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도 예정으로 구원 받았다.

 

구원의 길은 하나.

 

정통 복음주의 개신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시대와 나라와 문화에 따라 종교가 다르므로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해서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는 종교마다 그 이름만 각기 다르지 숫자로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절대자가 하나인데도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방식은 수도 없이 많다는 자가당착적인 뜻이 됩니다.

 

정말로 모두가 인정하듯이 절대자가 한 분 뿐이라면 가뜩이나 영적으로 어리석다 못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인간들에게 온갖 구원의 길을 제시해서 혼란스럽게 만들 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정답이라면 사실은 정답이 없는 셈입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다 구원을 주면 심지어 아무 믿음이 없어도 구원 받는다고 해도 아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마침 한국의 기독교는 영어 성경을 번역 전승하는 과정에서 정말로 은혜가 넘치게 절대자의 이름부터 하나님(한분의 절대적인 존재, The One Ultimate Being)이라고 붙였습니다. 그 한분이 주는 구원의 방식도 시대와 나라와 문화와 관계없이 수시로 바뀌지 않고 일관되게 동일한 하나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정에 관해서도 한 가지 정답만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인지, 인간의 협력이 가능한지 둘 중 하나만의 길이어야 합니다. 아니면 구원 받을 자가 예정은 되어 있지만 당사자가 반드시 협력해야만 한다는 방안까지 포함해서 셋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제가 예정론 논의를 시작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동안 너무 인간 쪽 입장에서만 따졌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럴수록 더 꼬이기만 했다는 점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그분의 입장에서 다시 정리해보자는 것이며 그럼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다는, 최소한 저의 경우에는 그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껏 각자가 예정에 대해서 갖고 있는 모든 선이해(先理解)를 일단 내려놓아 달라고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

 

우선 오직 한 가지 구원의 길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신학자들이 예정론 교리를 주장하기 훨씬 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서문에서 밝힌 대로 예정론 자체를 논하기 이전에 성경의 인물들이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구약시대의 믿음의 선진들부터 따져보려 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당신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 살펴보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 쪽에서 전적으로 주도한 그분의 일방적 선물이었는지, 아니면 인간 쪽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노력하여 얻어낸 것인지 둘 중 하나로 확실히 밝혀지면 어떤 의미가 됩니까? 엄밀히 말해 예정론을 더 이상 논의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무의미해집니다. 단지 그들의 구원과 나의 구원을 비교해서 일치하면 성경 방식대로 나도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 또 그 이후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필요도 이유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은 역사했는가?

 

한 밤 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요3:3) 바울 사도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고전 12:3) 말했습니다.

 

두 분 다 이중부정(二重否定) 어법으로 진술했는데 강력한 긍정을 뜻합니다. 반드시 성령이 간섭하여야만 비로소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선물로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에는 성령의 역사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야말로 구원에 관한 논의에서 최종적 권위를 가지며 모든 판단의 절대적 준거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필두로 여러 서신서에서 예정론을 설파했어도 이 말씀과 저촉되지도, 그 범주를 넘어가지도 않아야 하며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다메섹 도상의 구원 체험을 이 말씀과 주님의 다른 가르침과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과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서 구원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한 것일 뿐입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 위에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가시적으로 임했습니다.(행2:2,3) 그럼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거듭남이 없었다는 즉, 구원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구약 시대에 구원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 되어버리니까 말입니다.

 

신약(성령)시대와는 달리 구약시대에는 단지 성령이 특정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임했습니다. 사울 왕의 경우처럼 일회적으로 임했다가 다시 거두어진 적도 있습니다.(삼하10:6-12) 제한적으로 특정인에게 성령이 임한 까닭은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아야할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절대적 기준인 성령의 거듭남이란 바꿔 말하면 예정에 의한 구원이라는 뜻이 됩니다.

 

성령은 당신의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뜻에 따라서만 역사합니다. 인간 쪽에서 성령을 받고 싶다고 소원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한다고 임하지 않습니다. 간혹 목회자들이 성령을 받으라고 안수 기도해주거나, 일정한 방식을 배워서 그대로 연습 훈련한다고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인 신자들이 성령이 임하길 소원하고 기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주님이 당신과 같은 보혜사 성령을 당신께서 성부에게 요청해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14:16) 부활하시어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즉, 성령의 임함을 기다리라고 분명히 명령했습니다.

 

주님이 먼저 약속하셨고 또 기다리라고 했으니 성령은 오로지 삼위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임하신 것입니다. 신자들이 기도하기는 했지만 주님이 하신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고 기다린 것뿐이지 성령의 오심에 그들이 힘을 보태거나 영향을 준 것이라곤 아예 없습니다.

 

성령이 행하는 첫째가고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인간이 노력해서 받을 수 있다면 구원도 그러합니다.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성령을 인간이 노력해서 받을 수 없다면 구원도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구약시대에서부터 성령이 특정인에게 당신만의 절대적인 뜻과 계획에 따라서 임하여 구원을 주셨습니다. 요컨대 예정에 따른 구원은 구약시대 때부터 시행된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것 자체도 하나님의 예정이지 않습니까? 예정은 바울 사도가 고안한 신학이나 교리가 결코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오신 후에야 시행되고 비로소 가르쳐진 것도 아닙니다. 과연 그러한지 실제적인 예를 통해서 살펴봅시다.

 

아담과 이브도 예정으로 구원받았다.

 

놀랍게 들릴지 몰라도 아담과 이브조차 예정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기들 마음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어서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전혀 예상치도 않았고 스스로 의도하지도 않은 일이 자기 내면에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 벌 받을까 두려워졌고 부부 서로 간에 또 각자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서 입고 숲속 깊숙이 하나님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최대한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고 아예 만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라고 부르시면서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만의 구원 절차를 시작하였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을 죽일 수 없으니까 다시 살려준 것이지 예정의 구원과는 관계없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들을 심판하고 다시 새 인류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이 계속 거역하자 자기 백성부터 진멸하려 했고 실제로 가데스바네야 반역 사건 때는 기성세대는 당신께서 택하신 믿음의 종들을 빼고는 전부 광야에서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히3:9-11) 죽는 심판을 내렸습니다. 대신에 새로 태어난 세대들로 가나안 땅에 들여보냈습니다.

 

하나님의 그 광야 형벌을 개인의 구원과 직접 연결시켜선 안 되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만 인간 개인이든 공동체든 구원 내지 심판한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만 구원하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정을 함의(含意)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오직 스스로 하나님을 벗어나려고 했지 스스로 회개하고서 다시 그분의 품 안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더러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도 그들이 숨은 장소를 몰라서 알아보려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있는 곳은 네가 있어야 할 곳이 결코 아니다. 내 품을 떠나선 죽음뿐임을 제발 깨달으라!”는 간절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인데 그들은 구원 받을 생각이 없었기에 하나님 쪽에서 그들에게 선도적 주도적 일방적 능동적으로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정론을 논하면서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이 미리 심판할 자와 구원할 자를 정해놓았다는 이중적 절대예정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피겠습니다만 그 전에 우리 모두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이중예정은 일단 예정이 옳다는 것이 전제가 된 다음에 논할 과제입니다. 예정이 옳은지 먼저 살핀 후에 이중예정도 옳은지 따지는 것이 순서라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자신의 구원에 어떤 형태로든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이 예정의 반대편 입장입니다. 그럼 만약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구원은 예정으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기들 구원에 단 한 치도 영향을 미친 것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예정으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어볼 때도 그들은 회개할 기미는 전혀 없이 부부끼리 서로 정죄하기 바빴습니다. 아담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라고 하나님에게마저 책임을 돌렸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짐승을 죽여서 그들에게 가죽 옷을 손수 지어입힘으로써 다시 당신의 백성이자 자녀들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짐승의 피 제사를 통해서 구원 받은 셈입니다. 그들을 타락으로 꼬인 사탄에 대해선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심판했습니다. 동정녀에게서 나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흉계를 깨트리고 대속 구원의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오직 예수 십자가 보혈만이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구원의 원칙이 바로 에덴동산의 아담의 때부터 실현된 것입니다. 앞에서 오직 한 분뿐이신 절대적 존재가 베푸는 구원이기에 그 방식 또한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일관되게 동일하다고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예정 구원 자체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요한 사도가 말하는 태초부터 선재(先在)한 하나님의 말씀은 독생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선포했고 아담과 이브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때가 차매(갈4:4)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사도는 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만물이 말씀(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는데 그분 안에 구원의 참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도 그래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4-16)라고 선포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한 구원 계획을 태초부터 마련해 놓았기에 인간이 타락할 줄 다 아시고도 자유의지를 갖도록 창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당신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온갖 우상숭배로 타락할 줄 알고도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대속 공로에 인간이 의롭게 보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이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헬라인(모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밖에 비취지 않았습니다. 어떤 인간도 십자가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도 소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구원과는 정반대이자 심지어 꿈도 꾸지 못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십자가 구속만으로 구원이 이뤄진다면 구원이 예정에 따라 이뤄지는 것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다른 말로 예정 안에, 그것도 태초부터 들어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 비밀은 참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왔어도 아무도 몰랐습니다.(요1:9,10) 제자들마저 스승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것도 지혜의 영인 성령을 부어주신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런 판국에 어떻게 인간이 구원에 조금이라도 협력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엇보다 죄로 타락하여 사탄이 견고하게 진을 치고 있는 영혼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의지로 새롭게 바꿀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의 상태는 오늘날의 구원 전의 불신자와 동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결코 먼저 찾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에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이 땅의 안락과 풍요와 사치만 추구합니다. 죽음 이후에 영원한 심판이 기다림은 꿈에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간혹 일부가 죽기 직전에 두려워서 회개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도덕적 양심과 종교심이 살아 있어 궁극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자도 일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착한 자가 천국 가야 합당하다고만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의 선행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수 있다고 자신하는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인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전 구석에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세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착한 자가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는 사실은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일생일대의 너무나 큰 착각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평생토록 그런 생각이 착각이자 불신앙인지조차 모르고 바리새인처럼 가장 의롭다고 자부하며 삽니다. 인간 쪽에 아무 공로가 없이 구원에 영향을 하나도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은 도무지 마음에 차지도 않고 말도 안 된다고 비방하면서 말입니다.

 

창세기 1-3장의 기록을 다시 잘 살펴보십시오. 아담과 이브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류 중에 제 1호 구원을 주신 자들이 예정에 의해 구원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예정은 더 이상 따져볼 필요도 없다는 뜻 아닙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에 인간이 단 한치도 협력 내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예정에 의한 구원이 옳은 것입니다.

 

7/2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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