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과 22장이 서로 틀립니다.

조회 수 970 추천 수 1 2020.01.30 05:07:03

사도행전 9장과 22장이 서로 틀립니다.

 

[질문]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있더라”(행9:7)에선 “소리는 듣고 빛은 못 보았다”고 기록된 반면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행22:9)에선 “빛은 보고 소리는 못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서 혼자서 추측해봤습니다. 9장의 경우 저자 누가가 그 사건에 대해 적은 것이고, 22장의 경우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 사건에 대해 말하는 장면입니다. 9장의 경우는 저자인 누가가 여러 증언들을 수집하고 파악해서 추려서 적은 것일 테고, 22장의 경우는 바울이 자신이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했을 것인데 바울이 주변사람들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못 기억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도 의심해보았지만 여러 이유로 그런 것은 아닐 것 같네요.) 다메섹에서 본인이 겪었던 상황(빛과 소리)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 테지만 같은 시각에 주변인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바울이 눈도 멀고 자신이 겪은 상황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잘못된 정보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봤습니다. 아니면 어떤 이들은 빛은 보고 소리만 듣고, 어떤 이들은 소리만 듣고 빛은 못 본게 아닐까도 추측해보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을까라는 반론이 생기네요. 어느 쪽 추측이 옳을까요?

 

[답변]

 

성경의 오류에 대한 이해

 

아주 예리하게 성경의 오류 아닌 오류 하나를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그 차이를 규명해보려고 최선을 다하셨는데 성경해석자로써의 올바른 자세를 갖추었습니다. 이와 같이 단어의 순서가 바뀌거나 연대 족보 수량 등에서 서로 차이가 있는 기록들이 성경에는 가끔 나옵니다. 성경이 글자나 숫자 하나하나까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 첫째 원인은 성경의 최초 원본은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손으로 전문을 베껴 쓴 필사본들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구텐베르그가 서기 1440년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까지는 모든 고대의 책들이 다 그랬고 복음서의 서기관들이 그런 일을 맡았습니다. 성경을 옮겨 적는 필사자들이 피로하거나 부주의로 그 내용에는 지장이 없는 사소한 차이들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에서의 뜻에 비추어 보거나, 같은 성경의 다른 부분 내지 다른 성경책들과 비교해보거나, 여러 필사본들을 대조해 보면 무엇이 잘못인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필사자들이 자기 개인의 의견을 첨부했어도 여러 수도원에서 함께 필사 작업이 이뤄졌으므로 다른 필사본과 비교해 보면 따로 구별해 낼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앞뒤 문맥의 의미의 흐름과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필사자들 모두가 믿음이 신실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임을 확신하기에 첨가할 엄두도 내지 않고 필사에 오류 착오 실수가 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습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소지하여 읽고 있는 성경은 원전과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변증-믿지 않는 형제에게] 사이트의 #22 “성경은 과연 믿을만한 책인가?”에서 더 상세하게 설명했으니 참조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한 책에서 동일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른 설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차이가 있는 대로 살려둔 것은 모든 필사본들 즉, 사실상의 원본들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원본을 저작한 누가가 자기 실수를 미처 몰랐을 수 있으며 최초 혹은 후대의 필사자들이 발견했다 쳐도 의미의 흐름에 별다른 모순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누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일행은 소리와 빛 둘 중에 하나씩만 인지했다는 것인데 그들의 반응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빛을 보고 소리도 들었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했다는 설명으로 충분합니다.

 

행간의 의미를 추적하려면

 

성경이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바울 일행이 둘 중에 하나만 인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바울의 회심 사건에 대한 증인이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사건에 대한 확실한 증인이 없다면 바울 혼자서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질문하신 대로 과연 어느 쪽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추측해볼 차례입니다.

 

성경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과 바울의 개인적인 만남을 네 번(행9:1-19, 22:4-16, 26:9-19, 갈1:11-24)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사도행전 9장만 간접적인 보고의 형식이고 나머지 셋은 바울의 직접적인 고백입니다. 갈라디아서 기록은 아주 간략하게 간접적으로 언급하므로 본 논의에서 제외하겠습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아주 합리적으로 추측하셨습니다. 누가가 9장에선 “여러 증언들을 수집하고 파악해서 추려서 적은 것일 테고”라고 했는데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반면에 바울이 22장에선 “자신이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했을 것인데 바울이 주변사람들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행간의 의미를 추측할 때에 적용해야 할 대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사람이지 특별히 신령하고 거룩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 안의 불신자와 신자들은 오늘날의 불신자와 신자의 믿음의 양태를 그대로 지닙니다. 모든 세대의 인간의 성정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 삶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물질적 기술적인 풍요와 편리만 늘었다 뿐이지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일이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을 오늘날의 상황에 대입하거나,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이성적으로 추론 판단해보면 개연성 있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구태여 심오한 기독교 교리와 신학의 잣대를 갖다 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본인의 체험이 더 정확하다.

 

본인이 체험한 사건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본인이 가장 잘 기억하는 법입니다. 주변 사람은 아무래도 제삼자이기에 당사자가 주관적으로 정확하게 인식 체험한 후에야 기왕에 일어난 일과 상황을 뒤늦게 객관적으로 파악할 뿐입니다.

 

지금 바울로선 생전 처음 겪는 신비한 일인데다 그토록 미워했던 예수님과의 대면이기에 하나에서 열까지 생생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직접적인 고백은 재판정에서 이뤄진 것이므로 거짓 증언을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행들도 바울처럼 열렬한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빛은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들었다면 예수님이 바울에게 맡기신 일에 관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 그 자리에서 일행이 당장에 바울을 해하려 들거나, 더 이상 다메섹으로 가지 못하게 하거나, 체포해서 유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일행과 바울의 관계가 아주 곤란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비슷한 언급이 없고 정반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만 따로 맡길 일이 있었고 나아가 이런 상황까지 미리 배려해서 바울에게만 들리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일행이 그 내용을 모르니까 일시적으로 실명이 된 그를 부축해서 다메섹까지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회심하고 예수 믿는 형제들을 만나서 시력을 회복한 후에는 그들의 보호를 받았을 것입니다. 일행은 바울의 수하이므로 상급자의 회심에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어서 기이하다고 여기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바울의 개종에 대해서 공회에 보고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빛은 모두가 분명하게 보았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빛이 무대 조명처럼 바울에게 강력히 내려 쪼였기에 일시적으로 실명했고 조금 떨어져서 본 일행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었습니다. 또 빛은 멀리서도 볼 수 있으나 소리는 조금 떨어지면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의 의문은 성경이 답을 한다.

 

바울도 자기 입으로 그런 사실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과만 비교하지 말고 26장의 기록도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같은 성경 안의 다른 구절이나, 다른 책의 동일사건 등을 항상 대조해서 봐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경의 의문은 거의 모두가 성경 안에 답이 있습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비추는지라.”(행26:13) 분명히 빛이 동행들을 둘러 비추었다고 바울은 진술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입장에서 거짓 증언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5-18) 바울이 예수님께 들은 바를 전하는데 일행이 함께 들었다면 바로 문제가 생겼을 법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진짜 해석의 결정적인 열쇠가 막상 사도행전 9:7 본문 안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 빛을 보지 못하여”라고 하지 않은데다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한 문장으로 연결된 표현입니다. 그럼 보지 못하여 앞에 “예수님의 모습은”이 생략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소리는 들었으나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다는 뜻입니다.

 

결국 일행들은 바울에게 집중적으로 내려 비취는 밝은 빛을 조금 떨어져서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어떤 소리는 들었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인지 못했고 또 예수님의 모습도 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댓글로 올려주신 한 회원님의 아래의 해석이 아주 정확합니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가 웅장한 굉음이었을지, 단순히 바울과 조금 떨어져 있어서 예수님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만 몰랐을지는 불명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의미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서 구태여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두 구절이 모순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주변 사람들이 '웅장한 굉음만 듣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못 알아 들었으며', 빛은 보았으되 '아무도 보지 못하고' 즉 예수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 했다면 두 진술 다 참이 됩니다. 더불어 바울은 예수님의 말과 부활하신 모습을 모두 보고들은 것이죠.”

 

결론적으로 행9장과 22장의 내용은 전혀 상충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9장은 누가 내지 필사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며, 22장의 바울이 고백한 내용도 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모든 후대 필사본 성경들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기에 제가 추론해본 것은 성경의 행간의 의미를 개연성 있게 추적하는 한 가지 예로서 참조하시면 될 것입니다.

 

1/29/2020

 

 

성경은 과연 믿을만한 책인가?


피스

2020.01.30 22:17:00
*.111.28.73

불확실한 제 소견이긴하지만 제 생각에는 두 구절이 모순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주변 사람들이 '웅장한 굉음만 듣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못알아들었으며', 빛은 보았으되 '아무도 보지 못하고' 즉 예수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인지하지못했다면 두 진술다 참이 됩니다. 더불어 바울은 예수님의 말과 부활하신 모습을 모두 보고들은 것이죠. 그저 개인적인 소견이었습니다.

master

2020.01.31 04:50:09
*.115.255.228

피스님 귀하신 의견 나눠주심에 감사합니다. 불확실한 소견이 아니라 더 정확한 해석입니다. 제가 질문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물어온 데만 초점을 맞추어 성급히 답을 작성하려다 행전 9장이 잘못된 것으로 쉽게 판별해버렸습니다.  지금 9장의 기록을 다시 보니까 너무나 당연히 일행이 "예수님의 모습"만 보지 못했다는 뜻이네요. 상기의 내용을 그에 따라서 고쳤으니 피스님은 물론 이미 읽으셨든 회원님들도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지만 다시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글에 대한 회원님들의 세밀한 모니터링이 정말로 절실합니다. ㅠㅠ  샬롬! 

낭여

2020.01.31 07:50:05
*.164.183.11

 목사님 답변 감사합니다. 더 여러가지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짧게 이렇게 감사의 답글을 달고 마칠까도 생각하였지만, 아무래도 제 생각을 더 명확히 밝히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저도 바울의 다메섹 회심 사건이 틀림없이 있었던 일이고 해당 9장과 22장에 주변인(일행)의 반응에 대한 엇갈린 기록은 바울의 다메섹 회심 사건의 신빙성/신뢰성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해당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의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변인들의 반응은 사실 중요하지 않고 바울이 빛을 보고 소리도 들었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에도 정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굳이 제가 질문을 드렸던 이유는 둘 중 어느 것이 진실일까, 혹은 모순이 아니라 둘 모두를 포함하는 결론이 있을까, 또 그 결론에 합당한 추론/설명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호기심이 주된 첫번째 이유이고, 둘째로는 이러한 성경의 오류(처럼 보이는 것들)와 관련하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즉,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되는지를 이 문제(9장과 22장의 불일치)와 관련해서 어떻게 매끄럽게 적용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제 추론이 맞아서 바울이 잘못 안 것을 기록한 것이라면 또는 누가가 잘못 알아서 틀리게 기록한 것이라면 성경의 영감과 관련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고민입니다. 목사님께서 해당 답변에서도 말씀해주셨고(1. 동일한 성정, 2. 중요한 문제가 아님) 또 이 사이트에 성경의 영감 관련 다른 좋은 글들도 많이 올려주셨으니 이 부분은 제가 찾아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제 처음 추측과 목사님의 답변을 연관지어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앞에서 밝혔듯이 제 호기심에 의한 질문이여서 결론이 어느쪽이든(빛만이든, 소리만이든, 제3의 결론이든)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진리나 본질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어느쪽이든 합당한 추론이 제시된다면 가능성이 열려있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저는 9장은 누가가 여러 증언을 수집해서 기록했고, 22장은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을 기록했다. 하지만 바울이 동행들에 대해 말한 것은 바울 본인이 아니니 그들이 겪은 바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9장(빛은 못보고 소리만)이 맞을 것이다 라고 추측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덧붙이자면 누가는 다메섹 당시 바울의 동행 본인들로부터 증언을 얻어서 기록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추측일 뿐이고 제가 역사적인 사도행전의 당시 구체적 기록 상황이나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제 추측의 진위여부는 모릅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답변 속에 드신 근거들이 제 처음 추측과 다른 결론을 가리킨다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합니다. 본인이 본인의 체험을 더 잘 기억한다고 하셨는데, 제가 처음 추측에서 9장의 결론을 내렸던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 본인의 그 생생한 체험으로 인해 당시 주변 상황을 돌아볼 경황이 없었고, 예수님과의 신비로운 대면으로 인해 당시 동행들이 바울과 동일한 체험을 했는지 알아볼 여유나 그런 생각조차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동행이나 주변인들로부터 그 때 동행들은 어떤 체험을 했는지 전해들었는데 소리만 듣고 빛은 못본 것(9장)을 빛은 보고 소리는 못들은(22장) 것으로 잘못 전해들은 것이 아닐까 라는 추측인 것이죠. 즉, 바울은 본인의 체험에 대해서는 생생히 정확히 기억했지만 동행들의 체험에 대해서는 바울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르게 전해들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는 당사자인 일행 본인들로부터 증언을 받아서(만약 그랬다면) 동행들의 체험에 대해서 정확히 기록했을 것이다는 추측입니다.

 

 제가 처음 질문 드렸을 때 바울이 잘못 기억했던 것은 아닐까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씀드렸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바울은 신비로운 체험을 했고 예수님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했으리라는 것이 그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굳이 재판이 아니더라도) 거짓 증언을 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던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거짓 증언이 아닙니다. 동행들의 체험에 대해서는 바울은 당사자(본인)가 아니고 제 삼자이기 때문에 전해들어 알고 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거짓증언을 할 수 없었다는 물론이고 거짓증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26장의 경우는 함께 읽었지만 바울이 다메섹 사건은 말하는데, 동행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13절도 연관지을 수 있었네요. 하지만 26장 13절에서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on me and my companions)을 둘러 비추는 지라'라고 했는데 해당 발언은 바울의 시각에서 본 발언입니다. 즉 바울의 시각으로는 해보다 밝은 빛이 바울과 동행들에게 비추었다는 의미이죠. 하지만 그 빛을 동행들도 보았는가(감각/지각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6장 13절의 경우는 9장과 22장의 불일치에 별다른 영향도 없고 또 9장과도 22장과도 전혀 모순이 안되는 구절이라고 봅니다. 

 또한 해보다 밝은 빛이라고 하였는데 엄청나게 강한 빛으로 추정됩니다. 그런 강렬한 빛을 본 바울은 실명하고 못 본 일행들은 해가 없었다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소리만 듣고 빛은 보지 못했더라면 일행이 바울을 저지했을 것이다'라는 추론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일행과 바울의 거리로 빛과 소리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행들과 그렇게 멀리(빛은 보이고 소리는 안들릴 정도로) 떨어져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거리 상으로 안들릴 여지가 있을 정도로 작게 말씀하셨을지도 의문입니다. 둘다 성경 내에서는 알 수 없는(말하지 않는) 부분이고, 직관적으로 생각해봤을 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이동하는 문화가 아닌 이상 일행끼리 뭉쳐서(붙어서) 갔을 것 같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실 때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근거는 없습니다). 아무튼 거리 때문에 빛과 소리의 지각 여부가 결정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거리와는 무관하게 누구에게는 소리나 빛을 지각하게 하시고, 누구는 지각하지 못하게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따라서 목사님의 답변에서는 '소리만 들었다면 일행들이 바울을 저지했을 것이다'라는 추론 외에는 제 처음 추측의 결론을 뒤집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충분히 타당한 설명이 있으므로 빛만 보았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스님께서 새로운 3의 설명을 제시해주셨는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더 정확한 해석 같습니다.

피스님의 댓글을 보고 9장 7절의 '아무도 보지 못하여'가 아무도 빛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인지 즉, '아무도'가 보는 주체로서 일행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일행이 보는 대상을 가리키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후자의 경우(보는 대상)라면 '아무것도'가 아니라 '아무도'라고 했으니 빛처럼 사물이 아니라 사람과 같은 인격체 즉 예수님을 보지(인지하지) 못한 것이 되므로 정말 참으로 모순이 없게 되더군요. 그래서 다른 번역 성경을 보았습니다. NLT 성경을 찾아봤는데 (9:7) 'The men with Saul stood speechless, for they heard the sound of someone's voice but saw no one!'. no one saw가 아니라 (they) saw no one이니 정말 후자의 경우가 맞더라고요. 22장도 함께 찾아봤는데 (22:9) 'The people with me saw the light but didn't understand the voice speaking to me' 목소리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피스님 말씀대로 9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과 22장의 목소리가 바울에게 말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 모순되지 않네요. 또한 9장에서 일행들이 예수님을 인식/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22장에서 빛을 보았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고요. 정말 피스님 말씀이 맞네요. 감사합니다. 이 댓글의 뒷부분에 와서야 정말 그러한지 찾아보고 적은거라서 댓글의 앞부분들이 그다지 쓸모없게 되었네요. 아까우니까 그대로 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질문하기 전에 여러 번역본을 살펴보고 질문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추가로 제가 부활 변증 관련 책들을 읽어보면 바울의 다메섹 만남도 예수님이 부활 후 다른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과 동일하게 놓고 얘기하던데 바울은 예수님이 승천 후 보이신데다가 빛과 소리를 통해서 보이셨는데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여주신 것과 같게 취급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9장 7절이 예수님이 직접 모습도 보이셨다는 근거 구절이 될 수 있겠네요. (아마 또 다른 구절들도 있겠지만요)

 

 아무튼 답변 달아주신 목사님과 귀한 의견 주신 피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master

2020.01.31 10:37:32
*.115.255.228

낭여님과 피스님 두 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마치 성경공부 클럽을 만든 것 같아서 너무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런 활발한 상호 토론을 통해서 말씀을 더욱 정확히 이해하고 그로 인해 은혜도 더 깊어지길 소원합니다. 제가 안 그래도 영어번역본을 추가로 첨부해야지 생각했는데 낭여님이 친절하게 이미 다 설명해주셨네요. 

 

낭여님께서 이왕에 자신의 의견에 대해 추가로 설명해주셨네요. 전체적인 의미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다른 관점도 있을 수 있으니 같이 연구해보자는 뜻으로 제 의견도 개진해보겠습니다. 아래의 제 의견은 사실은 위 글을 수정할 때에 첨부하려 했다가 글이 너무 복잡하게 길어지는 것이 싫어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들인데 마침 보완하려 했던 부문에 의문을 표하셨기에 아무래도 밝히는 것이 좋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과의 신비로운 대면으로 인해 당시 동행들이 바울과 동일한 체험을 했는지 알아볼 여유나 그런 생각조차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동행이나 주변인들로부터 그 때 동행들은 어떤 체험을 했는지 전해들었는데 소리만 듣고 빛은 못본 것(9장)을 빛은 보고 소리는 못들은(22장) 것으로 잘못 전해들은 것이 아닐까 라는 추측인 것이죠."

 

이와 정반대의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일을 겪으면 너무나 신기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너희도 소리를 들었는지 곧바로 확인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들은 내용이 자기를 사도로 세운다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서 바울은 더더욱 혹시 주변 사람이 들은 것은 아닌가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로선 모든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신기하고 엄청난 것이라 주변 사람들께 전해들은 이야기까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흘간 봉사가 되어 지내는 동안에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곰씹어 봤을 테니까 머리 속에 완전히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일행들과 그렇게 멀리(빛은 보이고 소리는 안들릴 정도로) 떨어져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거리 상으로 안들릴 여지가 있을 정도로 작게 말씀하셨을지도 의문입니다."

 

저는 우선 바울이 다메섹을 향해 예수 믿는 자를 체포할 열정에 가득 차서 적극적으로 앞서서 빨리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둘째 바울이 아무래도 지위가 높거나 바리새인으로 랍비 역할을 했을 텐데 고래로 지위가 낮은 사람은 아무래도 조금 뒤쳐져서 걷게 되고, 만약 바울의 제자였다면(순전히 가정임) 당시 제자들은 스승의 뒤를 쫓아가며 모든 행동까지 배우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셋째 한 방 안에서도 큰 소리가 아니라면 조금만 떨어진 곳에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피스님이 추측한 대로 주님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바울만 알아듣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리와는 무관하게 누구에게는 소리나 빛을 지각하게 하시고, 누구는 지각하지 못하게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라는 낭여님의 말씀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제가 이와 비슷한 체험을 약 35년 전에 한 적이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간증한 적이 거의 없는데 전후 경과를 생략하고 간략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주일 오후 제가 제 집의 벽에서 황금 빛으로 빛나는 십자가를 아주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바로 곁에 있던 아내에게 보았는지 곧바로 물었는데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너무나 신비한 초자연적인 체험인지라 모든 상황과 과정을 지금도 저는 물론이고 집사람도 아주 생생하게, 정확히 일치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의 기록이 너무나 정미하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그대로만 깊이 묵상해도 충분히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미의 흐름에는 아무 변화가 없음에도 이처럼 구체적으로 묵상 토론하는 것은 그 나름의 깊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위에 무엇보다 성경을 묵상하는 관점과 차원이 넓어진다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홈피의 운영자로서 이런 식의 논의가 계속해서 활발히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샬롬!    

낭여

2020.02.01 23:10:44
*.164.183.11

 목사님 보충 설명 감사합니다. 이해가 미진했던 부분이 해결 되었습니다. 일리있는 추론이고 타당한 반론이십니다. 신비로운 체험에 놀라고 눈이 먼 상황이라 주변을 돌아볼 경황이 없었을 것만큼이나 신비로운 체험에 놀라 주변인들이 같은 경험을 했는지 확인했을 만한 충분한 가능성이 있겠네요.

 

 또한 목사님의 결론의 완전 동의하면서, 토론과 논의를 통해 성경의 정미함을 다시 한 번 알게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은혜롭고 친절하게 답변해주신 목사님과, 새로운 의견을 개진해주셔서 모순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신 피스님께도 감사합니다.

피스

2020.01.31 23:25:30
*.211.20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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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전에 같은주제 토론에서  어떤 분께서 좋은 의견을 제시해준걸 보고 아, 상당히 일리있구나하는 감상을 가졌던 기억이 나서 이번 글에서 나누어보았는데 이렇게 더 자세히 배울수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종종 겉으로보기에 의문이 생기는 구절이 보여도 막상 탐구해보면 더욱 명확하고 완벽하게 들어맞는 신비로운 은혜인것 같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에게는 그것이 걸림돌과 조롱거리가 되지만 믿으려는 자에게는 더 큰 이해를 주시니 말입니다.늘 수고하시는 목사님과 좋은 주제 나눠주신 낭여님 감사드립니다.

구원

2020.02.06 05:32:14
*.76.19.170

사도행전 9장과 22장이 서로 틀립니다.
ㅡ> 틀린 것과 다른 것의 차이
제 나름의 정의입니다
틀린 것: 진리(진실,사실)와 비진리(거짓,허위)
다른 것: 진리 안에서의 나름의 차이
9장과 22장이 서로 틀리다는 표현보다는
서로 다르다는 표현이 어떨까 합니다.
성경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동일한 상황에 대해 저자의 시각의 다름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혹 번역의 과정에서 
정말 틀린 것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9장 24절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개역한글)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개역개정)

ㅡ> 위의 경우처럼 
전혀 다른(틀린) 의미의
번역의 경우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이 들어 
성서 공회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해 
다양한 의견과 진지한 토론이
아주 좋습니다
박목사님의 열린 마음도 좋습니다

열린 채널에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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