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
마태복음 강해 (198)



http://youtu.be/ScHdExNJdSk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18-22)


신약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

열렬한 환영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성전을 청소했다. 그 첫날을 동쪽으로 2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유한 후 고난주간 내내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은 둘째 날 아침에 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금방 말라버린 사건이다. 그런데 이 기사의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요소들로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로 꼽힌다. 하나씩 깊이 따지면 한이 없다. 몇 가지 중요한 부분만 간단히 정리해보자.

마가에 따르면 첫날인 일요일에 주님은 성전만 둘러보았고 월요일 아침에 무화과나무를 말로 저주한 후에 성전에 들어가서 청소했다. 다음 날 화요일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제자들이 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질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마태는 첫날에 성전청소하고 둘째 날인 월요일 아침에 저주했더니 곧바로 말랐다고 말한다.

성경, 특별히 복음서에서 동일 사건의 기록에 상이한 부분이 있을 때 해석하는 원칙이 하나 있다. 더 상세하게 기록한 것에 신빙성을 더 두는 것이다. 아무래도 기억이 정확해야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 경우 마가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보는 것이다.

마태의 기록에 착오가 있는 이유는 그는 어떤 사건에 곧바로 이어서 그 의미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서 사건의 발생순서나 시간에 크게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저주했더니 나무가 금방 말라버린 그 사실만 중시한 것이다. 19절의 나무가 “곧 마른지라”의 ‘곧’이 하루인데, 하루도 ‘금방’이라는 뜻이다.  

또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병을 치료하거나 위험과 죽음에서 건져주기 위한 것이었다. 본 사건은 유일하게 비록 나무이긴 해도 저주하고 죽이는 기적이기에 예수님의 성품과 상충되기에 의아해한다.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도 세밀히 보살피며 참새도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려져 밟힐 수밖에 없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했다. 예수님은 만물의 생명을 통치하고 인간의 구원과 심판을 주도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태어나기도 전부터 심판으로 예정했다고 해서 그분에게 불의(不義)는 결코 없으며 어느 누구도 그분을 힐문할 수 없다.(롬9:14-20)

문제는 주님이 부정적 기적을 기도와 연결해서 가르친 것이다. 자칫 남을 저주하며 멸망하기를 소원하는 기도도 응답된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아무리 내 쪽에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억울하게 피해보고 핍박만 받았다 해도 그 사정을 아뢰기만 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저주, 정죄, 심판해선 안 된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몫이다. 정말로 나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만의 오묘한 방식으로 신원해주신다.

예컨대 목사가 교인에게 함부로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는다, 또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지었으니 지옥 갈 것이라는 식으로 야단쳐선 안 된다. 목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이다. 서로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라고 했지 않는가?

나무는 아무 잘못이 없지 않는가?

정작 본문에서 깊이 따질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을 기도의 능력을 강조한 것에 두느냐, 아니면 마가가 이 사건 중간에 성전을 청소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기에 그것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하는지 여부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쪽에선 예수님이 기도의 능력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은사와 기적이 중지했다고 보는 쪽에선 아무리 기도해도 산이 바다에 빠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주님이 과장법을 사용했을 뿐이며, 대신에 성전청소에 비추어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교를 야단쳤다고 이해한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된다. 좋은 것이 좋다고 적당히 타협하려는 뜻이 아니다. 본문 기사만으로 충분히 그 두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화과는 6월이 지나야 열리는데 지금은 유월절 즉, 양력으로 3월말에서 4월 중순인 부활절 시기다. 열매가 맺힐 시기가 아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몰랐을 리도 없다. 때가 아니어서 열매가 없는 것은 나무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저주한 예수님 잘못이지 않는가?

이스라엘 문화와 풍속을 연구하는 한 전문가가 이스라엘에는 이른 봄에 작은 열매를 맺는 것과 여름에 큰 열매를 맺는 두 종류 무화과가 있는데 본문의 나무는 봄 나무라고 설명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마가가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11:13)고 분명히 여름 무화과라고 밝히고 있기에 무리한 해석으로 보인다. 예수님을 변명해주려다 오히려 성경 해석에 착오가 생겼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절대 불의가 없다. 인간이 아무리 이해가 안 되고 심지어 의심과 불평만 생겨도 선할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힐문할 수도 없지만, 구태여 위해서 변명해줄 필요도 전혀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오직 스스로 증명하실 뿐이다.

무화과(無花果)는 이름 그대로 꽃이 피지 않고 열매가 열리는 나무다. 잎이 무성하면 열매가 열렸다는 증거다. 실제로 어렸을 때 저희 집에 무화과가 있었는데 멀리서는 잎에 가려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6월이 지나야 열매가 열린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이 나무에 유난히 잎이 많아서 조금 일찍 열매가 열렸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마태와 마가가 공(共)히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다”고 즉, 잎이 아주 무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나무에 열매가 없어서보다는, 정확하게는 겉으로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매가 전혀 없었기에 저주한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금식한 표시를 얼굴에 내었다. 사람들이 듣게끔 시장 어귀에서 큰소리로 기도했고 양념과 채소의 십일조도 드렸다.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수여 받은 율법 외에 장로의 유전을 수백 개 더해 일일이 지켰고 또 다른 이가 위반하는지 따졌다. 손을 씻어서 정결하게 밥을 먹고,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과 사귀지 말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기 위해 일하지 말라고 하니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고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대중들이 메시아로 인정한 예수님을 자기들 이익을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했고 영적으로 도저히 자기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해 시기하다 못해 미워했다. 하나님의 출애굽의 큰 구원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메시아를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다. 무수한 제물을 성전에 바쳤어도 흠이 있었고 동족에게 폭리를 취하는 강도가 되었다. 여호와 신앙을 정말 잎만 무성했지 열매라곤 하나 없는 빈껍데기 형식 종교로 타락시켰다.

자기들만 소경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백성들의 눈도 멀게 하여 함께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않게 해야만 했다. 그들이 로마의 손을 빌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주님은 똑같이 로마를 징벌의 도구로 사용해서 그들의 배만 불리게 했던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파멸시켰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무성한 잎사귀들인지라 길바닥에 쓰레기로 버려진 것이다.  

산을 바다에 던지는 믿음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런 심판하시는 일에 성도가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고 한다. 예루살렘은 높은 고지에 위치해 있다. 베다니에서 성으로 들어가는 길도 자연히 그러하다. 그 길에서 보이는 이 산에는 예루살렘 성이 있으며 특별히 로마병영, 헤롯왕궁, 유대성전이 우뚝 솟아있다. 또 바다는 멀리 보이는 갈릴리 바다를 뜻한다. 예수님이 이 산과 바다라고 말했을 때에 제자들은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기도하면 로마는 멸망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이나 그 비유를 들은 제자들에게는 단순히 기도만 하면 엄청나게 큰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산이 바다로, 혹은 바다가 산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산이 들려는 뽑혔다는 것이며 바다에 던져져서 산이 없어진 것이므로 분명히 심판의 뜻으로 비유한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개인적 억울함이나 원한을 복수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산에서 뽑혀 나간 것들이 무엇인가? 먼저 로마 병영인데 강대국이 약소국을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수탈 핍박하는 죄악이다. 헤롯 왕궁도 세상 최고 권력에 빌붙어서 세도를 부리며 힘없는 백성들을 압제하는 죄악을 상징한다.

무엇보다 성전이 문제다.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자기들 죄 때문에 하나님께 받는 징계인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할 곳이다. 그런데 종교 권력이 세상 권력보다 더 부패한 강도로 거꾸로 바뀌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의 악을 범하고 있다. 비록 현재 하나님의 징계로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어도, 또 그럴수록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쳐서 백성들로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친밀한 교제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정반대편에 서서 원수가 되어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비유로 강조하며 가르치려는 내용은 유대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종교적 죄악, 그중에서도 특별히 영적 타락상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간섭하고 역사하여서 당신의 큰일을 곧바로 일으켜 주신다는 것이다.  

이 땅을 고치리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기도했던 그 모든 내용을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지금 땅을 고치는 그런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당신의 이름을 영영히 있게”(대하7:16) 한 곳이 성전이다. 당신의 눈과 특별히 “당신의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곳이 지금 세상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죄악의 소굴이 되었다. 예수님이 불같이 화를 내며 채찍으로 청소하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시고 비통한 심정으로 우셨다. 장사치와 제사장들의 죄악 때문만이 아니다. 죄에 대해선 분노해야 하는데 이미 다 분노하셨다. 그보다 그 큰 예루살렘 도성에 당신의 제자를 포함해 의인 단 열 명이 없음을 애통해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죄악으로 썩어져 가는 이 땅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하면 거룩하게 고쳐주신다는 약속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이고 또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이라 십자가 복음의 진리는 아무도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성전의 부패상은 단지 양심과 상식만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지 않는가? 그 죄악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시켜달라고 간구했어야 했다. 그들은 그저 이스라엘을 로마보다 현실적으로 더 부강하고 풍요로운 나라로 바꿔달라는 기도만 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는 일에 신자가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 죄악을 심판하는 방식이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신자의 기도를 통해 심판이 일어난다는 것은, 쉽게 말해 총칼에 맞서 총칼로 상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선으로 맞서 이기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만이 이 땅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마가는 그래서 이 기사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11:25)는 예수님 말씀으로 결론지었다.    

예수님의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꾸중

예수님은 고난 주간의 첫날과 둘째 날에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정화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마르게 했다. 또 그 주간 내내 유대 종교의 권력자들과 충돌했다. 지금까지는 당신의 메시아 되심l조차 비밀에 부치라고 당부하다가 공개적으로 그들과의 다툼을 자청했다. 예수님은 직접적, 능동적, 공격적으로 그들과 맞서 그 잘못들을 단 하나의 타협과 굴절 없이 직설적으로 꾸중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팔복강화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일곱 저주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퍼부었다.

공생애 마지막 주간의 사역의 초점을 어디에 두었는가? 겉으로 풍성해보여도 진정성이 완전히 실종된 종교와 위선으로 포장된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온 천하에 공개하는 일에만 주력했다. 종교적 의식과 절차는 풍성한 반면에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림은 전무했다. 악한 길을 떠나 스스로 겸비해져 하나님의 긍휼만을 간구하는 자라곤 없었다. 도리어 성전을 자기들 배 불리는 데만 이용했다.

예수님이 그들만 저주한 것이 그들이 십자가 복음을 훼방하는 죄를 지은 것 때문 만이 아니다. 그들도 구원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함께 지옥의 불구덩이로 이끌고 가고 있었기에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걸고 그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그들과 공개적으로 논쟁하며 야단친 것도 유대 대중들로 하여금 제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죄의 노예가 되어 있던 대중들도 결국 주님을 배역했다. 하나님 본체이신 주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내내 그들과 적극적으로 논쟁함으로써 골고다를 향한 길을 주님 스스로 재촉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뜻은, 결국 신자에게 역대하 7:14의 말씀을 소명으로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신자는 평생을 두고 스스로 겸비하여져 예수님의 심정으로 이 땅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한다.

경건의 모양과 능력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전혀 없는 형식적인 종교를 성경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딤후3:5)고 표현했다. 그 능력이 기도하면 초자연적 이적이 나타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성경의 교리만 강조하는 메마른 신앙도 아니다.

디모데 후서 3장과 4장 전반부를 자세히 읽어보라. 경건의 능력은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단 하나의 굴절 없이 선포하고 또 그대로 따라 살 때에 따르는 세상의 멸시와 핍박을 이겨내는 힘을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고 했다.

경건하게 사는 것은 종교의 형식이 풍성해지는 모습이 결코 아니다. 어떤 현실적 손해와 핍박이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진리 안에 있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과 흑암의 세력 앞에 그 진리를 진리답게 선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또 그러면 신자가 아무리 세상에서 후패한 모습이 될지라도 오히려 평강과 기쁨과 감사와 자유가 넘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경건의 능력이 있으면 그 모양은 자연히 드러나는 것이지 경건의 모양을 아무리 많이 갖추어도 그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예수 믿는 도(道)를 전하자 염병처럼 아무도 막지 못하고 온 천하에 번진 이유가 무엇인가? 안디옥 교회에서 예수 믿는 신자들이 처음으로 기독교인(Christian)이라고 불린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작은 예수라는 뜻이지 않는가?

그들은 신자로서 정말로 신자다웠던 것이다. 자기 믿는 바와 겉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 경건의 참 능력 되시는 예수님을 실제로 자기들 속에 보배로 소지했었기에 세상의 죄악과는 일절 타협하지 않았다. 특별히 형식적 종교와 우상을 숭배하는 거짓과는 십자가의 진리로 맞서며 자기 생명까지 내던졌다.  

스데반이 산을 바다에 던진 기적

스데반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심을 껍데기뿐인 유대 종교인들과 대중들에게 때를 얻든 못 얻든 선포했다. 작은 예수다운 모습 그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다. 만약 회개치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판 날에 뿌리까지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될 것이라고 선언하자 돌이 날아 왔고 기독교 최초로 순교했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이적을 일으켜 그 위험을 모면케 하고 생명을 건져주지 않았다. 스데반 본인도 그런 기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작은 예수로서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하나님 제발 용서해달라고, 십자가 은혜 안에 들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러자 성령이 역사했다. 처음에 돌을 맞는 몇 번은 분명히 아팠을 것이다. 그러다 차츰 고통은 사라지고 대신에 세상에선 누릴 수 없는 안락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히 채워졌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대면했고 천국의 영광이 그를 감싸 그의 얼굴에 거룩한 빛이 넘치는 모습을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다른 이의 죄를 사해달라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기도했더니 실제로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큰 기적도 분명히 일어났다. 그 사형을 주도했던 바울이 스데반의 신자다운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에겐 경건의 모양은 넘치는데도 도무지 그처럼 놀라운 경건의 능력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스데반에게 경건의 모양이라고는 없어 보이는데도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천국의 영광을 보는 참 능력이 나타나니까 너무나 자신이 비참해지고 그 영혼에 깊숙한 찔림을 받은 것이다.

그러다 결국 스데반의 기도에 응답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바울을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저작하여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위대한 사도로 하나님이 세워주었지 않는가? 그야말로 이 땅을 고치는 일군이 되었다.    

그런 바울이 놀랍게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어지는 일을 말세(末世)에 일어날 현상으로 꼽았다. 초대교회의 모습과 정반대이니까 말세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초대교회와 비슷한가? 말세에 가까운가? 교회에 처음 나오는 신자라도 그 답은 알 것이다. 참으로 심각하고 두려운 일이다. 예수님이 교회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멸망시킬 일이 분초를 다투고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 정말로 깨어서 경성해야 한다.

참 생명인 기독교마저 종교적 놀음과 행사를 하는데 급급한데 당장 중지해야 한다. 강단에선 십자가의 진리가 순전하게 선포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높아져야 한다. 목사는 목사답게, 신자는 신자다워져야 한다. 교회 안에 위계질서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목사 신자 구분 없이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갈수록 죄악이 관영해가는 이 세태와 하나님과는 완전히 등진 채 인간만 높이 세우는 이 세대를 예수님의 심정을 갖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한다. 황무한 이 땅을 깨끗이 고쳐달라고 외쳐야 한다.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상실한 메마른 심령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채워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너무 그렇게 거창하게 간구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자신의 죄부터, 가족과 직장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행한 잘못부터 진정으로 회개해야 한다. 십자가 앞에 날마다 순전히 겸비하게 엎드리며 내부터 고쳐달라며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이 경건의 능력으로 채워주신다. 내 주위부터 깨끗해지면 그 깨끗함이 점점 더 번져나가 이 땅을 새롭게 고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도 얼마든지 스데반이나 바울처럼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산을 바다에 던지는 하나님의 큰 심판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12/15/2013

사라의 웃음

2013.12.15 22:41:45
*.109.85.156

아직 이른 때이기에 열매가 없을 수도 있을텐데 왜 저주하셨을까? 좀 너무하신 것 아닌가 싶은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잎사귀가 무성해지면 자연스레 열매가 맺혀있어야하는 무화과 나무이기에 그러했음을 배웁니다. 남에게 그럴 듯한 신앙인으로 보일 수 있고 스스로도 남다른 종교성으로 많은 잎파리를 드리울 수 있는데 정작 예수님이 찿으시는 그 열매는 없을 수 있음이, 세상이 너무도 굽었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정신없이 덩치 키우기에 급급하고 교회안의 성도들도 종교성으로 무장하여 십자가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봄을 잊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 세상속에 자신이 있음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랑의 말씀으로 바르게 배워서 연약하고 무지하기에 더더욱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매일이 되길 기도하게 됩니다.

국중후

2013.12.16 00:45:42
*.243.238.62

저부터 경건의 능력이 많이 나타나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 그능력을 덧입혀 달라고 기도 하며 살겠습니다.
제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 까지도 잘알아 듣는 성도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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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뒷모습이라도 보는가?(출애굽기강해#60-출33:18-23) [1]

하나님의 뒷모습이라도 보는가? 출애굽기 강해 (60)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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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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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1]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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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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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다.(출애굽기강해#3-출1:15-22)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다. 출애굽기 강해 (3)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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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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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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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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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5)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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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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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1]

(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야곱 바로 알기 (13)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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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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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무덤을 밟고 지나가는 이성적인 믿음 (민수기강해#15-민14:4-10) [1]

(민14:4-10) 예수님의 무덤을 밟고 지나가는 이성적인 믿음 구약성경강해(25) / 민수기강해(15)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5)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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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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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소명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마28:16-20) [1]

November 12, 2017 Morning Service from Kirby Woods Baptist Church on Vimeo. 설교 요약: 마태복음 28:16-20 제목 (가제): “위대한 사명 (임무) Commission” 요약: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면서 끝을 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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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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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없는 무덤도 있다.(출애굽기강해 #6-출2:9-15)

핑계 없는 무덤도 있다. 출애굽기 강해 (6)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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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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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돌아온 탕자 시리즈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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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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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0:1-7&17,18)생명을 살리는 선지자로 기도하라-기도시리즈(8) [1]

(창20:1-7 & 17,18) 생명을 살리는 선지자로 기도하라. 기도 시리즈 (8)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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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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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오병이어 기적 (9)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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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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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찬양 집회(출애굽기강해#32-출15:1-11)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찬양 집회 출애굽기 강해 (32)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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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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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1]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기 강해 (8)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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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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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에 지나친 신자들로 가득 찬 한국교회 (민수기강해#24-민16:4-11)

(민16:4-11) 분수에 지나친 신자들로 가득 찬 한국교회 구약성경강해 (34) / 민수기강해 (24)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고라와 그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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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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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1:1,2 & 4:10,11) 하나님께 받을 신자의 진정한 복 [1]

(욘1:1,2 & 4:10,11) 하나님께 받을 신자의 진정한 복. 요나서 강해 (12-完)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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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3
  • 조회 수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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