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원죄와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존재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필요성과 보혈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들을 두고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므로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 죽여 구원해 주시는 진리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런 기본적인 뜻보다는 구원 이후의 신자들이 회개의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는 뜻으로 더 자주 소개됩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입술로 구체적으로 고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언제든 용서 받을 수 있으니 안심하고 죄를 지어도 되겠다든지, 죄를 짓고도 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본문이 이해되어선 안 됩니다.
오히려 어떤 죄든 자백하지 않으면 신자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 가능성이 있음을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당신의 면전에서 진정한 죄책감을 갖고 입술로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당신의 긍휼로 덧입기를 소원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시고 또 그럴 때에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그분은 절대로 식언(食言)하는 분이 아니기에 깨끗케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만의 긍휼로 신자의 모든 삶에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그런데 사실 자신의 범죄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신자는 꼭 기도가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회개를 합니다. 죄를 범한 후에 따라오는 수치와 공포가 자연적으로 신자로 죄책감에 눌리게 하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야지라는 결심도 불러 일으킵니다. 제대로 죄라는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경우도 성령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기에 원인도 잘 모른 채 영적인 눌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작 문제는 신자 스스로 죄가 아니라고 속는 경우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흔히 남이 바람을 피우면 간음이지만 자기가 그러면 로맨스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라고 지적했습니다. 자기 죄만 못 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남의 허물은 더 잘 보는 죄까지 범합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라고 한탄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자더러 그 원인을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를 비판하기보다는 남을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당연히 자기는 남보다 선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에 초점을 맞추어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야단친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외식하지 않으면 됩니다. 단순히 겉으로 선한 척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아가 남의 죄에 대해선 관용을 베풀고 자신의 죄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하는 것 만으로도 사실은 부족합니다. 그 정도는 하나님을 부인하지만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불신자도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런 윤리적 실천 이전에 반드시 자기가 남보다 더 선하지 않다, 최소한 같은 수준이다, 나아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가장(假裝)된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똑 같이 죄로 찌든 너무나 불쌍한 존재이기에 자신을 비롯해 다른 모든 사람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도덕 군자는 사람 앞에서 외식 안 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과 사람 앞은 둘째 치고 하나님 앞에서만은 절대로 외식하려 들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남의 죄에 대해 관용하고 자기에겐 엄격 하려는 노력을 수도 없이 해 보았지만 그것마저 도저히 안 되더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며 자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스스로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회개하지 않아도 알아서 용서해 주시겠지”부터 시작해,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의롭지”, “기도하고 말씀 보니 많이 거룩해졌겠지”, “오늘도 선해질 수 있는 실력을 주시옵소서”, “이제 얼마든지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하게 대할 수 있어”, 같은 생각들을 예사로 합니다. 자칫 죄가 아니고 그중에는 성경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도 있지만 교리에 속고, 스스로 속고, 사단에게 알게 모르게 넘어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경고했습니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선 줄로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신자는 첫째도 십자가, 둘째도 십자가, 셋째도 십자가인데 그것을 놓치는 순간 그 즉시 넘어집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주님 앞에 자백해야 할 죄도 바로 이 십자가를 놓치고 있다는 죄이어야만 합니다.
신자가 날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발가벗겨 십자가 앞에 엎드릴 때, 성령님은 알게 지은 죄는 말할 것도 없이 모르게 지은 죄, 스스로 속고 있는 죄마저 몽땅 생각나게 해 주시고 입술로 자백하도록 해 주십니다. 그때 비로소 그 동안 신자에게마저 거짓말쟁이로 서 있던 하나님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1/10/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