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계4:8)
신자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은 무엇을 먹거나 마시거나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은 천국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찬양입니다. 말하자면 어떠한 가식, 과장, 사기, 기만도 포함되지 않은 완전히 순수한 찬양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찬양이 찬양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 특별히 무엇을 찬양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찬양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피조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그분은 절대적으로 순결하십니다. 둘째는 그분의 전능하심입니다. 우주만물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섭리하시는 일반은총을 넘어서, 특별히 당신의 자녀들을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시며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는 능력을 찬양해야 합니다. 셋째는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만이 스스로 자존(自存)하시기에 영원토록 우주만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신자들의 영생의 근거와 보증이십니다.
찬양 예배 때에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우리도 천국 보좌에서 드리는 찬양과 동일한 찬양을 드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마 이 셋 중에 하나만 거의 완벽한 찬양을 드리고 나머지 둘은 찬송가 가사에 나오니까 그냥 건성으로 노래만 따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기도가 응답이 되고, 질병이 낫고, 사업이 형통하면, 즉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으면 저절로 감사와 찬양이 넘칩니다. 그 찬양은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며 하나님도 기뻐 받으십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선 전혀 의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 생활에서 가장 열심과 정성을 바쳐 소원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천국까지 가지 않아도 이 땅에서 거의 완벽한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 만큼의 동일한 세기와 열정과 정서적 반응이 함께 할까요? 쉽게 말해 이런 고백과 감사가 찬양 예배 때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난 주에 이런 저런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주의 보혈로 씻어 주셨습니다. 세상과 죄악과 사단의 온갖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게 해 주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된 것이 저의 의로움과 노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또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제가 가진 얼마 안 되는 것으로라도 섬길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믿지 않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게 간섭하신 성령님 앞으로도 저를 이 일에 계속 쓰임 받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거룩하신 하나님이 진실로 나를 거룩하게 하셔서 주위에 거룩의 빛을 드러나게 하셨기에 더욱 그분만이 거룩하심을 철저하게 깨닫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말입니다. 반면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선 찬양이 아무 가식 없이 쉽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제 삶에서 그분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더욱 깊이 맛보아 알았기에 찬양이 진심에서 우러나올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만남과 그에 걸 맞는 반응을 하며 살았다면 당연히 동일한 감격의 찬양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체험으로 알지 못하고 개념으로만 정리되어 있는 대상에 대해선 절대로 전인격을 동원한 반응이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지성적으로만 아는데 감정적 흥분이 따를 리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고 대신에 기도에 응답 해주는 하나님 밖에 모르면 그 찬양은 1/3의 찬양을 드리는 것밖에 안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어 영생 얻은 것만 찬양해선 안 됩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절대로 변함이 없이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변하는 것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영원하십니다. 그분의 섭리, 간섭, 사랑, 긍휼, 자비 모든 것에 절대로 변개가 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유한한 이 땅에서 유한한 인간인 신자도 얼마든지 영원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영원성에 대해서 온전하게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살았더니 정말 약속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살아 역사하시며 영원하십니다. 환난 중에는 당신의 사랑과 긍휼과 심지어 능력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불평했었는데, 정말로 제가 전혀 예상치도 못하던 길로 인도하셔서 결국은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셨습니다. 당신의 약속은 신실하고 영원하시기에 제가 지금 기도하는 내 자녀와 주위 불신자와 이 사회와 민족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교회를 위한 제목들이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틀림 없이 이뤄질 것을 믿고 감사 드립니다. 제가 그 일에 쓰임 받는다면 제 생명은 언제 어느 때든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당신만이 이 우주 전체에서 홀로 영원하십니다. 할렐루야!”
찬양이란 머리 속에 가득찬 지식에 바탕 해 온갖 악기를 동원해 뛰어난 기교와 실력으로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슴 속에 이미 가득찬 생생한 체험에 근거한 믿음의 고백이 실려 있으면 무엇을 먹거나 마셔도 온전한 찬양이 됩니다. 물론 불신자에 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 받아 찬양하는 것만도 대단하며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매번 그분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과 함께 받으심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 하기를 소원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신자에게 이 두 찬양이 앞서면 나머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도 자연적으로 따라 나올 수 있도록 그분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만 찬양하고 있으면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이땅에선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선 찬양 세 곡을 하는 동안 항상 한 곡은 열심과 진정으로 참여하고 나머지 두 곡을 찬양할 때는 벙어리처럼 가만히 서 있거나 괜히 입만 벙긋거리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닐까요?
1/17/2006
후에 하나님 그분앞에서 찬양할때를 상상해보니 아니, 솔직히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해본다면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워 아마 온 마음을 다해 골수까지 힘껏 짜내어 감사드리는 모습이 아닐까라고 상상해 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