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6장
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사무엘하 17장
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ㅡ> 아히도벨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후새를 통해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심과
어떻게 비교하며 이해하면 될까요?
피스님이 이미 정답을 말씀해주셨네요. 14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압살롬을 벌하려고 압살롬으로 후새의 전략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15:31에서 다윗이 그렇게 기도했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고 또 그래서 그 기도 후에 바로 후새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문제는 삼하16:23에서 아히도벨의 계략이 마치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설명이 되어 있으나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란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임으로 하나님께 판결 받은 말씀처럼 항상 지략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그를 중용했었으며 또 그래서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삼하15:12) 삼하16:23은 아히도벨의 평소의 지략의 뛰어남을 설명하는 구절일 뿐입니다. 그는 지략은 뛰어났지만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정세에 따라 변절하는 영악한 인물이었습니다.
아히도벨 아들의 이름과 밧세바 아버지의 이름은 같습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밧세바의 할아버지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헷사람 우리아는 그의 손주사위가 됩니다. 그리고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젊고 용맹하며 충성스러운 손주사위 우리아의 어처구니없는 죽음과 그 죽음 뒤에 감추어진 다윗의 음험한 술수를 알았을 때 아히도벨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요.
아히도벨은 지략과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능력은 다윗과 압살롬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했던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그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도록 하나님께 간구하기까지 합니다.
손녀딸 밧세바가 왕자를 낳고 다윗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동안 아히도벨도 다윗의 정치적 고문이자 모사로서 다윗의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처음부터 알았든, 세월이 흐른 뒤에 알았든, 혹은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던 압살롬이 알려줬든, 우리아를 죽게 한 다윗과 요압의 음모와 야합을 알게 된 뒤 아히도벨은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다윗을 다만 한 인간으로 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도모하며 은근히 손을 내밀었을 때, 기꺼이 그 손을 잡은 까닭도 압살롬을 통해 하나님이 다윗에게 죗값을 치루게 하신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을 다윗의 죄를 다스리는 사람막대기로 쓰신다면 기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부하장수의 젊고 어여쁜 부인을 탐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끝내 그 부하장수까지 죽게 한 다윗의 죄와 악을 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겠습니까.
아히도벨은 뛰어난 지략가답게 결정적인 계책들을 내놓습니다. 급하게 도망가며 궁을 지키라고 남겨둔 다윗의 후궁들을 백주에 범하게 하여 부자간의 연을 완전히 끊게 하고, 정신없이 도피중인 다윗 일행을 급습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눈 앞의 작은 승리에 도취한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책 대신 다윗이 보낸 책사인 후새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반역의 실패를 직감한 아히도벨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뿐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의 이야기에서 충성과 배신 같은 교훈을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충성을 배신으로 갚은 사람은 다름 아닌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아에게서 어떤 흠결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는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우리아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작 죽어야할 죄를 저지른 다윗은 여전히 왕좌에 앉아 왕노릇하고 있고, 오직 충성하고자 했던 손주사위 우리아는 바로 그토록 충성을 바친 주군의 음모에 빠져 허망하게 죽어버렸는데, 그 사실을 아는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 침묵하시는 것같은 이 상황과 현실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계획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다윗은 왕이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윗일 뿐 예수님이 아닙니다.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과 달리 다윗은 인간적인 죄악을 온 몸에 두르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평생 다윗을 보필하며 충성을 바친 요압은 다윗의 유언대로 솔로몬이 즉위하던 해에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아는 충성심 때문에 죽었고, 아히도벨은 정의감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많은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교훈이나 처세술을 배우려 하면 안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모든 인간은 악하다는 것.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악하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아는 자는 극히 드뭅니다. 우리는 모두 의롭게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적어도 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의롭게 여깁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제사를 지내던 유대인들이 그랬고, 오늘날 교회 다니며 선을 행하고 있다고 믿는 신자들이 그렇습니다. 의를 행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의로워지기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며 희생합니다. 그러나 의는 행함이 아닙니다. 생각이나 태도도 아닙니다. 의는 오직 존재를 가리킬 뿐입니다.
아히도벨이 선지자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신통하고 영특한 전략가였다는 뜻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심판하시려고 일부러 그가 똑똑한 아히도벨 대신 후새의 전략(이중스파이)을 따르게 만들어서 전쟁에 패하게 만드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