라 믿고 모두가 들떴던 것이다. 이런 중차대하고 시급한 일을 하러 가는데 부정한 소경 둘이서 예수님을 성가시게 굴고 시간을 지체시킨다고 야단을 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않고 고쳐주셨다. 그러자 무리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바로 이 유월절에 하나님이 모세 같은 선지자를 보내어주셨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행했던 것처럼 로마를 상대로 십전십승(十戰十勝)을 거두게 해주리라 믿었기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절로 나온 것이다. 또 고침을 받은 두 소경도 그 무리와 함께 예수를 좇은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머릿속에 생생한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가? 정말로 예수님은 출애굽 전날 유월절에 이스라엘 사람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처럼 세상 죄를 지러 오셨다. 반면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날 밤 애굽의 장자를 진멸한 죽음의 사자로 간주했다. 자기들도 애굽에서처럼 로마의 금은보화를 싹쓸이 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동상이몽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간극이 얼마나 심대한지 짐작이 되는가?  

세상의 단 한 명도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자가 십자가에 죽는다니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겠다는 예언도 죽기 전보다 더 크고 신비한 능력을 갖고 로마를 무찌르겠지라고 밖에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철두철미 혼자만의 고독한 순례를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끈질긴 믿음과 예수님의 민망함

예수님이 소경들을 민망해 여긴 까닭은 물론 그 동안 눈을 못 봐 고생하고 또 사람들로부터 멸시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긴 것은 소경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은 큰 무리와 제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모른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단계에선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으리라 예수님이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 야단쳤을 것이다. 주님이 아무 야단도 않은 것은 그들이 알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사자와 씨름하여 복을 받은 야곱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창32:28)는 영광스런 뜻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였다. 그런데 그는 불구자였다. “환도 뼈가 위골(違骨)”(창32:25)된 절뚝발이였다. 그 진술을 유대의 관습적 표현이라 치면 더 이상 출산을 못하게끔 생식기능이 정지된 것이다. 이래저래 불구자이긴 마찬가지다. 지금 장님을 불구자라는 이유로 부정하다고 멸시하면, 자기 선조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자요 자기들도 그 후손이라는 뜻이 된다. 스스로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이자,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떠나 인간적 윤리로도 말이 안 되는 짓이다.

예수님이 소경의 믿음을 칭찬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윗의 자손”이여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우선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바디매오는 들려오는 모든 소문을 종합해보니 예수가 메시야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또 자기 눈을 뜨게 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했다. 자신의 소원이 단순히 눈을 떠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자로 낙인찍혀 온갖 비방과 멸시를 당했다는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동안 습관이 되어서 참아낼 수밖에 없었고 지금 단계에선 그런 것들에 대한 반발도 벌써 포기했었다.  

그러나 성전제사에도 참여 못하니 과연 자기가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정말 메시야라면 자신의 구원 여부를 확인해 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눈을 뜨게 되면 자신의 부정함은 씻어지고 하나님 사랑에서 제외된 것이 아님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소경은 지금 자신의 지난 세월 전부를 주님 앞에 내려놓은 것이다. 자신의 인생과 존재 전체에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외면해도 당신만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한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자기를 건져주실 분은 다윗의 후손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새벽 기도마다 끈질긴 믿음으로 간구하는 믿음이 과연 이런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끝까지 기도할 필요도 없다. 의지력과 인내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자신의 영적인 실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전부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않는 기도다. 예수님이 자기 일을 이루는데 돕는 조력자(helper)일 뿐이지 나의 구세주(Savior)가 아니다. 바디매오 같은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다.    

야곱이 절뚝발이가 된 까닭

끈질긴 믿음의 대명사인 야곱의 경우는 어떠한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려는 목적이 에서에게서 빼앗은 장자권으로 번창하며 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에서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계승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지난 20여 년간 형 에서에게서 도망을 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온갖 고생을 하는 동안에 현실의 형통과 영혼의 만족과는 아무 연관이 없음을 절감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기어이 얍복 나루를 지나 위협을 무릅쓰고 형 에서와 대면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에서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언약에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고 온 천지를 유랑하는 한량이었다. 장자권을 에서가 차지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가문에서 떠나는 큰 불행을 맞을 것을 야곱은 알았던 것이다. 형을 속여서라도 자기가 가문을 이끌기로 한 것이다.  

만약 내일 강을 건너 에서를 만나도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여전히 자기에게 유효함을 재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지난 모든 잘못을 형에게 사죄하여 용서받아 관계를 회복하고 아버지를 속인 죄도 하나님께 용서 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전에 고향을 떠나올 때에 베델에서 하나님이 만약 다시 고향으로 돌려오게 해주시면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고 오직 여호와만 증거하며 살겠다고 서약한 것을 지키고 싶다는 뜻이었다. 자기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확실히 거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장해달라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것이다.    

야곱이 자기를 복 주기 전에는 죽어도 보내주지 않겠다는 이유가 아브라함의 언약 때문임을 여호와의 사자도 알았다. 야곱은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어서 여호와를 증거하는 그 일을 하지 못한다면 자기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또 그래서 어차피 형 에서에게 죽느니 차라리 여기서 하나님께 벌 받아 죽는 것이 낫다고 사자를 물고 늘어진 것이다. 어찌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름을 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호와의 사자가 힘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씨름에 이기려 비상수단으로 환도 뼈를 위골시켰겠는가? 아니다. 일부러 져 준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사람과 겨루어 능력이 모자랄 리는 절대 없다. 야곱의 믿음을 인정한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의 끈질긴 의지력에 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목숨 걸고 거하겠다는 신앙에 져주었던 것이다.  

대신에 인간 생명의 근원이자 활력의 상징인 생식 기능을 손상시켰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야곱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자에게 자기 능력으로 이긴 줄 착각하고 교만에 빠질 것을 예방하고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오해할 소지를 제거한 것이다. 그가 남자로써의 기능을 하지 못할 때마다, 혹은 다리를 절뚝거릴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음과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높으심을 기억할 것이다. 나아가 베델에서의 서약한 내용을 회상하고 다시 다짐하며 실천했을 것이다. 야곱의 인생은 얍복강 나루의 그날 밤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진정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육적인 선조뿐 아니라 영적인 선조도 된 것이다.  

본문의 큰 무리는 물론 제자들마저 자기들 선조 야곱이 불구자였음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큰 뜻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나아가 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는 근원과 통로가 되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수행할 의사도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을 로마의 위치와 대체하여 세속적으로 최강국이 되는 것만이 목표였다. 주님이 세울 영적인 나라와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반면에 현실에서 육체적으로는 예수님의 등을 떠밀어 앞장세우고 바로 그 등 뒤에 따름으로써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기들이 최고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으며 또 최고의 정성을 들여 찬양을 드린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정상인 그들은 영적 소경인 반면에, 자기 존재 전체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소경은 육체적으로는 불구임에도 영적으로는 이미 눈을 뜬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칭찬의 뜻이었다.  

다른 한 명의 소경의 운명은?

마태는 소경이 두 명이었고, 마가와 누가는 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그 한명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 다른 한 명의 소경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소경 거지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유대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부정하다고 상종도 않는데 이름이 있은들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이름을 알려고도 않을 것이다. 이름이 밝혀졌다는 것은 유대 공동체 안으로 수용이 되었다는 뜻이다. 눈을 뜨자마자 즉, 그 부정함이 씻어지자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지 않는가?

그럼에도 다른 소경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이 되지 않았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틀림없이 일주일 만에 주님을 등지고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쳤던 유대 군중에 참여했을 것이다. 소경이었던 자기를 고쳐준 그 은혜를 까마득히 잊고서 말이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이었던 자가 성령의 은혜로 고침을 받으면 그런 자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거나 최소한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돕는 일을 한다. 그런데도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고된 시어머니 밑에서 고생했던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고된 시모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지금 자기들의 선조가 불구자인데도 그 후손들은 소경을 멸시하는 모습과 똑같이 말이다. 그렇게 멸시 받던 다른 장님도 치유를 받자 언제 그랬던가 싶게 예수님마저 외모로 판단하여 차별했다.    

반면에 바디매오는 틀림없이 초대 교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을 것이다. 훨씬 뒤에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핍박도 견디어냈을 것이다. 그는 재산, 가문, 학벌, 권력, 외모 같이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사회적 지위와 그 인간 자신과는 전혀 별개임을 알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봉사인 자기를 취급하는 것과 실제 자신과는 전혀 다름을 스스로 절감했지 않겠는가? 또 하나님은 그런 것들로 당신의 사랑을 베푸는 데에 어떤 제약이나 방해를 받지 않음을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부터 하나님의 그런 사랑이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불쌍한 존재임을 알았다.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이도 목자 없는 양처럼 길을 잃은 불쌍한 양임을 보았기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길 빌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만 붙들었고 그 사랑을 증거하며 주위에 나눠주는 일에 여생을 걸었던 것이다. 그가 순교했는지까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분명 올라갔기에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끈질긴 믿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직전에 강조해서 가르치고 싶었다면 십자가 구속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라는 뜻이 된다. 유월절을 지키려 올라가는 그 큰 무리는 물론 제자들마저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그 의미마저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언약을 당신께서 직접 이루시려 한다. 이스라엘로 열방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해서 하나님의 복을 주변에 나눠주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민족보다 형통하고 강력해지는 모습으로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고 그 사랑을 실제로 누림으로써 자기가 경험한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라는 것이다. 정말로 자기 목숨까지 다른 이를 위해 내어줌으로써 다른 이를 살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을 나눠주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실현하는 일만이 모든 인간과 모든 민족이 정작 누려야할 최고의 복이라는 것이다. 육신적으로 눈을 잃거나 고자가 되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육신이 멀쩡하면서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는 것만큼 인간으로써 큰 불행과 비극이 없음을 다른 이로 알게 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바디매오가 가졌던 끈질긴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인가? 끝까지 소리 지르며 간구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인가? 물론 맞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끈질긴 믿음의 결과일 뿐이다. 정작 끈질긴 믿음은 그가 끝까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증거한 믿음이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후손을 통해서 실현시키려는 그 일을 위해서 자기 재산과 생명을 다 바치는 그런 믿음이다.

한마디로 끈질긴 믿음이 자기 일을 끝까지 해결하려는 끈질김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이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반드시 이뤄지기를 소원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도록 끈질기게 간구하며 목숨까지  내려놓는 믿음이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자기처럼 불쌍한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로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새 사람으로 바꿔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사랑 안에 붙들어 주시어 예수님과 교제 동행케 하는 인생 최대의 복을 실제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신자를 그 자리에까지 반드시 이끌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이런 끈질김이 아니라, 자기 의지력과 인내력을 최고치로 끌어 올리는 끈질긴 믿음으로는 절대로 바디매오 같은 기적을 맛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11/17/2013


국중후

2013.12.14 11:25:59
*.243.238.62

신자가 천하보다 귀함을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것 조차도
은혜만이 오직은혜만이 ...오직주님의 은혜만이....
오! 할렐루야!
나를 신자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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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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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9:21-27) 야곱보다 더 영악한(?) 하나님 [1]

(창29:21-27) 야곱보다 더 영악하신 하나님 야곱 바로 알기 (1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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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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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거룩해진 신자들(레위기강해#3-레11:44,45)

이미 거룩해진 신자들. (레11:44,45)(창2:2,3) 구약성경강해(3) / 레위기강해(3)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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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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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11-14) 아버지를 죽여버린 둘째 아들

(눅15:11-14) 아버지를 죽여버린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4)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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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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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0:22-26) 하나님을 최고로 모독하는 죄 -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6)

(출20:22-26) 하나님을 최고로 모독하는 죄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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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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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다고 모세를 꾸짖은 이유(민수기강해#30-민20:12,13)

(민20:12,13) 믿음이 없다고 모세를 꾸짖은 이유는? 구약성경강해 (40) / 민수기강해 (30)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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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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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에 상복(喪服)을 입는 신자들(레위기강해#10-레24:10-16) [1]

(레24:10-16) 주일예배에 상복(喪服)을 입는 신자들 구약성경강해(10) / 레위기강해(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그 이스라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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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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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1-7)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8)

(고전 13:1-7)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8)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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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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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6:10-13) 인생을 정말로 자유롭게 살려면?

(눅16:10-13) 인생을 정말로 자유롭게 살려면? 돌아온 탕자 시리즈 (13)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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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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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는 교회에 무엇을 기대하는가?(행3:1-15) [1]

November 19, 2017 Morning Sermon from Kirby Woods Baptist Church on Vimeo. Vinson 목사님께서는 사도행전 3장 말씀을 “What Memphis and Shelby County has a right to expect from Kirby Woods” 주제를 통해 전해주셨습니다. 멤피스와 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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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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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9:28-30) 인류 역사를 이끄는 하나님의 목적 -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8)

(요19:28-30) 인류 역사를 이끄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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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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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에 부자가 설 자리는 없다.(민수기강해#42-민26:52-56)

(민26:52-56) 하나님의 일에 부자가 설 자리는 없다. 구약성경강해 (52) / 민수기강해 (4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 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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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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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거역하는 게을러빠진 신자들(민수기강해#21-민14:39-45)

(민14:39-45) 그래도 거역하는 개을러빠진 신자들 구약성경강해 (31) / 민수기강해 (21)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11)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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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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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3:6-10)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에도 계획을 바꾸는가?

(욘3:6-10)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에도 계획을 바꾸는가? 요나서 강해 (8)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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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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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기 강해 (4)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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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2
  • 조회 수 224

(고전13:4-7)끝까지 참는 사랑의 비결-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9)

(고전13:4-7) 끝까지 참는 사랑의 비결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9)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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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7
  • 조회 수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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