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언제 은혜를 주시는가?

조회 수 53 추천 수 0 2019.06.10 17:00:26

(민14:10-12) 하나님이 언제 은혜를 주시는가?

구약성경강해 (26) / 민수기강해(16)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6)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0-12)

 

죽기 직전에야 구원해주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모세 아론 여호수아 갈렙은 자기 무덤을 밟고 지나가라는 심정으로 엎드려서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실제로 이미 사탄의 종이 된 백성들은 돌을 들어 그들을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애굽의 노예 살이에서 구원해주었고 히브리 동족끼리 처음으로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우려는 하나님이 세운 종들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충성된 종들이 개죽음 당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실 리는 없습니다. 백성들이 돌을 들고 치려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모든 후손 위에 나타났습니다.(10절) 구체적인 모습은 알길 없지만 모두가 한눈에 볼 수 있는 찬란한 광채가 특별히 성막 위에 나타났을 것입니다.

 

백성들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 사탄에 선동되어 영적인 봉사가 된 눈을 뜨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을 당장에 거룩하고 신령해지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홍해를 가르고 온갖 이적으로 함께 해주신 하나님을 지금 거역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너무 굼뜬 것 같지 않습니까? 모세같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종이 충성하고 헌신하는데 왜 꼭 죽기 직전에야 구원해주는지 의아합니다. 주의 종이 헌신할 때마다 가시적인 진전이 있거나 열매가 섬기는 양떼들을 통해 드러나면 더욱 힘이 나서 더 뜨겁게 충성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런 불만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완악한 마음을 먹지 않게 좀 더 일찍 상황을 호전시켜주시면 안 됩니까? 오늘날 우리도 고난이 닥쳐 아무리 새벽 제단을 쌓아도 하나님이 꿈적도 않고 침묵합니다, 오히려 고난들이 겹쳐지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불만과 미움을 품고 등을 돌린 것 같으며 아예 부재한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작정 기도가 끝이 나도 호전될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 두 손 두 발 다 내려놓고 저를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완전히 항복하면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우리는 압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을 완전히 인정하고 순전한 믿음으로 당신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인 줄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아주 고달픕니다.

 

주님이 조금이라도 주위 형편을 호전시켜주시거나 조금만 더 빨리 역사해주시면 믿음으로 견디기 훨씬 쉬울 텐데 불신자보다 더 괴롭히는 것 같아 곤혹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려면 남들 놀 때에 밤 잠 안 자고 공부해야 하듯이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끝까지 인내해야 함을 알고 그렇게 실현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비유컨대 고삐에 끌려가는 소 같은 신앙생활이 됩니다.

 

절대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분명히 해 둘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껏 다르게 알고 있었다면 이후로는 꼭 고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가 우리의 순전한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순전히 논리적으로 따지면 믿음만 순수하면 무슨 일에나 형통하고 모든 고난이 사라져야 합니다.

 

인간이 예수님처럼 100% 순전한 믿음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 그렇지 않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순교자의 경우를 보십시오.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순전한 믿음을 가졌고 정말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조차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 방울로 변할 만큼 간절히 기도했으나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기도조차 거절당했다면 우리의 기도는 더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일어납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존재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봉사 헌금 전도했어도 기도 응답과는 별개의 일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 합당한 일만 당신의 방식과 때에 따라 이루십니다. 그것도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차원으로만 역사합니다. 당신의 뜻을 반드시 드러내시고야 만다는 맥락에서 정말로 독선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매사를 처리할 수 있는 오직 한 분으로 그래서 하나님입니다.

 

모세 일행이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구해주신 것도 그들이 순전한 믿음으로 생명을 아끼지 않고 순종한 모습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일차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려준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이 죽고 나면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의미가 하나도 없으며 가나안 정복이라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갑니다.

 

성경을 정확히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염병으로 백성을 진멸하는 심판을 내리겠다고 했지만(12절), 당신의 계획 자체는 전혀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로 이스라엘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전 백성이 죽더라도 모세의 후손을 통해서 반드시 그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충성된 당신의 종이라 은혜를 베풀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가나안에 제사장 나라를 세워서 온 천하에 당신만이 하나님인줄 알리겠다는 데에 초점이 모입니다. 애굽에서의 열 재앙, 가데스 바네야의 한 번의 반역으로 인한 38년의 광야 방황, 가나안 정복의 진멸 명령 같은 일련의 사건들도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당신의 이름을 높이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네 사람을 순교시킨다고 해서 그들을 대체할 만한 영적 지도자는 물론 순전한 믿음의 사람들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종을 하나님이 단 번에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오랜 기간 동안 온갖 고난을 겪게 해서 당신과 고뇌 갈등하며 씨름하면서 당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자를 세웁니다. 하나님이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성정이 그만큼 연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소년 다윗도 양을 치는 동안 사자와 곰을 보내어 물매 돌 던지기 달인으로 하나님이 훈련시켰습니다. 골리앗과의 전투까지 당신의 계획에 이미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선 그 계획은 물론 이름도 없는 한 소년을 세상 한 구석에서 당신께서 준비시키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40년의 세월이 흘러 완전히 잊어버렸을지라도 미디안 제사장의 데릴사위로 숨겨서 정금같이 연단시켰습니다. 지금 말할 수 없는 고난 중에 있는 신자라도 정말로 그분과 깊이 교제 동행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다윗과 모세처럼 그분의 큰일에 쓰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움직여야 하나님도 움직인다.

 

본문 12절은 엄청난 내용입니다. 모세 일행 네 명과 그 일가족만 살리고 나머지 약 2백만 명은 눈도 깜짝 않고 몰살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 내지 뜻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엄청난 독재자 아닙니까? 구약의 여호와가 잔인한 심판에 능한 신이라는 불신자의 비난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심판 또한 다시 말하지만 당신의 나라를 반드시 당신께서 반드시 세우시겠다는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에게 신명기 28장의 선언처럼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그분의 근본적인 마음이자 계획입니다. 가나안 정복 직전에 선포된 말씀이라 가나안 정복의 목적이 됩니다. 그런 엄청난 복을 이스라엘이 제 발로 걷어 찬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심판에 능하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온 모든 약속을 온전히 반드시 그대로 당신께서 이루시고야 마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모세 일행의 순종 충성하는 믿음을 보고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시킬 일이 남아서 살려둔 것입니다. 당신의 일을 시킬 사람은 당연히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순전한 믿음을 보여야만 당신께서 역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범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만 진행된다는 것이 첫째가며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그럼 신자가 나를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항복하는 기도를 해야 비로소 응답해주시는 것도 엄밀히 말해서 기도한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해 그 다음에 시킬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를 통해서만 일하신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라면서 기도를 끝냈습니다. 주님은 또 내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니까 혼자 버려두지 아니하고 함께 행하신다고 말했습니다.(요8:29)

 

바꿔 말해 하나님께 순종 헌신 충성하는 일을 그분이 명하신 신자의 도덕적 종교적 의무 차원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을 테스트해서 복을 주시겠다는 뜻도 전혀 아닙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당신의 거룩하고 복된 일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신자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신자가 움직이기 시작해야 하나님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특권입니까? 우주의 주인 되시는 그분이 이 땅을 다스리는 일을 신자를 통해서만 행하신다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가만히 있는데도 하나님이 역사하는 경우는 둘 뿐입니다. 하나는 가만 두면 회개도 않고 죄 중에 완전히 죽음으로 끝날 때입니다. 그 뜻은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기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연 재앙 같은 심판입니다. 본문에서도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그분의 일을 하려는 생각도 않자 진멸하는 심판을 내리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요컨대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준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도와 순종을 따로 취급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시키지 않아도 힘든 일만 생기면 바로 할 수 있는데 순종은 어지간해도 못하는 이유입니다. 기도와 순종이 동시에 함께 이뤄지지 않고 순종은 따로 엄청난 일을 해야 한다고 여기니까 그렇습니다. 순종은 목회자 같은 전문 사역자의 몫이라고 간주합니다.

 

또 기도가 순종할 준비라는 생각조자 못하니까 기도를 끝내면 즉,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으니까 믿음으로 신자가 할 일이 다 끝난 것으로 여깁니다. 손을 쳐들고 눈물로 간절히 호소했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기도해준 대로 다 잘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자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게 여겼습니다.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믿었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아들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삭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입니다. 만약 사라에게 성령으로 잉태시켰다면 하나님이 이삭에게 성육신한 셈이 됩니다. 죄송하지만 그들은 그 연세에 정말 힘겹게 끙끙거리면서 부부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더라도 그 약속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만약 믿는데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관적 약속으로 소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교리의 내용에 동의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전공하는 학생일 뿐입니다.

 

신자의 기도를 응답해주는 이유가 주님께서 시킬 일이 있기 때문이라면 기도는 더더욱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묻는 과정이거나, 이미 그 뜻을 아는 자는 그분의 계획에 순종하려는 준비 과정이어야 합니다. 주님도 분명히 겟세마네에서 기도로 십자가에 죽을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즉 그분의 계획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을 준비가 완료 되자 기도를 마쳤습니다. 주님이 새벽마다 한적한 곳에 따로 혼자 가셔서 기도하신 내용도 그날 하루에 행할 하나님이 기뻐하실 그분의 사역을 위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백성 앞에 엎드리면서 제발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회복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두려워말고 담대하게 가나안 땅 정복에 나설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당장 백성들에게 벌을 내려 달라거나 가나안 거인 족속을 하늘에 불을 내려 전멸시켜 달라고는 절대 기도하지 않았고 정반대로 백성들이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각오했습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겠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그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에 순종할 수 있는 최후의 방안이었습니다. 모세도 오늘날 우리처럼 저를 죽이든 살리든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수행할 준비를 한 것입니다. 또 엎드린 것 자체로 모세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고 그러자 하나님의 역사도 시작된 것입니다.

 

순종할 계명이 오직 하나 뿐인 신자들

 

이 단계에서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으로 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 경건하게 드리며 봉사하고 평소에는 어려운 문제와 고난이 닥치면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려움에 빠진 신자를 구해주시길 기뻐하십니다. 교회 생활에 충성해야 하고 고난이 닥치거나 자신의 소망을 두고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긴 합니다. 하나님이 고난 중에도 분명히 오묘하게 역사합니다. 그럼 어서 빨리 고난을 끝내주기만 기도해선 안 되고 이 고난 중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며 나에 대한 계획이 대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교회 생활 성실히 수행하고 힘든 일에 기도만 하는 것이 전부라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으로 평생을 두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께 받은 계명이 1) 주일에 교회에 충성하고 2)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기 힘이 아니라 기도해서 하나님께 맡겨라 둘 뿐인 셈입니다. 아니 신앙을 가진 목적이 고난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교회 생활에 충성하니 엄밀히 따지면 순종해야 할 계명이라곤 “힘들면 기도하라”는 것 하나뿐인 셈입니다.

 

오늘만큼은 정말로 진지하게 한 번 따져보길 원합니다. 신자가 일생을 두고 행할 일이 그것뿐이면 너무 가난하고 치사한 신앙 아닙니까? 기도와 예배로 이뤄낼 일이라고는 자신의 평안한 삶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우리더러 그 일만 하게 하고 그것으로 만족시키려고 이 땅에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온갖 수모 멸시 핍박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입술로만 부른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종교도 명칭과 정도의 차이만 있지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도 힘들면 궁극적인 절대자, 기독교로는 하나님을 찾아서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붙였다고, 기독교의 관습과 의식을 따른다고,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며 무엇보다 예수님이 원하고 십자가로 이루려는 목적이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해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물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는 싶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즉, 자신에게만 맡기신 소명이 과연 무엇인지 계속 찾고는 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정확히 알아서 제대로 믿는 신자를 양성시키지 않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르칠 학생들만 끌어 모은 목회자들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교회의 양적 부흥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교인들로 교회에 충성하고 기도하여 어려움 이기라고만 강조한 탓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 세상 앞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 알게 해줄 필요는 분명히 있습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기도하여 고난을 이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교인이 그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는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그렇게만 하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기독교도 그냥 여러 종교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교회 부흥의 유일한 이유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0고 분명히 명했습니다. 단순히 불신자 시절보다 조금 더 착해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 앞에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라고 했고 또 그 앞에는 너희는 이미 소금과 빛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성령님이 내주하는 신자가 진심으로 그분의 명을 행동으로 옮기는 순종을 하면 세상의 윤리와는 차원이 다른 성령의 거룩한 역사가 신자를 통해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본문의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되고 거룩한 광채가 비취어 심령에 찔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행2:47) 해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종교적 모습만 보고 세상 사람이 칭송할 리는 없습니다. 칭송의 대상은 주님의 말씀대로 신자들의 착한 행실이었습니다.

 

성전에 모이기 힘쓰며 예배를 열심히 드리긴 했지만 그 전에 가난한 사람들이 없게 자신이 가진 것을 아끼지 않고 공동소유인양 서로 통용하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나라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관습과 의식을 행하는 기독교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심정을 품었기에 주님의 의 사랑과 권능이 풍성히 역사하는 은혜의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 사이에는 왕족 귀족 평민 노예의 구분이 없었고 남녀 간의 차별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와 자매였습니다. 당시의 세속의 사람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들로선 상상도 못하는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사람으로 취급도 않는 노예, 이방인, 여자, 아이들도 온전한 한 인격체로 하나도 부족하지 않게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주님이 목숨을 바친 너무나 고귀한 존재임을 잘 알기에 서로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나중에 핍박이 심해져도 정말로 죽이든 살리든 주님 뜻대로 하시라는 믿음으로 견뎌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생명보다 귀하기에 로마 황제를 주라고 도무지 시인할 수 없었습니다. 잠시 거짓말하고 나중에 회개해도 될 텐데 순전한 믿음에 성령의 순전한 역사가 임해 담대하게 우상에 절하지 않았으며 산 채로 맹수 밥이 되었습니다. 지금 모세처럼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라고 콜로세움 경기장 한 복판에서 불신자들을 향해 엎드린 것입니다. 십자가 상의 주님처럼 우리가 죽더라도 너희는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눈물로 아니 자기들 몸 전부를 던져서 호소한 것입니다.

 

그들이 행동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자 정말 성령의 불은 로마 제국을 다 태웠습니다. 기독교가 세계 종교 사상 최초로 아니 유일하게 최단 시일에 세계적 종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퍼트리지도 않았고,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는 전염병처럼 제국 전체에 하나님의 역사가 융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행동으로 순종했기 때문이며 또 그전에 주님이나 모세처럼 하나님의 일에 기도로 동참하여 헌신할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오늘날 교회의 양적 부흥만 꿈꾸며 교회에 충성하고 기도 간절히 하면 고난이 해결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은 참 부흥을 절대 가져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처럼 복음에 목숨을 걸지 않고는 부흥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절대성 유일성 완전성 영원성이 제외된 부흥은 가짜 부흥이자 기독교라는 종교 놀음에 불과합니다.

 

구체적 소명을 모를 수 없는 신자

 

신자들이 자기 소명을 모르겠다는 것은 아직도 성경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갖추지 못했던 초대교회 신자들마저 주님 계명을 정확히 준행했습니다. 오늘날 성경으로 주님의 십자가와 그에 계시된 뜻과 주님이 우리에게 맡긴 소명을 제대로 아는데 왜 그대로 순종하지 못합니까?

 

성경은 우선 모든 신자더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합니다. 본인의 성품부터 거룩하게 가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말로 인격적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유지하고 그런 온전한 관계에 따라서 모든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하듯이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교회 안팎의 소외되고 가난하고 핍박 받는 자들을 찾아가서 고난에 동참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갖고 있는 것 나눠주면서 고난을 이겨내도록 최대한 힘을 보태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세상과는 전혀 다르게 거룩한 방식으로 살아서 예수님의 참 생명과 참 빛을 세상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 일을 현재 자기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하라는 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직장선교회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절대 불법 부정 위계를 하지 않고 오직 정직 성실 신용 사랑으로 모든 일 모든 사람을 대하여야 합니다. 희생과 수고와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며 그래야만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배우면 그래서 주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면 신자가 행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자가 성경을 모르거나, 알아도 정말로 삶에 실현할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기도하라는 계명 하나만 붙잡아도 됩니다. 세상과 이 세대의 죄를 용서해주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힘들면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여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마저 힘들면 최소한 나의 죄를 씻고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라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한 그대로 실제로 하나씩 실천해야 합니다.

 

정말로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신자라면 성령이 주도하여 날로 타락해가는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게 해줍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모든 여건을 조성해줍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함 안에 이미 완전히 붙잡혀 있는 자입니다. 그 안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자기 뜻대로 행해도 결국은 그분이 당신께로 돌려세웁니다. 그전에 신자가 정말로 순종할 준비 태세 각오 헌신이 되어 있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큰 영광 가운데로 이끌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여러분을 고난 위에 고난을 겹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본문의 경우도 능력이 없어서 모세가 죽을 지경에 빠지도록 놓아둔 것이 아닙니다. 당장에라도 가나안을 멸절 시킬 수 있습니다. 출애굽 때처럼 단 한명의 종으로 얼마든지 당신의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다 네 명의 믿음의 종들을 남겨서 당신께서 당신의 일을 이뤄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가나안에 크고 강한 나라를 당신께서 기어이 만들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모세 후손만 살리고 이백만 다 죽여서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처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나누어서 궁핍하고 환난 빠진 자들을 서로서로 돌아보게 하는 나라를 말입니다. 사탄의 종이 되어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해내는 당신의 참 빛과 참 생명을 우상에 절하는 모든 열방이 보도록 할 것입니다.

 

모세 일행 네 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지만 그들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그랬습니다. 그곳에는 세속적인 영광이라곤 단 하나도 없습니다. 동족에게서조차, 그것도 지금껏 그렇게나 수고했음에도 배반 음모 분노 저주 죽음의 그림자가 모든 백성 위에 드리워진 가운데 하나님의 빛은 그들 네 사람의 심령에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도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엄청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창녀 세리 과부 고아 이방인 귀신들린 자들을 만나 교제하고 어루만져주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모습 가운데 당신의 영광은 찬란히 빛났습니다. 이름도 해골인데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는 성 밖의 골고다 처형장에서 당신의 죽기까지 순종하는 모습으로만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분을 믿고 따르며 그분의 삶을 따라가려는 우리 신자들도 영화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거창한 일에 순종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모세 같이 위대한 종은 없습니다. 열두 사도나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순교로 내 몰지도 않습니다. 사소한 작은 일에서부터 가장 적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당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자에게 작은 일에서부터 섬기라는 것은 신자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주위에 널리고 널렸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순종할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태세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회에 충성하고 기도하면 고난이 없어지고 형통할 수 있다는 계명 하나에만 순종하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해서 평안을 얻기는커녕 고난이 없어지기라도 하겠습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길 원하십니까? 그분의 거룩한 일에 동참하고 싶습니까? 아주 쉬운 말로 그분의 참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그럼 한 가지 방안뿐입니다. 현재 교회와 가까운 성도들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한 번이라도 주변을 향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둘러보십시오. 지금껏 보이지 않던 주님의 일이 그것도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순종할 준비를 하는 기도를 하시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해서 가장 간단한 일부터 행동으로 옮겨 보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항상 감사와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5/2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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