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3:12-14)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다.

조회 수 1486 추천 수 132 2006.01.28 16: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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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2-14)



흔히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 틀림 없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인해서만 구원을 받고 또 그 사랑을 받은 자는 동일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아가 원수도 사랑해야 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또 어떠한 성령의 외적 은사보다도 심지어 소망과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고전13:13)

본문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해서 신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것도 자기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중압감은 의로운 것이며 또 인간은 누구나 나태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담이 없으면 제대로 사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용서는 신자가 그런 중압감을 느끼는 일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용서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솔직히 너무 힘듭니다. 그렇다고 제발 죄책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신자의 인격적, 도덕적, 신앙적 잘못이 아닙니다. 너무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이전에 그로부터 당한 상처와 손해가 남아 있는데 쉽게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라면 원수까지 용서해야 하지만 그 용서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자꾸 사랑으로 용서하려 듭니다. 사랑 만능주의입니다. 용서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흔히 강단에서 가르쳐지듯이 의지력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신자가 갖추어야 할 신앙 상의 덕목을 여럿 설명할 때에는 두 가지 방법이 동원됩니다.  동일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는 것들을 단순히 병렬하는 경우와 어떤 시간적 순서나 중요도에 맞추어서 의도적으로 배열하는 경우입니다. 본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기에 후자에 해당된다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용서에서 사랑은 맨 뒤에 오는 순서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자꾸 사랑하여 용서하려 하지 말고 용서하고 나면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용서는 무엇으로 어떤 순서로 해야 합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있고, 그 후에 용납한 후에 용서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으로 덧입혀야 합니다. 가장 먼저 긍휼과 자비입니다. 상대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보는 마음입니다. 인간적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둘 다 자기를 낮추며 인간적 기질이나 죄성을 죽이고 하나님의 품성을 닮으려는 것입니다.

즉 상대가 불쌍하게 보여야만 용서가 됩니다. 그것도 반드시 그 사람이 자기보다 더 불쌍한 존재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도 십자가 은혜가 반드시 필요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나는 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철저하게 자각해야만 비로소 상대를 용서해줄 마음이 조금 생긴다는 뜻입니다.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상대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이 자꾸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이 작게 보이지 않고는, 즉 상대도 죄인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 자체가 너무나 연약한 죄인으로서 참 불쌍하다라고 느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도 용서가 잘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감정과 이성이 납득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긍휼, 자비, 겸손, 온유는 사실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영혼에서 우러나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완전히 체험한 자라야 진정하고도 순수한 모습으로 그것들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단순히 자기에게 여유가 생길 때에만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신자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생겨야만 그런 의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신자는 이제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도 그런 의를 먼저 실천할 수 있게 된 자입니다. 영혼이 변화되어 신자의 영에 좌정한 성령님이 신자더러 그런 일을 하도록 영을 통해 신자를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신자의 지정의는 죄의 본성이 남아 그 성령님의 인도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오래 참음의 절차가 따라야 합니다. 상대를 관심 있게 지켜 보며 계속해서 기도하여 상대를 용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용납(accept)은 용서(forgive)의 바로 직전 단계입니다. 용납은 쉽게 설명하자면 “그래!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지 뭐. 똑 같이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끼리 미워할 필요가 있는가? 따지고 보면 사실 내가 더 죄가 많고 나도 남에게 그보다 더한 상처와 손해를 입히고 있는데…”라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지우고 자기가 당한 상처와 손해의 크기를 줄여 나가는 작업이 용납입니다.

성경은 용납과 용서를 구분해서 그것도 순서를 따져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납이 안 되면 절대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는 용서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납이 없는 용서는 절대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 용서입니다. 그러나 본인조차 제대로 용납과 용서의 두 과정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고 상대나 제 삼자는 더구나 모릅니다.

그래서 거짓 용서와 참 용서의 차이는 용납이 있었느냐 없느냐로 따질 수도 있지만 더 확실한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용서한 후에 사랑이 생기면 그것은 참 용서입니다. 용납이 먼저 분명히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용서했는데도 사랑이 생기지 않으면 용납은 없이 형식적으로 용서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용서하는 과정을 거치면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여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그럼 용서에서 용납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긍휼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출발로서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상대와 자기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상대와 나를 비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도 십자가를 통해, 나도 예수 안에서 각각 따로 판단해보아야만 긍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중요한 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어쩌면 긍휼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긍휼이 용서와 사랑으로 가는 출발점이지만 인내는 그것들을 열매 맺게 하는 비료입니다. 인내 없이는 절대 온전한 용서와 사랑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솔직히 예수님이 이땅의 죄인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 보았고 지금도 바라 보겠습니까? 오직 긍휼과 오래 참음 아니겠습니까? 사랑스러워 기쁨에 못 이겨 하겠습니까?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으로 오늘도 참고 계시겠습니까? 물론 우리 인간과는 달리 그런 가운데도 그분은 창조주로서의 자기 자식을 바라보는 애끓는 그리고 기뻐하는 사랑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도 온전하게 못하는 아가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아가페 사랑도 여전히 긍휼과 오래 참음이 전제된 사랑임에 틀림 없습니다.

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관점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긍휼과 오래 참음의 종교라고 말입니다. 물론 사랑의 종교가 가장 좋고도 정확한 표현이긴 합니다. 그러나 자꾸 그것만 강조하다 보면 제대로 사랑도 못하면서 사랑에 대한 중압감을 너무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반대로 인간적 사랑을 쬐끔 베풀고는 마치 사랑을 다한 양 교만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는 가장 먼저 사랑을 하려고 하기 보다 끊임 없이 예수님의 긍휼 안에서 자기와 이웃을 바라 보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오래 참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라면 사랑은 제대로 못해도 주님의 긍휼에 동참을 할 수 있으며 그나마 의지력을 동원해 노력해서 달성 가능한 일은 오래 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랑하려 하지 말고 긍휼을 구하고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래 참지 못하면 그 순간 그 동안의 모든 것은 순식간에 거품으로 변합니다.          

1/28/2006

날마다순종

2020.08.20 17:28:44
*.14.99.253

긍휼과 오래참음, 용서등 포괄적인 이 묶음이 바로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그것을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함을 통감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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