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4:1-18) 구원 받을 믿음을 볼 수 있는가?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행14:9)

 

바울의 설교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이 관리들을 동원해 박해하며 추방했다.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힌 사도들이 현실의 고난과 박해를 두려워할 리는 없었다. 복음의 생명력도 세상 권력의 훼방에 주춤할 만큼 무력하지도 않다. 인근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로 흩어졌으나 그곳에서도 전도의 열매들이 많이 맺혔다. 여전히 유대인들의 훼방은 끈질겨서 두 사도들을 모욕하며 돌로 치려해서 다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항상 넘치도록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땅 끝이었다. 때를 얻든 못 얻든 복음만 전하면 그 열매는 성령님이 맺게 해주신다. 또 많이 맺힐수록 어둠의 세력의 방해는 더 극심해진다. 현실적 고난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한 환난은 늘어날수록 사실은 신자가 헌신 충성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마음은 시원케 된다.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해 걷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 바울이 그를 보니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바울의 영성이 아주 뛰어난 것인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었다”고 했다.(13:48b) 하나님의 예정을 바울이 꿰뚫어 알 정도인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즉,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에 대한 설교를 간절한 마음으로 경청했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그는 율법으로는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대표적인 피해자(?)다.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8b)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여기고 있던 자였다. 그에게 예수님은 외모로 차별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당신의 부활하신 구주임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듣는 순간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겠는가? 자신의 전부를 걸만했다. 설교자는 청중 중에 누가 마음을 열고 있는지 단상에서 다 보인다. 그는 청중 중에 가장 열렬히 부활의 소망을 드러내었다. 그 순간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인도로 바울은 치유를 행했는데 사실은 구원을 선포한 것이다.

 

그 기적을 본 이방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이 땅에 강림한 신으로 오해하고 동물 제물을 바치고 화한을 드리며 경배하려 들었다. 바울은 자기들은 성정이 같은 사람일 뿐이니 절대로 사람에게 경배하지 말라고 극구 말렸다. 지금 십자가 복음에 대한 설교를 하고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 것은 이런 헛된 일을 하지 말고 제발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뜻이었다고 설득했다. 자신들의 능력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참 하나님을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나 일반 우상과 절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구원은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진심으로 연합하는, 이 경우에는 자기 마음을 완전히 열고서 복음을 순전하게 받아들인 자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했다.

 

덧붙이기를 그분을 너희가 모르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했다. 비를 내려 추수케 하여 그 음식과 기쁨을 주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너희 삶의 모든 면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기쁨으로 너희 마음을 만족케 한다고 했다. 피조세계와 인생만사를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살피면 그 모두를 주관하는 이가 따로 계시고 또 그분으로 인해 너희도 지금껏 이 땅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그분이 바로 너희를 구원하려고 예수를 보냈으니 제발 너희도 이 환자처럼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 복음에 마음을 여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지 얼마나 신께 치성을 바치느냐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치성을 드리는 것은 받을 복만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반면에 지금 치유를 입은 자는 아무런 행한 일도 바친 것도 없다. 오직 마음을 열고서 복음을 들은 것뿐이다.

 

지금도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자는 바울처럼 목사가 아니 일반 성도도 알아볼 수 있다. 평소에 진실로 십자가 복음에 죽고 산다면 전하는 말씀이 반드시 살아 역사한다. 그럼 또 누가 순전하게 자기 마음을 여는지 보인다.. 오늘날 교회나 목회자가 정말로 순전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지 성도들로 치성까지 바치길 은근히 강요하며 함께 대형교회를 이루어 자기들 의를 자랑하려고 시도하는지 주님은 엄격히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10/28/2020)


녹두새

2020.11.04 05:25:32
*.92.33.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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