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예정론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15 여 년간 본 홈페이지를 통해 문서사역을 해오는 동안 아마도 예정론에 대한 상담과 문의를 가장 많이 접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구원받아 영생을 누릴 사람”과 “버림받아 영벌을 당할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했다고 하니 이성적으로 수용은커녕 이해도 안 됩니다. 예정에 누락된 자는 잘못 하나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너무 억울한 반면에 예정에 포함된 자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특혜 내지 편애를 받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아무런 귀책사유 없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을 일어나게 하실 분이 아니며, 그렇다고 무조건 특정인만을 편애하는 분도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구원의 예정에서만은 하나님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정이 진리라면 너무 독선적이고 공평하지 않으신 하나님 같은 의아심 내지 불만을 도무지 지울 길 없습니다.
알다시피 신학적으로 구원에 관해선 첨예하게 대립되는 정반대의 두 의견으로 나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거부할 수 없는 일방적 선물”(칼빈주의)이라는 측과,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협력할 수 있음은 물론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성취나 거부가 가능”(아르미니안주의)하다는 측입니다. 이 두 진영의 시시비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회원들의 문의에 답변해주어야 하는 저의 입장에선 양쪽 의견을 대조 검토 평가한 후에 한쪽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그 이전에 제 의견은 칼빈주의로 확고하게 서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예정에 관한 글을 올리면 틀림없이 결론 없는 논의가 지루하게 이어질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대체적인 성향이 매우 감정적인데다 합리적 논리적 토론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와 훈련이 거의 안 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토론이 아니라 말꼬리 잡기로 변질될 것인데 그 점이 지금껏 제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중하게 답변을 거절해왔던 까닭입니다.
이제 감히 이 주제로 연재를 시작하고자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제게 질문해주신 분들에게 답변 자체를 완전히 거절한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시리즈 글이나 책으로 답변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더 이상 미루다간 처음부터 답변할 의사 혹은 따로 설명할 내용이 없어서 그랬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가 드린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 변증을 시작하려는 첫째 이유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정론 관련 서적을 찾아서 읽어도, 목회자의 설명이나 가르침을 받아도 정확히 이해되지 않고 여전히 미진합니다. 둘째 이유는 그래서 시리즈 글의 제목이 뜻하듯이 신자들로 조금 더 쉽게 예정론에 접근시켜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고 100% 보장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은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간곡히 당부 드리고 싶은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어느 쪽이든, 교회에서 지금껏 배워온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 다 내려놓아 주시기 바랍니다. 예정론에 대한 선(先) 이해, 개념, 지식, 교리 등을 완전히 비운 백지 중립상태에서 성경이 이끄는 대로만 따라 가보자는 뜻입니다. 어떤 신앙상의 의문이라도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추적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특별히 이 주제만은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 동안에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 양 진영이 너무 신학적 논의에 집중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벗어난 논의를 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성경을 논리적 교리적으로 따지려면 아무래도 신약성경의 서신서들 위주로 살필 수밖에 없는데 서신서에는 두 가지 의견을 다 제시하고 있기에 아무리 논쟁을 해도 여태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논쟁을 접하는 신자들로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신학적 논의는 뒤로 미루겠습니다. 유수의 신학자들이 다양하고도 전문적인 의견을 이미 다 개진해왔는데 새로운 이론을 덧붙일 학문적 소양이 솔직히 제겐 없습니다. 대신에 가장 먼저 성경 인물들의 구원이 예정이었는지 자력으로 노력하여 구원을 성취한 것이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들이 예정으로 구원 받았으면 예정론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예정론 자체가 당연히 옳다는 아주 간단한 논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간섭하신 일들을 실제 삶에서 체험한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의 영감에 따라 그분의 관점에서 그분의 역사를 이해한 대로 정리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현실 사건이 신학이나 교리의 확립 이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신학과 교리가 먼저 형성되고 성경의 인물들이 현실에서 그 교리와 일치하게끔 자기 인생을 꾸려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건 인물 여건 등 모든 것을 합력하여서 당신의 완전하고도 일관된 원리에 따라 인간 역사를 선도적 주도적 능동적으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신학자는 후대에 그 모든 일들을 검토하고 성경과 비교하여 그분의 통치 원리를 교리와 신학으로 체계화 시킨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이 하나님이 따로 구별해 세워서 당신의 큰일을 맡겼던 그분의 충성된 종이라고 해서 예정론을 논함에 있어선 우리와 결코 그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주의 종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신자이고 그분의 일을 맡아 충성하기 이전에 구원부터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정으로 구원 받았으면 예정이 옳은 것입니다.
신학적 논의에 치중하려면 아무리 성경에 바탕을 두어도 그 사고의 발전과 논의의 과정이 인간의 학식 지혜 관점에 아무래도 더 의존하게 됩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백지 상태의 중립적 입장에서 따라가려는 것은 예정구원은 더더욱 하나님의 입장과 관점에서 따져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예정론은 바울이 고안한 신학으로 교리서에만 기록되었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상식적으로만 따져도 말이 안 됩니다. 바울의 모든 신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인격적 대면으로 인해 시발된 것인데 예수님이 가르치지도 않은 전혀 다른 교리를 제 멋대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또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를 기록한 성경이 책별로, 그것도 가장 중요한 구원론을 서로 다르게 기록할 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특별히 십자가 죽음의 대속 구원과 동떨어진 채 기독교 교리가 생성될 수는 결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예정에 대해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종으로 바울을 택하여서 준비 훈련시킨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 개인적으로 대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예정론을 설파한 것 자체도 예정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인 셈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믿음과 연관해서 생기는 모든 의문과 논의의 최종적 판단 기준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 구원 진리에만 두어야 합니다. 성경 인물의 구원 과정을 살핀 후에는 예수님이 과연 예정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도 복음서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본 후에 칼빈과 아르미니우스 두 진영의 주장을 간단히 비교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나아가 그 두 이론이 끝까지 상극으로 남을 것인지 균형 조화시킬 방안은 없는지도 따져보겠습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둘 다 옳다는 뜻은 아니며 성경이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교리를 함께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간단하고 하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으로 신자로 곤혹스럽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표면적으로는 성경이 둘 다를 이야기하는 것 같으므로 신자들이 어떻게 분별 해석해야 하는지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정론을 신앙생활에 올바르게 적용 실현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핵심과 본질은 놓친 채 겉 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제 뜻은 예정론을 예수님이 가르친 대로 즉,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만 이해하고 믿자는 뜻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구원은 당연히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성경 기록과 동일한 구원을 체험한 후에 그 과정을 반추해 본 자는 저의 이 변증과는 무관하게 이미 예정론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의지로 믿으려 결단 헌신한 것이 구원이라고 여긴다면 제 변증을 다 듣고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리즈의 글을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단순합니다. 독자들로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과 비교하여 자신의 구원 경험을 한 번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자 됨이 정말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로만 정의될 수 있는지 따져보게 하는 것입니다. 저자인 제 의견을 검증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 여러분의 예정에 대한 의견을 제 글을 참조하여서 다시 점검해보시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이 시리즈에 한해서 독자들이 댓글을 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을 올린 후에 수시로 보완 수정할 수 있고, 제 의견의 종합적인 그림은 연재가 끝나봐야 다 볼 수 있고, 연재의 흐름대로 그 문맥을 잘 따라와야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소모적인 논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요컨대 예정을 반대하거나 미심쩍어하는 독자들도 일단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함께 따라와 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7/1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