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아벨을 택했고 가인은 택하지 않았다.
죄의 심각성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2-7)
아담과 이브는 죄로 타락한 후에 하나님과 완전히 등지려고 숲속 깊숙이 숨었으나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오직 당신의 주권적 은혜로만 구원해주셨습니다. 인류 구원의 제1호였던 그들은 그 구원에 눈곱만큼도 공로는커녕 영향도 전혀 끼칠 수 없었습니다.
그럼 그 아들들의 구원은 어떠했습니까? 아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기에 그 보상으로 구원해주신 것입니까? 반대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아 받지 않고 구원에서 제외시킨 것입니까? 상기 본문을 읽으면 언뜻 각자의 행위에 따른 구원으로 오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 구절은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오면 얼마나 비참 잔혹하며 특별히 죽음의 문화를 불러오는지 그 심각성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구원의 기준이나 방식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부모에게서 난 아들들이라 당연히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리라는 섣부른 기대 예측이 아주 잘못된 판단임을 밝혀주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각자 자기 책임 하에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을 거역하면 정녕 죽는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부모와 아들들 중에 하나님께 죽음의 벌은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의 벌을 뜻합니다. 인간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이 벌로 내린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 죄인이 인간 의인을, 그것도 형이 친 동생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만큼 죄가 인간에게 끼치는 폐해와 부작용이 엄청나다는 뜻입니다.
설마 가인이 그럴 수 있었을까, 성경 기록이 과장된 설화가 아닌지 의심하는 것은 참으로 단순하다 못해 영적으로 아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직 잘 모른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인간이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짓는 죄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형제들끼리 시기 질투 분노 저주하며 다투는 것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가끔은 자기도 모르게 형제를 죽이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살인자 가인은 바로 죄로 타락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제물보다 사람을 보았다.
본문이 일차적으로 죄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가인과 아벨이 어떻게 심판과 구원으로 나눠졌는지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아벨과 가인이라는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먼저 보고 제물을 받을지 결정한 것입니다. 그 전에 두 형제는 각자의 사람 됨됨이에 따라서 제물을 드리는 모습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혹 아벨은 양의 새끼를 드렸고 가인은 곡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았다고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은 자기 죄를 사함 받으려는 대속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각각의 생업이 달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제사를 지냈는데 각기 양의 새끼와 땅의 소산으로 제사 드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추수 감사제였지 자기 죄를 씻으려는 속죄제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아직은 율법을 수여받기 전인지라 동물 대속 제사에 대한 규정이 없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부모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자기들 앞에서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입혀서 용서해준 그 엄청나게 두려웠던 구원의 은혜 체험을 아들들에게 전해주면서 하나님 그분에 대해 가르쳤을 것입니다.
어쩌면 너희가 지은 죄를 용서 받으려면 꼭 짐승을 제물로 바치라는 가르침까지 해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단지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만 말합니다. 두 형제가 어떤 일에든 범죄 했거나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가인도 아벨도 자기 생업의 열매로 감사의 제사를 드렸을 뿐인데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났습니까? 가인이 바친 곡물은 매년 혹은 몇 달 만에 열매를 맺습니다. 반면에 아벨이 바친 양은 새끼를 번식시키려면 몇 년씩 걸립니다.
성경이 곡물이 익자라고 하지 않고 단지 세월이 지난 후라고만 말했으니 가인의 경우는 첫 열매를 바쳤는지 불명합니다. 그런 설명은 오히려 첫 열매는 바치지 않았다고 해석해야 타당할 것이며 그럼 가인은 첫 열매를 바치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가인은 하나님을 잊고 있다가 언뜻 부모의 신앙교육도 기억나고 이러다 혹시 하나님의 벌을 받아 흉년이 드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추수한 모든 것이 자신의 땀과 수고로만 결실했지만 하나님이 훼방을 하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정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과 삶과 인생의 전적인 주인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분명히 “첫 새끼”를 낳자마자 바로 바쳤습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첫 새끼는 앞으로 생기는 모든 새끼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부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을 먼저 받았고 당연히 그가 바친 제물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을 받을 수 없으니 그의 제물도 받지 않은 것입니다. 각자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분인지 인식하는 믿음의 내용에 따라서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바치는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믿음의 제사와 불신앙의 제사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아들였던 기준이 믿음의 제사였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신다”고 해서 다시 제물의 종류를 보고 열납 하셨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만약 가인의 제물이 곡물이었기에 제사를 받지 않았다면 “더 나은 제사”라는 설명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올바른 제사”라고 말해야만 됩니다. 하나님이 제물로 양으로만 받기 원하셨다면 아벨은 올바른 제사이고 가인은 틀린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제사라는 것은 둘 다 자기 생업의 열매로 바친 것은 아무 문제없는데 아벨은 첫 열매였고 가인의 것은 세월이 지난 후의 열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예물을 증거 삼았다고 즉, 예물을 드리는 믿음의 상태에 따라 열납 여부를 정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벨은 믿음의 제사였고 가인은 불신앙의 제사였습니다. 그런 차이가 생긴 것도 말씀드린 대로 가인에게 하나님은 조력자(helper)에 불과했고, 아벨에겐 전적 주인(master)이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아벨에겐 믿음이 있었고 가인에겐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구원도 오직 믿음으로만 나눠졌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의미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율법의 행위로는 그 중에서도 동물 제사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변증하는 책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거의 전부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기득권과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유대사회에서 활동조차 못하게 파문 배척 퇴출했습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를 믿되 유대교의 전통도 함께 지켜야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거짓 선생들이 등장했습니다.
점차 교인들 중에 다시 유대교로 재 개종하는 유대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교회 안의 동요하는 히브리인들에게 동물 제사를 비롯한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함을 변증한 후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독생자 예수님이 영단번의 완전한 속죄 제물로 바쳐진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다시 강조한 책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율법의 행위에 정반대되는 의미로 오직 예수십자가 은혜만이 구원의 전적인 공로가 됨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공적 선행 율법 준수로도 구원에 절대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도 정확히 따지면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에 스스로 동의하고 믿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여서 목회자가 가르친 대로 성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선행 구제 봉사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행위 구원이 아닌 믿음의 구원이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분별하고 판단하여 결단하는 것은 정신적 사고활동으로 그 또한 인간이 행한 행동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예쁜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죄라고 즉, 행동으로 범한 죄의 범주에 든다고 가르친 까닭입니다.
또 다른 믿음은 성령이 역사하여서 자기가 의도 계획 생각 상상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너무나 초라하고 추한 영적 실상을 발견하고 심령에 완전히 뒤집어지는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마15:19)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전 존재가 죄인이므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타락한 죄인이기에 그 심령에 성령이 초자역적으로 간섭하여야만 그 사람 자체가 새롭게 거듭나게 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그런 변화가 주님이 선도적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번째 믿음은 신자 쪽에서 스스로 자기를 의롭게 할 근거 자격 조건은 물론 능력이라곤 전혀 없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불시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해서 죄 사함을 베푸셨다고 절감합니다. 자기가 그분의 구원을 믿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후자의 경우를 말하며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뜻도 바로 이것입니다.
아벨의 심령의 변화에 대해선 성경에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죄의 확장과 발전의 심각성을 설명하는 것이지 구원의 기준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예수님 당대에 당신께서 십자가구원의 비밀을 말로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삼년 간 동고동락하며 배운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당신만의 일정대로 단계별로 이뤄나가되 그에 대한 계시도 각각의 상황에 맞게 점진적으로 조금씩 밝혀나가셨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내용을 하나님이 아벨에게 말씀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하실 필요와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대신 당신께서 아벨을 택해 성령으로 간섭하여 첫 열매를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먹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에게 구원을 베푼 것이며 가인은 그 구원에서 택함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벨의 구원에 관해 주지해야할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두 형제의 경우는 오늘날로 치면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母胎信仰)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부모로부터 여호와에 대한 신앙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동일한 부모의 유전자를 타고난 형제들이 동일한 주거환경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그 두 인생의 방향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각자의 성격과 기질과 천성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것들 때문에 구원의 향방이 결정되었다고 쳐도 그것들은 본인이 스스로 의도 계획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로선 각자가 그렇게 태어남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에 아래 속한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이 가인은 받지 않았고 아벨은 받았다고 먼저 선언하는 의미가 바로 그분이 가인은 택하지 않았고 아벨은 택했다는 뜻으로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8/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