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류하는 땅이 유업이 되어있는가? (창27:46-28:4) 

야곱 바로 알기 (5)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27:46-28:4)

 

성경은 하나의 이어진 스토리다.

 

성경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으로 구원을 베풀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 스토리를 적은 책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도 그분의 구속역사에서 자기만의 특정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보면 천륜을 어긴 야곱의 아비를 속인 사건을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에서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피하는 야곱에게 아비 이삭이 축복해주는 내용입니다. 이 또한 외삼촌 집으로 혈혈단신으로 도망가는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하나님께 기도해주었다고 단순히 해석하고 치워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이삭이 맡았던 역할을 찾아내고 그것이 야곱의 인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경이 하나의 연결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인데다 성경원전도 장절의 구분이 없었기에 앞뒤를 죽 이어서 읽어봐야 합니다. 장절의 구분이 사건과 주제 별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자칫 그 개별 사건과 주제에 묶여서 전후 맥락을 무시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비를 속인 사건에 대해선 장절의 구분이 조금 잘못된 것 같습니다. 창세기26-28장을 종합적으로 잘 살펴보면 에서에 관한 진술이 마치 앞뒤로 괄호 치듯이 야곱의 사기 사건을 둘러싸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에서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에서의 이야기로 결말을 내린 것입니다. 그 발단과 결말이 무엇입니까?

 

그 발단은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4,35)입니다. 그리고 결말은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28:8,9)입니다.

 

이 둘을 27장의 시작과 끝에 위치해 놓으면 야곱의 사기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에서의 잘못된 결혼 때문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28:8,9로 결론을 맺은 후에 야곱이 도피하는 사건인 28:10부터 새로운 장으로 시작하는 편이 의미의 흐름상 훨씬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반면에 현재의 구조는 야곱의 사기사건만 27장으로 따로 떼어놓는 바람에 이 사건이 에서의 잘못된 결혼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소지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야곱이 비열하게 사기 친 것만 돋보이는 반면에 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는 억울한 피해자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25장 말미에서부터 이 사건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단서 둘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임신 중인 리브가에게 하나님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예언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장자권을 정당한 양수양도 계약을 통해 에서로부터 취득했습니다. 야곱의 본성이 영악한 사기꾼이 아니라 엄마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아서 여호와의 언약에 반드시 참여하고 싶다는 소망이 아주 컸던 것입니다.

 

팥죽 사건은 에서가 결혼하기 전에 있었다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었습니다. 그럼 에서는 이방 여인들로부터 가나안의 이방풍속에 물들기 전부터 여호와의 언약에 무심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상의도 않고 헷 족속의 여자들을 둘씩이나 아내로 취한 것입니다.

 

성경은 리브가나 이삭 모두 야곱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사실을 앞뒤로 두 번이나 명시해놓았습니다. 본문도 야곱이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했지만 더 중요한 목적이 친척의 딸과 결혼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그 문맥의 주제입니다. 야곱이 아비에게 거짓말한 기사를 읽을 때에 야곱의 윤리적인 잘못보다는 이방여인과 통혼을 금지시키는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이삭의 간절한 소망과 역할

 

현재와 같은 장절 구조로는 이삭도 너무 노쇠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탓에 야곱의 거짓말에 그대로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거기다 장자권 이양이 완료 된 후에 리브가가 이삭에게 내뱉은 본문의 말을 보면 마누라 말에 꼼짝 못하는 공처가처럼 보입니다.

 

리브가는 이삭에게 에서의 두 며느리 때문에 자기 삶이 싫어졌고 야곱마저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면 정말 헛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라고 쏘아붙였습니다.(27:46) 아비를 거짓말로 속여야만 했던 야곱을 감싸주는 변명이자 그 동안 장남인 에서를 제대로 교육 통솔하지 못한 아비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삭은 야곱을 불러서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취하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 아내를 취하라고 당부했습니다.(28;1,2) 아내가 이미 말했던 내용을 다시 되풀이했습니다. 언뜻 가장과 남편으로서 위신이 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살펴본 대로 이삭은 이 사건 후에도 43년이나 더 살았고 시력만 조금 약해졌지 그의 이성과 믿음은 아주 정상적이었습니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삭 또한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에 성경이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후 문맥을 따져가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삭의 신앙여정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청년의 때에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혹독한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창22장)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당신의 생명보다 더 귀했을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가 칼을 치켜들고 실제로 자기를 죽이려 했기에 얼마나 놀라고 황당했겠습니까? 살아나려면 노쇠한 아버지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속으로 주여, 주여 외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어린 양을 대속 제물로 받는 대신에 이삭을 풀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보려는 뜻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살아나려고 발버둥 쳤다면 그 자리에서 심판받아 죽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거역하여 자신을 살려주었다면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와 자기가 벌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도 절감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보상해주신다는 사실도 피부로 철저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또 아들인 자신의 결혼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면서 모든 비용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친척 가운데 신부감을 구해주었습니다.(창24장)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한 후에 큰 기근이 들자 아비 아브라함처럼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통치하는 그랄 땅으로 피신했습니다.(창26장) 그 때에 하나님이 아비처럼 애굽으로는 절대 내려가지 말고 그곳에 거하라고 명령했고 이삭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 땅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정황상 어쩔 수 없이 아비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로 속이며 생명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모든 사태를 바로 잡아주시고 오히려 더 강성해지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절감한 이삭은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26:22)고 감사하며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밤에 나타나 두려워말라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어 네 자손을 번성케 해줄 것이라고 자기 가문을 향한 언약을 재확인해주었습니다.(26:24) 이삭은 그 말씀에 감사하며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이삭은 그분께 순종할 때에 넘치는 은혜를 받는 체험을 여러 번 했기에 절대로 그분의 언약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자기 쌍둥이 아들들도 이방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못하도록 절대로 이방여자와의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 제사에 바로 이어서 성경은 에서가 아비와 아무 의논 없이 헷 족속의 여자를 둘씩이나 아내를 취했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이삭이 에서가 여호와의 언약의 계승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거짓말에 이삭이 속아 넘어가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삭이 그만큼 의심쩍어 했다면 거짓말이 들통 난 이후에는 이미 다섯 번 넘게 추궁한 것을 근거로 얼마든지 축복을 번복할 수 있습니다. 야곱 네가 속임수로 우겨서 어쩔 수 없이 축복했기에 완전 무효라고 선포하고 오히려 야곱을 크게 야단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윤리로는 아비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이고 그것이 정의입니다.

 

그가 번복하지 않은 까닭이 내심 야곱에게 장자권이 넘어가는 것을 은근히 바랐는지 아니면 전적으로 성령이 간섭한 결과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둘 다였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어쨌든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성케 할 선조로 야곱이 합당하고 그렇게 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나님이 이삭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취한 수많은 이방족속 후궁들 때문에 우상숭배가 백성들에게 번졌고 결국은 나라가 두 동강이 났습니다. 지금은 쌍둥이 아들 둘 뿐인데 만약 에서에게 장자권이 넘어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육신적으로는 이스마엘이나 에서의 후손처럼 창성해지겠지만 그들의 선조가 될 장자가 여호와의 언약 밖에 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신앙을 가진 약속의 씨앗들이 순전하게 이어질 수 없습니다.

 

허물까지 들어 쓰는 하나님

 

이삭의 사기 사건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네 명 가족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아비를 속였고, 리브가는 야곱에게 아비를 속일 계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삭도 그랄 땅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속으로 계속 미심쩍어하면서도 야곱과 삼자대면을 안 시킨 것은 원인이 어디에 있던 스스로 자기 자신은 물론 에서를 속인 셈입니다. 사기꾼 집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눈앞에 닥친 곤란한 상황 때문에 혹은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시로 시험에 넘어져 죄를 짓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이 사건에서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에게 인간적인 욕심, 애정, 야망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쌍둥이 동생으로 장자권이 정말로 탐이 났을 것입니다. 리브가도 이왕이면 장자권을 사랑하는 차남이 차지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삭도 에서의 편을 들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특별히 야곱이 그런 속임수를 쓰면서 양심의 가책을 안 느꼈을 리 없습니다. 당장에 다급하니까 그렇게라도 했어야 했지만 이런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비의 추궁을 당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에겐 집안을 우상숭배 가문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한 가지 절대적 기준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 가문으로 계속 승계되어야 한다는 소망과 열정이 마지막 순간에 그 모든 내적인 갈등과 죄책감을 이겨내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생긴 근거도 자신의 믿음이 생기기 전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리브가가 임신 중에 하나님께 받은 자기 집안의 장래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삭도 그런 기준이 확고히 서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순적하신 인도에 따라서 당신께서 예비해놓으신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신앙을 순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음을 실제로 체험한 자입니다.

 

인종차별이 없어지고 누구와도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방여인과의 통혼 금지는 아무 의미가 없고 오히려 미개한 신앙이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나안 땅에 참 하나님 창조주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곤 이삭 가족뿐입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습을 매일 대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만약 에서처럼 그 여인들을 마음에 드는 대로 취하여 함께 살아가면서 부인들로부터 오염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삭 가족은 외눈박이 원숭이들의 동네에서 두눈박이로 살아가는 셈입니다. 우화에선 두눈박이가 자기를 향한 멸시 천대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과 동화되려고 스스로 눈을 찔러 외눈박이가 됩니다. 이삭 야곱 리브가는 매일 모든 이웃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이질감을 매순간 피부로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틀렸고 자신들이 옳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 이질감을 견뎌내었고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베푸신 더 큰 은혜요 축복임을 확신하며 살아갔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뿐 아니라 그들이 더 신나고 재미있게 사는 것 같아서 자기 눈을 스스로 찔러 외눈박이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에서도 부모를 사랑했고 팥죽 사건에서 보듯이 아우 야곱의 말도 순순히 들어주는 착한 형이었습니다. 나중에 동생과 아주 쉽게 화해하는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쌍둥이는 본성적으로 서로 아주 친합니다. 에서가 헷 여인들과 만날 때의 이야기를 야곱에게 털어놓았을 것이며 야곱은 적극 그 교제를 말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에서의 윤리적인 성정은 다른 가족들에게 결코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성경기록상으로는 직접적으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 더 나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결혼 같은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에 여러 갈등과 혼란을 잠재울 궁극적인 기준이 여호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형통과 안일이었고 다른 말로 돈이 주인이었습니다. 동생과 나중에 쉽게 화해한 것도 알다시피 야곱이 미리 보낸 엄청난 재물 때문이지 않습니까?

 

야곱이 장자권을 얻게 되는 데에 이삭 리브가 야곱 세 사람에게 여호와 신앙이 몇 퍼센트, 인간적 욕심이 몇 퍼센트로 작동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 안에 끝까지 붙들겠다는 한가지 소망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완벽하게 부합하도록 그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신자가 받을 진짜 유업은?

 

우리 또한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평생토록 이런저런 실수와 잘못을 계속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게 만드는 온갖 갈등과 마주칩니다. 주님을 따라 가고 싶은 소망과 열정은 있어도 다른 한 편 개인적 현실적 욕심은 물론 알량한 자존심까지 자꾸 솟아오릅니다. 딱 부러지게 그렇게 하면 벌 받는다는 성경의 구체적인 계시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동안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침묵만 하시지 전혀 응답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디로 갈 바는 모르지만 인간적인 방식을 포기하고 여호와의 언약 안에 남아 있기로 결정 시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느냐 자신의 유익으로만 그치는지가 그 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판단이 어려울 때는 자기에게 유익해 보이는 인간적인 방식은 일단 보류하고 하나님이 개입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따르고 싶어질 때마다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영적 씨름입니다. 때로는 영적 분별력과 성경적 지혜가 모자라서 잘못 판단하고 인간적 세속적 방식을 따르더라도 오직 하나님만 놓치지 않겠다는 중심이 굳건히 서있어야 합니다. 범사를 완벽하게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그분은 우리의 하자와 잘못까지 들어 쓰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누려야 할 진정한 축복이자 은혜의 본질입니다.

 

지금 사실은 아주 엄청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이런 믿음에 따라 행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큰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인류를 구속하는 거룩한 역사에 당당히 주역으로 쓰임 받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동역자이자 그분의 전권대사로 세상과 사람에 서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를 통해서 이 땅을 거룩하게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과 이별하며 기도해준 본문에도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그만의 역할이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8:4)고 축복해주었습니다.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거류하는’ 것은 히브리어 마구르는 “일시적인 거주지,, 순례, 우거하는 곳, 나그네가 되다” 등의 뜻을 가지는데 영어로 stranger(나그네), foreigner(외국인)으로 번역했습니다.

 

이삭이 기근을 피해 그랄로 갔을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부가 되었지만 우물 때문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에선 이방인인 이삭이 우물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고 결국 한 곳에서 정착할 수 없는 떠돌이로 그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삭은 야곱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한국에 이주해온 외국인 노동자 같은 삶입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얻은 장자권의 결실이 겨우 그것입니다. 야곱의 인간적 본성만으로는 아버지를 속여야 할 정도의 장자권을 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셔서 당대에는 아무 결실도 없는 장자권을 야곱으로 그렇게 열렬히 소망하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적 윤리와는 다르게 우여곡절 끝에 이삭으로 하여금 야곱의 소원대로 계승시킨 일도 하나님의 역사했던 것입니다.

 

친척과 다시 결혼시키는 하나님

 

창세기의 네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사건이 구속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 거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으로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가나안 땅을 줄 것이며, 지금 이삭과 야곱을 친척과 결혼시키고 있고, 그래서 아브라함까지 이어지는 아버지의 집을 다시 일으키게 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이 떠나라고 명한 것과 떠난 후에 다시 그분께 받은 것들이 사실상 동일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아브라함 가문에 주신 축복의 본질이 현실적 삶의 형통이나 변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짜 복은 이전에는 참 하나님을 몰라 우상숭배하고 있었으나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에는 평생토록 당신의 사랑의 품안에서 살게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당신의 제사장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일에 각자의 시대와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현실적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어서 얻는 복이 현실적 풍요나 변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신자 시절에 우상숭배를 하던 자리에서 즉, 돈만 주인으로 삼았던 인생에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측면에선 세상에서 계속 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 그분께만 속하여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원숭이 비유를 다시 하자면 신자들도 외눈박이 동네에서 동일한 외눈박이였습니다. 그러다 본인은 그럴 의사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먼저 성령으로 간섭해 두눈박이로 바꿔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깨달아 믿게 하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살고 있는 동네는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처음으로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르다는 이질감을 알게 되었고 또 그런 불편함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두눈박이가 되었어도 외눈박이 동네인 이 땅에서 계속 살아야 하니까 매일을 제 멋대로 살아선 안 됩니다. 외눈박이들이 다 쳐다보고 있습니다. 자기 가족, 친척, 나라, 민족과 여러 속한 공동체에 충성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돈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가 누릴 진정하고도 영원한 소유도 아니며 그곳이 진정하고도 영원한 소속체도 아닙니다. 신자의 진정하고도 영원한 시민권과 소유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신자로 불려 나오는 순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나그네와 같이 영적인 거류민이 되어서 살게 됩니다. 내주하신 성령님이 강권해서라도 그렇게 살도록 이끄십니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는 세상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기에 영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 가족 안에서도 이삭 야곱 리브가는 여호와 언약 안에서 나그네가 되어 있습니다. 물질계의 시공간에만 묶여 있는 에서는 여호와의 언약 밖에서 가나안에 어떻게든 정착하려 노력했습니다. 다른 세 사람이 특별히 가장이자 아비인 이삭이 에서를 볼 때에 얼마나 불쌍하게 여겨졌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삭이 에서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미처 몰랐듯이 에서는 이삭의 그 깊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 땅에서 풍요롭고 근사하게 정착했다고 여겼을지 몰라도 그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선 나그네도 아니요 그냥 이 땅에서 썩어 없어질 것들뿐이었습니다. 반면에 이삭과 야곱과 리브가는 이 땅에선 정착 못하고 나그네 같았어도 하나님 안에선 그 신분과 특권이 전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도 당신의 구속사에서 당신의 동역자로 헌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어떤 이질감과 불편함이 생기더라도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면서 여호와를 아는 기쁨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다른 이들이 그분이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그분께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이웃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희생하며 온전한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게 해주고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전도와 선교에만 힘쓰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 외적 증거는 하나뿐입니다. 이 땅이 결코 최종 목적이 될 수 없기에 거류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자신의 신앙체험을 이삭처럼 자식에게 이어지게라도 해야 합니다. 그마저 못해도 됩니다. 자기 자신만이라도 정말로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둔다면 그분의 거룩한 일에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 그분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셔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가 그런 신자 자신에서 시작해서 가족을 넘어 주변에까지 누룩처럼 번져나가게 해주십니다.

 

5/3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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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창6:1-4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에 관한 변론 master 2020-05-27 1208
165 창27:34-40 아들 에서를 저주하는 아비 이삭. master 2020-05-27 397
164 창27:18-29 이삭은 야곱인줄 알고 있었다(?) master 2020-05-27 197
163 창27:1-10 야곱이 아니라 리브가가 이삭을 속였다. master 2020-05-27 670
162 창25:27-34 야곱 같은 신자가 너무 아쉽다. master 2020-05-27 369
161 창세기1:1의 하늘이 왜 복수인가요? master 2018-11-23 640
160 창4:13-15 에덴동산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나요? master 2018-01-12 911
159 창19:8 롯의 행위가 의로운가요? [1] master 2017-07-19 1037
158 창6:3 노아홍수 후 인간수명이 120년으로 줄었는지요? master 2017-07-19 1177
157 창18:21 다 아시는 하나님이 왜 알아보겠다고 하나요? master 2017-07-08 179
156 창세기 3장의 뱀에 대한 추가 질문 master 2017-03-03 4512
155 창세기에 나오는 뱀에 대해서. master 2017-03-03 707
154 창세기의 몇몇 의문점들 master 2015-12-19 2628
153 창11:1 바벨탑 이전에 언어가 나뉘었나요? master 2015-09-28 1140
152 창39:3 요셉의 형통의 절정 운영자 2013-11-12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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