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의 잘못도 아주 크다.
마태복음 강해(197)



http://youtu.be/5Vh7VGyt0b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掘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마21:12-17)


목사의 품위유지 비용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장사치와 결탁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지금도 교회에선 세상과 같거나 더 추한 부정과 사기가 난무한다. 편을 갈라 싸우다가 세상 법정에까지 끌고 가며 결국에는 교회가 쪼개지기도 한다. 가끔 들려오는 목회자의 성적 금전적 스캔들은 우리 귀를 의심케 한다.

이런 일들이 잘못임을 아는 데는 구태여 영성, 종교성, 도덕성이 필요 없다. 그냥 상식만으로도 쉽게 분별이 가능하다. 본문에서도 어리아이들조차 성전을 청소하신 예수님을 찬미했지 않는가?

그런데도 교회사적으로 목회자들과 교회가 동일한 잘못을 끊임없이 범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 표면적 이유일 뿐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생활에 절대 궁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권력과 명예를 좇은 때문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유대 사회 최고지도층이 되어있다. 지금으로  치면 장차관이나 국회의원 급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서있는 경건한 자로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다. 모든 것에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다 갖춘 자들이었다.

구태여 이유를 찾자면 그런 높은 신분과 위치에 있다 보니 그에 합당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많이 필요했을 수 있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대외적 행사가 많아서 교회와 목사의 이름에 걸맞게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것과 동일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품위를 유지한다는 것이 참으로 우스꽝스런 일이 아닌가? 당사자는 그럼으로써 자기 품위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본문에선 아이들의 코웃음을 샀고 지금 세상 사람들은 성직자가 저럴 수 있는가 손가락질 하지 않는가? 과연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품위란 무엇인가? 목사가 자동차의 종류와 연봉의 액수로 품위가 결정된다면 그 얼마나 치사하고 가련한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가 찰 노릇 아닌가?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인간의 마음

출애굽기 28장 전체는 대제사장의 복식(服飾)에 대한 규정이다. 최고의 옷감을 사용해서 정교하게 자수를 놓았다. 가슴의 흉패에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을 붙이고 어깨의 견대에도 보석을 달았다. 세상에는 없는 최고의 옷이요 모자다.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 빌어야 하고 또 백성들을 율법으로 계몽, 교육하는 그 직분이 얼마나 엄청나고 고귀한지 보여주려는 뜻이다. 또 성전 제사 제도를 통하여 이 땅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나 아름답고 은혜롭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그런 아름다운 옷을 입고 행하는 대제사장의 삶과 가르침에서, 또 그 행동은 물론 표정에서마저 여호와 하나님의 빛이 비춰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추하고 더러운 냄새가 진동하여 세상 물정도 아직 모르는 어린이들도 코를 막을 정도가 되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최신 유행의 최고로 좋은 옷을 입었다고 자부할지 몰라도 그 체면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고 지상 최대의 코미디가 되었다. 진짜 코미디는 사실은 비극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할 교회인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너무나 비상식적인 작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 원인은 딱 하나다. 인간은 무엇이 죄인 줄 알고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비참하고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도 이는 절대적 진리다.  

품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목사가 목사답고, 성도가 성도답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자신의 품위를 비상식적 행태로 유지하려니 세상 불신자들의 상식으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정상에서 이탈한 것이다.

정상에서 이탈한 것은 죄다. 목사들이 비상식적 모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것은 죄 중에 있다는 것이다. 유지한다는 것은 그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사실상 죄를 즐기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죄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이다. 죄의 힘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다. 그러니까 영성, 종교성, 도덕성은 물론 상식마저 완전히 마비되었다. 거기다 자신들이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까지 한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모든 사람 위에 더 거룩하고 의로워야 할 제사장과 목사가 이럴진대,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의는 누더기요, 모두가 버러지 같은 존재다. 성경은 그래서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다.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이다. 제사장들이 행한 부정 때문에 성전이 부패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부패했기에 성전에서 강도 같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다.  

제사장들과 공범인 유대 대중

주목할 것은 성경이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마음만 유독 부패하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고 했다. 예수님이 그들만 저주한 까닭은 당신을 대적했을 뿐 아니라, 끝까지 완악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만 의롭다고 고개를 쳐든 교만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벌거벗은 임금님 행세를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지금 벌거벗고 있다고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 주었을 뿐이다.  

호산나, 호산나 찬양하며 주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대중들도 결국은 주님께 배역했다. 똑같은 인간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바꿔 말해 본문의 성전부패 사건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대중들도 공범자였다는 뜻이다.  

당시의 체계나 관습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아이들처럼 그 잘못을 대놓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흠이 있는 제물을 바치고 동족에게 폭리를 취하는 것은 율법이 금지하는 잘못이라고 항의해야 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진정으로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곡히 건의했어야 했다.

혹시라도 만약 그랬다가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 현실적 불이익을 당할까 두렵다면 항의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에 이런 흠 있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으므로 돈이 더 들어도 좋으니 정결한 제물을 달라고 조용히 부탁해야 했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건의하거나 요구한다면 제사장들이 절대 야단치거나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도리어 뭔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다. 백성들의 영성과 믿음이 대단하다고 여기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 아닌가 말이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큰 회사 사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도 장로와 안수집사들이 나서서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 교회 규모가 이만 하면 담임목사도 최하 이 정도 차는 타야한다고 여긴 것이다. 목사도 목사지만 자기들의 체면을 중히 여긴 것이다. 또 목사를 그렇게 잘 섬긴다는 평판을 들으려는 즉, 자기들의 의를 앞세운 것이다. 물론 담임 목사를 성심껏 섬기는 것은 아주 선한 일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런 정도 밖에 미치지 못한다면 너무나 가련하고 비참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죄에 동참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도 죄라고 했다. 거기다 죄를 직접 범하지 않아도 죄가 지속되도록 간접적으로 조장하는 것도 똑같이 죄다. 대제사장이 시키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대제사장 앞에서나 통하지, 하나님 앞에선 절대 통할 수 없는 핑계다.

왜 성전과 기도를 대비했는가?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야단쳤다. 흠 있는 제물을 바치고 환전하면서 폭리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럼 율법대로 정결한 제물을 바치고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가르쳐야 했다. 그러나 그런 언급은 전혀 없었다. 단지 기도하는 집으로 일컬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제사와 기도를 대비했다.

그 이유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성전의 본래 역할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또 궁극적으로 성전 문을 닫겠다는 것이다. 행위의 율법 시대에서 은혜의 복음 시대로 바꾸겠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줄줄 외울 정도로 능통하다. 그들에게 율법의 규정을 다시 이야기해야 무의미하다. 무엇보다 그들이 말로 타일러서 들을 존재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심으로 회개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여만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도 반드시 자기에게 유익이 있어야만 행동으로 표출된다. 유대 대중이 장사치가 폭리를 취하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만무하다.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해도 그대로 따랐던 까닭도 마찬가지다.

금전적으로 손해 보는 것보다 뭔가 더 큰 유익이 있었던 것이다. 그 유익이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어쨌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모든 구약 제사의 목적이 속죄다. 지난 잘못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대중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과 질병과 가난을 제사를 통해 해결 받으려 했다. 최소한 앞으로 하나님이 더 큰 벌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가시적인 종교 의식을 경건하게 거행했다는 것이다. 또 대세자상과 서기관들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인간 사회에서 비난 받을 일도 배제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안도감을 얻은 것이다. 무사무탈(無事無脫)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일시적인 자기만족을 구한 것이다. 그런 안도감이 당장의 금전적 손해에 비교해 컸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 죄악에 동참 내지 조장했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카버하고도 남을 만하다는 것이다.  

진짜로 손해 본 것은?

그런데 그들은 진짜로 더 큰 손해를 보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제물을 열납하시겠는가? 영적인 평강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또 그것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성질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 먼 길을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거룩한 성전에 와서 경건하게 제사를 드렸으니 하나님은 내 정성과 믿음을 알아주시리라 믿었다.  

막상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 나는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1) 하나님께 유익하지 않다고 했다. 그럼 너희에게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심각하고도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는 제사가 전혀 드려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종교적인 안도감을 얻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고 인간의 착각에 불과해진다.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영적 교통이 전무하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없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 승리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한다. 하나님께 받을 은혜 자체가 없다. 오직 절기와 제사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는 즉, 자신의 인간적 의만 실현한 것이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사1:12)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정미하지 않는가? 제물을 “드리러”, 혹은 “바치러”라고 하지 않고 “보이러”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해 교회에 출석부 도장을 찍으러 나왔다는 것이다. 학교에 아무리 개근해도 와서 졸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루라도 정신을 차려 제대로 공부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래서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2)고 했다. 지성소는커녕 성소 안에도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죄의 용서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그 먼 곳에서 성전에 와서 제사를 정성껏 드리면 더 이상 나쁜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기대했지만 결코 그 기대대로 이뤄질 수가 없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다 못해 너무나 어리석기 짝이 없고 가련하기조차 하다.  

예수님은 장사치들을 성전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더 이상 그런 제사는 드리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에 진정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제물만 보이러 오지 말고 심령의 중심을 꺼내어 보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식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가시적이고 거룩하고 경건해 보이는 종교의식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을 행했다고 절대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과는 하나님의 영으로 교통하지 않으면 어떤 접촉(contact)도 일어나지 않고 그분과 대면(encounter)할 수 없다. 인간의 중심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내려놓지 않으면 절대로 회개, 사죄, 용서, 구원이 이뤄질 수 없다. 인간이 바친 것의 질과 양에 따라, 그 중에는 정성과 열정과 심지어 믿음까지 포함해서, 당신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물의 희생 제물을 죽여서 바칠 때에 자기 자신도 완전히 죽여야 한다. 인간의 죽음도 함께 바쳐야 한다. 세상의 것에는 전혀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 의지한다는 고백을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제사 드리는 목적이 앞으로 세상에서 나쁜 일만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라면 세상의 것은 전혀 내려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히려 세상의 것만 소망하고 있는 셈이다.  

십자가 복음의 엄청난 의미

구약의 모든 제사는 속죄의 제사다. 속죄는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까지 구약의 모든 제사는 실패했다. 이스라엘, 나아가 전 인류의 죄의 용서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오시어 십자가에서 영단번의 완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의 마음이 부패함으로써 하나님께 졌던 죄 값을 직접 담당하셨다. 십자가에서 완벽한 속죄 즉, 과거 청산이 이뤄진 것이다.

완벽하게 과거가 용서되었다면 남은 것은 새로운 승리의 출발뿐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었다. 하나님의 영을 좇아 행하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롬8:1-4) 신자는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얼마든지 거룩하고 의롭게 살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 이후에는 종교적인 안도감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교회 생활에 잠시 나태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거나 나쁜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권력자는 물론이요, 사탄 마귀 같은 흑암의 세력도 장애가 될 수 없다.

신자에게는 이제부터 하나님 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진군하고 성장하여 승리할 일만 남았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세상을 향해 거룩한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된다. 십자가 복음은 지난 잘못을 회개하는 것으로 그쳐선 절대 안 된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함께 하는 곳이다. 아니 부활이 더 중요하다. 복음은 죽음과 부활이 합쳐져야 완전한 복음이 된다. 신자에게 새로운 삶으로의 출발과 변화가 없다면 사실상 복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매주일 예배에 나와서 자신이 직접 회개는 하지 않고 장로의 “지난주에도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들을 용서해달라는” 대표기도로 자신의 희생제물을 대신한다. 그리고선 오로지 현실에서의 자기 형통과 안일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치운다. 몸은 예배당 안에 있어도 그 심령은 교회 주차장에도 들어오지 않은 꼴이다. 하나님은 그런 신자를 보지도 않고 그 기도를 듣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수한 제물에 배가 불렀다고 탄식하면서 놀랍게도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사1:12)라고 반문했다. 율법에도 없는 짓거리를 자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율법의 모든 제사가 속죄가 전제라는 것은 진정한 속죄가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도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가 정결한 바탕에서만 부어진다는 것이다. 제사를 지냈다고 은혜가 자동으로 부어지거나 무조건 지켜준다는 법은 결코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수많은 제물의 고기와 피에 질렸으니 제발 갖고 오지 말라고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 유대 대중이 흠 있는 제물을 대충 바치고 치우는 것도 그들도 제물 바치는 데에 지쳤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구태여 그 먼 길에서 오느라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이 진정으로 너희에게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다. 신자는 진정한 속죄를 바탕으로 하나님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고 그분 안에만 온전히 거해야 한다. 특별히 마음에 할례를 해야 한다. 그 부패한 심령을 동물의 죽음과 함께 죽여서 바치고 율법대로 준행하면 하나님은 들어가도 나가도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시겠다는 것이다.  

목회자와 교회가 회복 될 수 있는 유일한 길

작금 일부 교회에선 영적인 오류도 아니고, 아예 비상식적이고 세상보다 더한 잘못이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다. 목사나 신자가 사악하고 죄를 탐하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나 비참한 인간의 영적 실체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에 대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이 얼마나 오묘하고 경이로운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사만 있고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로는 설교와 기도는 흘러넘칠 정도로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설교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져있다. 기도도 나쁜 일만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거의 전부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목사가 잘못 가르친 탓만이 아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에게 자기의 모든 것, 그 중에도 부패한 마음을 드리려 하지 않는다. 종교 생활만 보이려 든다. 그것도 하나님에게 아니라 담임 목사와 주위 교인들에게 눈도장만 찍으려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3:15)고 했다. 이 권면은 목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로선 목사 격인 베드로가 교인들에게 한 말이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고 했다. 여기에는 목사도 포함된다.

교회나 목사에게서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잘못이 눈에 빤히 보이면 진정으로 권면해야 한다. 파당을 이루거나, 개인적 욕심과 편견으로 행하지 말고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애정과 진심을 갖고 간곡히 호소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마18:16) 처음에는 두세 명이 찾아가 은밀히 증참해야 한다. 그래도 엉뚱한 소리를 하면 전교인이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한 후에 다시 권면해야 한다. 여전히 변화가 없다면 그냥 전교인이 교회를 나가면 된다. 예수님 말씀대로 성전 문을 닫으면 된다. 목사에게 교인이 떠나는 것만큼 큰 벌은 없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여러 현실적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금도 본문의 유대인들과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의 유익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일이 싫은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으로 거룩하고 의롭게 사는 일이 귀찮고 싫은 것이다. 교회 생활을 나쁜 일만 안 생기길 바라는 종교적 안도감을 얻기 위해서만 지속하고 있다.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고 헛된 안도감이자 착각이자 자기 최면일 뿐이다. 그러니 십년 이십년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갈급하고 허망하며 믿음의 승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권능은 엄청나다. 어린아이들마저 찬미케 한다. 또 그런 찬미 앞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대꾸 한마디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 신자는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 또 읽어서 복음의 진리를 정말로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은 바에 따라 삶에서 순종하며 실천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의 권능이 반드시 신자를 통해 크게 역사한다.

모든 신자의 영성이 목사와 같거나 더 뛰어나야 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골고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또 그 일이 지금 교회와 신자에게 어떤 권능으로 드러나는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온전히 알아야한다. 목사에게 진정으로 권면을 했는데도 전혀 변함이 없고, 그럴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신자라도 복음 안에서 바로 서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신자가 목사보다 영성이 더 뛰어나면 그 때서야 목사들이 정신이 번쩍 들 것 아닌가 말이다. 이것만이 비상식적인 잘못을 예사로 범하는 교회와 목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일 것이다.  

12/8/2013


국중후

2013.12.09 07:22:29
*.167.0.245

몇달전부터 늘 내곁을 떠나지 않는 교회를 향한 고민과 우울함이 있었는데 위로의 성령님께서 묵사님의 음성을 통해서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안타까운 마음 이었음을 알게해 주시네요.
저 자신부터 주님앞에 철저히 깨어져서 참다운 예배가 회복 되어져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운영자

2013.12.09 14:33:14
*.119.139.57

국중후 형제님

이 홈피 사역을 통해 신앙상담을 받는 중에
가장 자주 접하는 문제가 바로 목회자와 교회에서 상처 받은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경에 비추어 씨름해야할 이 시대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목회자와 교회가 없기에, 당연히 저와 이 홈피사역도 포함해서,
성도들부터 먼저 깨이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라도, 길이 최선일 것입니다.
이제는 주석성경, 주석집, 컴퓨터성경소프트웨어, 조직신학 책 등이 대중화되었기에
조금만 부지런하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목사에게 복 받는 안수기도 요청하기보다는
성경적으로 어려운 질문과 토론을 자꾸 퍼부으면(?)
그나마 목사들이 정신차려서 말씀을 깊이 연구할 것이며
비상식적인 잘못도 바로 잡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목사가 정신을 안 차린다면 성도라도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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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1]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4)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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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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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4:8-12) 내년에도 지금까지처럼 똑같이 살아라.

(요14:8-12) 내년에도 지금까지처럼 똑같이 살아라. 2021 송구영신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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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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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뒷모습이라도 보는가?(출애굽기강해#60-출33:18-23) [1]

하나님의 뒷모습이라도 보는가? 출애굽기 강해 (60)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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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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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1]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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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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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다.(출애굽기강해#3-출1:15-22)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다. 출애굽기 강해 (3)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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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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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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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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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5)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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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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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1]

(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야곱 바로 알기 (13)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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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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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무덤을 밟고 지나가는 이성적인 믿음 (민수기강해#15-민14:4-10) [1]

(민14:4-10) 예수님의 무덤을 밟고 지나가는 이성적인 믿음 구약성경강해(25) / 민수기강해(15)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5)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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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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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소명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마28:16-20) [1]

November 12, 2017 Morning Service from Kirby Woods Baptist Church on Vimeo. 설교 요약: 마태복음 28:16-20 제목 (가제): “위대한 사명 (임무) Commission” 요약: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면서 끝을 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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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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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없는 무덤도 있다.(출애굽기강해 #6-출2:9-15)

핑계 없는 무덤도 있다. 출애굽기 강해 (6)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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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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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돌아온 탕자 시리즈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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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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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0:1-7&17,18)생명을 살리는 선지자로 기도하라-기도시리즈(8) [1]

(창20:1-7 & 17,18) 생명을 살리는 선지자로 기도하라. 기도 시리즈 (8)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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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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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오병이어 기적 (9)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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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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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찬양 집회(출애굽기강해#32-출15:1-11)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찬양 집회 출애굽기 강해 (32)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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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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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1]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기 강해 (8)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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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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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에 지나친 신자들로 가득 찬 한국교회 (민수기강해#24-민16:4-11)

(민16:4-11) 분수에 지나친 신자들로 가득 찬 한국교회 구약성경강해 (34) / 민수기강해 (24)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고라와 그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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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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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1:1,2 & 4:10,11) 하나님께 받을 신자의 진정한 복 [1]

(욘1:1,2 & 4:10,11) 하나님께 받을 신자의 진정한 복. 요나서 강해 (12-完)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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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3
  • 조회 수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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