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http://youtu.be/0118IV1sv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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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마27:57-66)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영국 저널리스트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이 너무 어리석다고 여겼다. 그 허구성을 밝히려고 탐구하다가 중도에 생각을 180도로 바꿨다. 도리어 1982년 “Who moved the stone?”(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라는 부활의 역사적 진실성을 입증하는 책을 발간했다.

그 책의 서문에서 그는 순간적 영감과 통찰력으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에 사실 자체가 갖는 견고성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서서히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원래의 저작 의도의 정반대가 되었기에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너무 어리석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본문을 잘 살피면 과연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지 추적이 가능하다.

예수는 죽지 않았다.(?)

예수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허구라고 반발하는 근거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급히 끌어내려졌기에 완전히 운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덤에 안장된 육신을 제자들이 훔쳐서 그 상처를 치료하여 소생시킨 후에 부활했다고 거짓으로 선동했다는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자 순순히 허락했다.(58절) 주님은 유월절 절기가 시작하기 하루 전인 금요일 오후 세시에 운명했다. 율법에 의하면 밤새 시체를 나무에 달아놓을 수 없었고, 안식일이나 절기 때는 더더욱 그랬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요셉은 당연히 율법을 준수하려 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예수의 제자”(57절)였기에 주님을 메시아로 믿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을 그런 수치 속에 계속 버려둘 수는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급하게 내려진 것은 맞다.  

그러나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다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더니 피와 물이 쏟아졌다.(요19:33,34) 처형장에 보초를 서는 군병이라면 장의사 이상의 지식과 경험이 있다. 호흡과 맥박이 완전히 중지된 것을 확인 안했을 리 없다.

마침 병사가 예수님을 믿었거나 혹은 공경해서 죽지 않았는데도 죽었다고 거짓말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나중에 예수를 살려준 대가로 자기가 죽음을 당한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창에 찔린 상처의 출혈 때문에 무덤 안에 있었던 동안에, 날짜로는 3일이지만 시간으로는 36시간, 생존할 수 없다. 예수는 완전히 죽은 것이다.  

예수님은 공식적으로는 로마의 법정에서 로마에 반역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로마는 반역 죄인은 반드시 십자가로 처형했고 또 그 시신을 새가 파먹어서 완전히 흉측한 몰골이 될 때까지 나무에 계속 달아두는 관습이 있었다. 로마에 거역할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래서 빌라도가 결코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발한다. 즉 부활 기록 전체를 믿을 수 없다고 시비를 건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지만 유대 지도자들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마지못해 사형을 선고했다. 또 시체를 나무에 계속 달아두어선 안 된다는 유대의 종교적 관습도 잘 알았다. 유월절이 내일이면 시작되는데 아직도 예수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 소란을 피울 가능성도 있었다. 유대 공회원인 요셉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예수는 의인이므로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아내의 경고도 내내 신경 쓰였다.

요컨대 그로선 어떻게 하든 예수 사건에서 빨리 손을 털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대제사장이 시신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무덤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자,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너희가 알아서 해라고 답했다.(65절)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예수 문제로 골치 썩기 싫다는 뜻이었다. 빌라도가 예수의 시체를 순순히 내어주었을 만한 정황상의 요건은 충분했다.

무덤에 보초가 없었던 반나절

마지막으로 살필 문제는 과연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훔쳤는지 여부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이야말로 그런 가정이 아예 억측임을 증명한다. 예수와 같은 일당으로 몰리면 로마와 유대 당국 양쪽에서 박해가 가해질 것은 필연이었다. 아무리 엉터리 재판이었어도 법적으로 예수는 로마 반역 죄인이었다. 그의 제자라면 동일한 죄가 성립되기에 십자가 혹은 그에 버금가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스승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아녀자들로부터 들었음에도 베드로 혼자만 예수님의 무덤에 확인하러 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시신을 훔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심지어 무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본문에 의하면 요셉은 금요일 저녁에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데 반해 파숫군이 무덤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그 이튿날부터였다는(62절) 점이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반나절은 무덤에 보초가 없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때에 시체를 훔쳐갔을 가능성이 있는가? 마태는 요셉이 큰 돌을 굴려 무덤을 막았다(60절)고 기록하고 있다. 또 두 여인만 무덤 앞에 남아 있었다고 했는데(61절) 두 명의 여자로선 그 큰 돌을 옮길 힘이 없었다는 뜻이다.

거기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로선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기에 파숫군들과 함께 무덤까지 갔다.(66절) 분명히 무덤을 열어서 시체부터 점검해봤을 것이다. 옆구리에 창 자국 있는지 보고 완전히 죽었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 후에야 돌을 막고 인봉했을 것이다. 만약 그 반나절 사이에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면 이미 그 때에 큰 소동이 났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반나절을 포함해 부활하실 때까지 36시간 동안 성부 하나님은 물론 인간 사회와도 완전히 차단되어 철저하게 혼자 버려지셨다. 당신을 처형한 유대 지도자들과 대중은 물론 제자들마저 당신을 외면했다. 주님 혼자서 하나님의 인간의 죄에 대한 모든 저주를 감당했다.

신자가 때로는 주위 사람들이 오해하고 싫어하면서 다 떠나고 억울한 누명에 괴롬을 당할 수 있다. 그럴 때에도 주님은 신자와 함께 해주신다. 당신께서 인간 사회에서 철두철미 버려지는 체험으로 그런 괴로움까지 대신 감당해주셨던 것이다. 주님은 공사역 중에도 유대 사회에서 소외된 외롭고 힘든 사람들 곁에 있어준, 그것도 먼저 찾아가 준 유일한 유대 랍비였지 않는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시27:10) 주님은 당신의 몸으로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셨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든, 특별히 부모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신자를 외면할 지라도 신자는 주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또 그러면 주님은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신다.  

다시 일어난 큰 지진

요셉 무덤의 돌은 그 근처에 다시 큰 지진이 일어난 후에 천사가 굴려서 열었다.(마28:2) 대제사장은 틀림없이 심복으로 파숫군을 세우며 졸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을 것이다. 또 교대로 지켰을 것이기에 누군가 그 놀라운 광경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여기서도 성경이 너무나 세밀한 기록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해 일어난 사실이 세밀했기에 성경도 세밀한 것이면, 사건이 세밀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정미하고 완벽했다는 뜻이다. 설령 파숫군이 다 졸았다 해도 큰 지진으로 놀라 깨었을 것이다. 또 지진 후에 천사가 돌을 굴렸으므로 그들이 그 광경을 못 봤을 리 없다. 보초들은 그 크신 하나님의 권능 앞에 오금이 저려 꼼짝도 못했을 것이다.

파숫군들이 그 모든 되어진 일들을 대제사장에게 보고했는데도 문책은커녕 전혀 추궁도 하지 않았다.(28:11-15) 사실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충성스런 부하가 보초근무를 태만히 했거나 또 거짓말 할 리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대제사장으로선 마지막 궁여지책으로 파숫군들에게 돈을 주고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소문을 내라고 지시했다. 이런 사실까지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중에 한 명이 나중에 양심선언을 했거나, 소문의 출발이 어딘지 추적하다보니 최초 발설자가 대제사장의 하속임을 알게 된 것이다.

대제사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예수의 영향력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에 대해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처형 전과 동일하게 변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일로 인해 부활의 역사적 진실성이 더 보장된 결과만 낳았다. 진리가 갖는 힘이자 부활 자체에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했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임이 증명되기에 구태여 증거와 변론이 필요 없다.  

만약에 제자들이 목숨이 붙어 있는 예수의 육신을 훔쳐가 부활을 조작했다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현실적 이득이 제자들에게 생겨야만 한다. 그러나 재물, 권력, 명예 어느 것 하나 얻지 못했고 정반대로 사태가 진행되었다. 유대 사회에서 핍박을 받았다. 스승처럼 머리 둘 곳이 없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결정적으로는 그들 거의 모두가 순교했다. 자기들이 만든 거짓을 지키려 목숨까지 내놓는 바보는 없다. 자던 성도들의 무덤의 바위를 터트린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살아 있는 제자들에게는 더욱 큰 권능과 은혜로 임한 것이다. 육신은 이 땅에 있으나 그 영으로는 하늘의 것을 사모하고, 아니 소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면서도 예수님께 감사, 찬양, 경배했다. 그들이 부활을 직접 목격했고 그 생명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것 외에는 이 일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빌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직후에 일어난 일련의 초자연적 기적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계시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도덕과 종교에 능하여 세상 의인이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 받은 이단 교주로만 취급했다. 반면에 종교성과 영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로마 군병과 비천한 여인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르게 혹은 틀리게 인식하는 두 종류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예수님의 정체성 인식에 따라서 삶에서 실제로 반응하는 모습이 세 종류로 달라진다고 말한다. 먼저 빌라도는 불신자의 전형적 모습이다. 예수의 시체를 순순히 내줄 만큼 예수를 범상치 않은 랍비로 인정했다. 어쩜 하나님의 선지자일 라고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 뿐이었다. 그 뒤는 생각하기 귀찮아서 포기했다.

하나님이 아예 없다고 확정적으로 믿는 완전 무신론자는 사실상 드물다. 대체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설령 있다고 해도 자신의 삶과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다. 종교란 단순히 자기 양심에 찔린 일들을 반성하거나, 자기 인격을 의롭게 연마하는 데만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고난이 닥치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절대자 신에게 빌어서 해결하려는 심약한 사람들의 도피처라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 개인에 대한 호감은 분명히 있다.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 배울 바가 많다고 인정한다. 예수님을 도덕 선생으로만 간주하니까 자기는 도덕적으로 그리 악하지 않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믿고 따르지 앟는다. 여전히 자기 존재와 인생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소관으로 예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에 은혜로 주신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구원 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그런 원리를 열심히 전해주어도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겠다고,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이 있다 해도 전혀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친다. 막상 죽음이 닥치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버리지 않은 자들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유대인

둘째 부류의 사람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그 추종하는 무리들이다. 예수님을 미워했고 적극적으로 훼방한 자들이다. 지금으로 치면 누구에게 해당되는가? 이슬람이나 북한 정권인가? 그렇지 않다.

이슬람도 예수를 하나님의 선지자의 한 명으로 인정한다. ‘알라’ 신을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을 포교와 성전의 대상으로 볼 뿐이다. 그들이 미워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다. 북한 정권은 인간의 행복은 물질만이 보장한다는 유물사관에 따라 하나님 자체를 부인한다. 따라서 이들은 오히려 빌라도 같은 불신자의 범주에 속한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정성은 최고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만 부인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배, 헌금, 봉사, 전도, 기도를 성실히 준행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대해선 무지한 자들이다. 주님의 사랑과 권능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벌거벗은 영혼의 실체를 내어드린 적이 없다. 자기 옛 사람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죽이고 주님의 보혈로 새 사람으로 깨끗이 거듭난 적이 없다. 성령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다. 세상으로만 향하고 있는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유턴하지 않았다. 옛 자아는 생생히 살아있고 삶의 방식을 사람 앞에 자기를 치장하는 것에만 치중한다. 하나님에게 유대인들처럼 자기와 자기 주변에만 다윗 왕국 같은 영광을 재현해달라고 요구한다.  

죄의 삯이 사망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진리도 객관적인 교리일 뿐이다.  마치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진리인 줄 알고도 자기는 평생 안 죽을 것 같이 착각하고 행하는 것과 똑같다. 진리를 알고도 자기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지 않는다. 십자가 예수님과 개인적 인격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다.

교회에 출석하면 예수 믿었다고 착각한다. 교인 등록하면 천국 입장권을 취득한 것으로 오해한다. 예수를 닮아 거룩해지는 데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용서 받았기에 죄에 대해 너무나 둔감하다. 기도를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의 무료 사용권으로만 간주한다. 대박의 형통을 위해서 밤낮으로 눈물로 간구한다. 신명기 28장처럼 들어가도 나가도 넘치도록 복만 달라고 조른다. 하나님의 자기 인생에 부여한 소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 한국과 미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서 초대교회 같이 예수 믿는 일을 방해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이 거듭난 신자를 미워하고 훼방하지도 않는다. 모든 교회가 오직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표면적으로는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제 교인들의 행동은 정반대이므로 기독교는 공허하다 못해 가짜로, 아니 역으로 개독교라고 욕만 먹는다. 입술로는 예수님을 부르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예수님답게 실현시키기는커녕 정확하게 가르치지도 않는다. 바울이 지적한 대로 저주 받을 다른 복음들이 성행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참 예수가 전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아리마대 요셉

예수님의 정체성 인식에 따라 달라지는 마지막 세 번째 반응은 아리마대 요셉의 경우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는데도 예수를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본문의 상황만 해도 율법은 시체를 가까이 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는데도 그것도 안식일 하루 전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렸고, 그 죄목도 유대 법정에선 하나님을 모독한 참람 죄였다. 하인을 시켰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는 장사 절차를 직접 진행했고(59,60절) 자기 가족 묘지에 안장했다.

부자이자 공회원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부자이고 공회원이니까 더더욱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껏 그는 재물과 권력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 그 자리에 이르렀는데 쉽게 포기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에도 재벌들은 친 형제끼리 소송하고 원수가 된다. 고위직 공무원일수록 권모술수와 부정부패가 더 난무하지 않는가?

요셉은 공회원이라는 신분, 위치, 특권들이 순간적 껍데기임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그것들이 다 없어져도 아무 상관이 없게 된 것이다. 예수를 알고 믿는 것과 그 모든 것을 바꾸고도 남는다고 확신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은 물질의 궁핍과 질병의 고통보다도 인간 사회 특별히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가장 괴롭다. 요셉은 그런 인간의 이 땅에서의 최고의 괴로움과 수치를 예수를 위해 감수한 것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19:39) 같은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백 근을 갖고 와서 이 장사를 도왔다. 그는 밤중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었던 자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 없다는 대답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곤혹스러워 하며 돌아갔다.  

그는 틀림없이 대제사장이 조작한 허위 고발에는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자기에게 수수께끼 같은 선문답을 하신 예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곁에서 예의주시 했을 것이다. 예수가 한 마디 변명하지 않고 십자가 고통을 담담히 감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특별히 자기를 처형시킨 자들마저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들었을 것이다. 바로 그 때에 그의 심령에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충만히 임재했을 것이다. 십자가상의 우편 강도처럼 지금껏 열심히 선행한 도덕과 율법을 준수했던 종교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참 평강과 안식과 자유가 풍성히 채워짐을 체험했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 직후에 일어난 일련의 기적들을 볼 때에도 진실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었고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저절로 고백했을 것이다. 자신이 계획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서 성령이 간섭했다는 것을 본인만은 알았을 것이다. 비로소 예수님이 구원의 길로 대답했던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두 공회원들은 세상에서 보장된 형통과 풍요를 버리고 예수님 가신 길을 기꺼이 따랐다. 아직은 예수님 부활과 자던 성도들의 무덤이 터지기 전이었다. 어느 누구도 예수를 따르라고, 심지어 예수 본인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의논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다 숨어버렸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십자가 처형과 그 직후에 일어난 일련의 기적들을 하나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러자 자기들도 모르게 진정으로 자신이 낮아지고 비워지는 일이 내면에서 일어났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간섭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를 통해 계시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구원은 예수님 그분의 정체성을 정확하고도 온전하게 알게 되는 것에서부터 출발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덤의 돌은 옮겼는가?

본문이 말하는 바는 예수님과 진짜로 인격적으로 대면한 자는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반응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이 땅에 왜 인간으로 오셨는지, 오셔서 무슨 일을 행했으며, 꼭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던 이유 등을 제대로 안다면 그 인생은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요셉과 니고데모의 그 후의 행적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걸었을 것은 틀림없다. 상위 몇 %에 속하는 고위층과의 교류는 자연히 단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왕따가 싫거나 괴롭지 않고 신경도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예수님처럼 세리, 창녀, 고아, 과부, 불구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이 훨씬 더 기쁘고 감사했을 것이며 그 일을 위해서 자기 재산도 기꺼이 소비했을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다 이룬다는 주님의 가르침이 비로소 이해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웃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같다는 엉뚱한 말씀이 실제로 예수님처럼 이웃 사랑을 해보니까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이 누구인지 제대로 깨닫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으로 이웃을 다 바꾸었을 것이다.

예수를 믿어 얻는 진짜 큰 복은 바로 주님을 따라 걸어가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에 얻을 수 있다. 기도해서 자기 소원을 이뤄질 때가 아니다. 실제로 그런 사랑을 실행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럽고도 가장 고귀한 복이다. 실행하지 않은 자는 아무리 말로 설명해줘도 모르는 복이다.  

예수님의 무덤의 돌은 천사가 굴렸다. 천사를 보내어 그렇게 하도록 하신 하나님이 옮기신 것이다. 인간 세상의 최고의 모략과 권력을 다 동원해 봤지만 그분의 십자가 모략은 도무지 감출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바위를 뚫고 안에서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신자란 예수 무덤의 돌을 하나님이 옮겼다는 사실을 믿는 자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치면 객관적 교리로 남을 수 있다. 신자는 니고데모나 요셉처럼 거듭남의 비밀을 자신의 실제 체험을 통해 알게 된 자다. 또 그 비밀을 소지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 자다.

예수를 몰랐던 이전의 자기는 죄와 사탄과 사망의 무덤에 죽어 있었던 시체였다. 예수님의 일방적 은혜를 입고 자기 무덤의 돌을 자기가 깨트리고 부활하는 체험을 했다. 그래서 니고데모나 요셉처럼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자다. 그 실행에서 비록 더디고 때로 넘어지긴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인간 사회에서 왕따가 되어도 예수님이 함께 하기에 만족하는, 최소한 전혀 개의치 않는 자가 된 것이다.

지금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선행에 열심이어야 한다는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심각하고 진지한 말씀을 드리고 있는 중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믿고 따랐던 복음은 아주 간단했다. 예수님이 부활했기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이미 부활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단순한 복음이 시대가 바뀌었다고 절대 변하지 않는다. 역으로 말해 복음 안에 있는 신자라면 초대교회 신자처럼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무덤의 돌을 하나님이 옮겼지만 영적으로는 자기가 옮긴 것이다. 무덤 안에 계셨던 예수를 끌어내어 자기 심령 안에 모신 자가 신자다.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를 자기 구주로 영접했지 않는가? 주님이 지금 분명히 자기 속에 있다. 그럼 필연적으로 그분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러지 않고 있다면 자기가 확실히 구원 안에 있는지부터 다시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1/25/2015



사라의 웃음

2015.01.26 01: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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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물과 피를 다 쏟게하고 죽여버린 유대인들이 참 이상하기도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만 합니다만, 그들이 현재 저의 모습임을 곰곰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교회는 출석하고 말씀은 연구하 듯 촘촘히 배우려 애를 쓰며, 이웃사랑 실천은 선행이라는 관념은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은 저의 죄를 다 짊어 지셨기에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다 해결하셨기에 이젠 안심...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행사에 최선을 다 하다 보면 보너스로 이 땅에서의 복도 주실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함구하며, 교회가 세상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때에 그 무리 속엔 나는 제외된 듯 또 스스로 착각하는 참 어리석고 이상한 교인이 저는 아닌지, 텅빈 강정같이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십자가 사랑이 자기위로에만 머물고 있진 않은지.....이상한 유대인이라 지탄하며 저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진 않은지 곰곰 생각하게 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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