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3-7) 잃어버린 양이 과연 누구인가? 

돌아온 탕자 시리즈 (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3-7)

 

성경 해석상의 결정적 오류

 

많은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을 때 꼭 고쳐야 하는 잘못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앞뒤 문맥과 연결하지 않고 한 절씩 떼어서 읽는 것입니다. 심지어 한 문구나 단어 하나의 뜻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럼 따로 떼어낸 부분에 묶여서 전체적인 논리의 흐름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은 원래 장절의 구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이어서 저작되었기에 당연히 또 반드시 앞뒤로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비록 같은 이야기별로 문단을 나눠놓았어도 여전히 한 문단만 따로 떼서 보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본문의 뜻은 이해했을지 몰라도 정작 저자가 강조하려는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본문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서론 격인 1-2절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하게 된 배경과 이유조차 해석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이해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하나만 따로 떼서 읽기에 대체로 불신자를 한 명이라도 전도하면 하늘에서 큰 잔치가 열리므로 신자는 전도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이해하고 치웁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포함해 세 비유를 말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사회가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리와 죄인과 식사 교제를 나눴습니다. 자연히 정치지도자인 사두개인들과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두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라고 했듯이 왜 당신께서 그 규정을 어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양은 단순히 불신자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있는 가장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주시러 오신 메시아로서 그들을 너무 사랑하기에 끝까지 찾아서 당신께서 품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비유에서 목자는 일차적으로 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전체 내용도 신자더러 전도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들을 찾으면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뒤에서 비방할지라도 당신께선 하늘의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하며 식사 교제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 두 구절이 별 것 아닌 내용처럼 보여도 그것과 연결시켜서 해석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성경을 나무인 본문만 읽지 마시고 그 전후를 관통하는 논리적 흐름을 파악하여서 전체 숲도 볼 수 있는 습관을 꼭 들이셔야 합니다.

 

비유보다 주제에 주목하라.

 

거기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특성을 잘 몰라서 이런저런 오역을 낳습니다. 이참에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지침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비유 자체의 의미에 집착해선 안 됩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강조하려는 어떤 주제를 쉽고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적 체험적 사례를 들어서 보충 설명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비유의 기능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우리말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가 그것입니다. 낫을 보면 한글 철자 기역의 모습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역 자를 기억하려면 낫을 떠올리라는 것이지 낫의 모양을 모르겠거든 기역 자를 떠올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낫에 관한 속담이 아니며 낫은 기역 자의 시각적 예시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낫의 모양은 누구나 익히 다 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이 속담에서 낫이 가진 역할로 그치고 정작 강조하려는 주제인 기역 자는 따로 있습니다. 비유 자체의 내용만 자세히 해석해서 가르쳐선 안 됩니다. 그럼 누구나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낫의 모양을 다시 설명해주는 꼴이 됩니다.

 

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도 현장의 청중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 추가 설명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가나안의 별칭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목양은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직업이었습니다. 목수였던 예수님보다 청중들이 양 치는 일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유는 그래서 주님이 그 비유로 강조하려는 주제부터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비유와 별도로 가르쳐주셨기에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비유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에 그 주제를 언급하거나 제자들의 질문에 맞추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본문도 비유의 끝에 주제를 분명히 밝혀놓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이와 같이’라고 했는데 앞에서 말한 비유의 내용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너희가 이미 잘 알 테니 내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잘 헤아려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보라.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 주님은 세리와 죄인과 식사 교제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당연히 세리와 죄인들을 뜻합니다. 그럼 또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그들과 밥 한 끼도 나눠먹지 않는 일반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라는 표현이 어딘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이 제자들에게 왜 너희 선생은 율법을 어기느냐 물었습니다.

 

그 식사 자리를 마련한 마태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고 증언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누가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더 알기 쉽게 기록했습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회개시키려 왔지만 의인인, 정확하게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은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는 건강하여서 회개할 것이 없고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께 복만 받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반대로 죄가 많기에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하기에 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동일한 상황인지라 예수님은 이 비유로서 이전에 말했던 동일한 진리를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기준이 무엇인지 또 그 기준에 따라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을 베푸는 그분의 기쁨에 대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아니라 기껏 너희 스스로 제정한 규칙을 어겼다고 나를 이단으로 정죄하려 드는데 제발 내 심정이 어떠한지 헤아려 보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일일이 영적으로 해석하지 말라.

 

최근까지도 성경은 하나님이 그 저자들에게 직통계시로 말씀하신 것을 저자는 받아쓰기 하듯이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연히 성경의 모든 진술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령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해석하면서 비유의 단어 하나하나에 일일이 영적의미를 부여하려 들었습니다. 그 결과 정작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주제와 아무 관계없는 의미까지 해석자가 임의로 갖다 붙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를 전문용어로 알레고리칼 한, 우의적(寓意的)인 해석법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 할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기에 그런 해석 자체는 의롭고 은혜롭게 받아들여집니다. 다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에 적용하면 낫은 벼를 베는 유익한 도구이나 날카로워서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고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을 다시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 진술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며 유익하고 바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기역 자를 깨우치는 일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비유를 거의 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성도는 물론 목회자도 이런 원리를 몰라서 그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반면에 이 비유를 들은 현장의 유대인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체험을 많이 했기에 예수님의 결론을 듣자마자 하늘에서 잔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비유 자체를 그들에게 다시 설명해줄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리와 죄인이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앞으로 나아올 때에 바로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차원의 기쁨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고 영적으로도 뛰어나서 지도자가 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틀림없이 예수님이 지금 자기들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있다고 눈치 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즉,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지 않고 제사만 드리는 사람은 비유를 역으로 유추해보면 바로 자기들임을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

 

비유를 주제와 상관없이 일일이 별도의 영적인 의미를 붙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주제에 비추어서 역으로 따져볼 수는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비유의 더 깊은 의미를 추적하여서 신앙생활에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설명 드린 대로 비유에서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는 세리와 죄인을, 아흔 아홉 마리 양에는 유대인을, 목자에는 예수님을 대입해서 그 뜻을 살펴봅시다.

 

양을 한 마리와 아흔아홉의 숫자로 구분한 것은 아무래도 세리와 죄인의 숫자가 일반 유대인들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예수님이 일반 유대인과 아흔아홉 번 교제했다면 세리와 죄인은 한 번만 교제했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은 일반 유대인들을 절대로 무시 혹은 경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단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이라도 너무나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천국 백성의 숫자를 늘리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당신과 동행했던 자 단 한 명이라도 천국에 데려가 함께 잔치를 벌이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덜 기뻐하신다고 했지 구원하지 않는다거나 저주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세리와 죄인을 상종도 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그들이 당신을 조롱 멸시함에도 당신께선 그들과도 교제를 나누신다는 것입니다. 그 양들도 당신의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세리와 죄인을 포함한 백 마리의 양을 갖고 있었습니다. 백 마리이므로 충만한 숫자의 당신의 백성들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나아가 온 인류를 아무런 차별 없이 동일한 기쁨으로 바라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쪽에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은 활짝 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사무엘을 통해 백성들의 눈치를 보느라 잘못된 제사를 드린 사울 왕에게 번제보다 순종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우상에게 절한 죄와 같고 왕이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도 왕을 버릴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삼상15:22) 그런데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교제 할 때에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뜻을 배우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런 뜻의 말씀을 그 전에 하신 적이 없고 처음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 왕에게 경고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더러 형식적 제사를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진정으로 소원하지 않으면 너희부터 잃어버린 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실체?

 

이전에 저에게 믿음이 좋은 신자가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만 찾으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누가 돌보느냐고 물었습니다. 교회 밖 불신자 한 명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교회 안에 남아있는 성도들의 양육도 중요한데 예수님의 비유가 조금 불합리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주 예리한 질문이나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비유의 해석 원칙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성경 해석의 첫째 원리는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당시의 문화 관습 상황 등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백 마리의 양 떼를 치려면 두세 명의 목동이 필요했고 최소한 양을 치는 훈련된 개라도 있었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도 나머지 목동이나 그 개가 양 떼를 축사까지 데리고 갈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에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돌보지 않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당시 청중들도 양 치기 관습을 잘 아니까 그런 뜻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 양들도 목자의 기쁨 가운데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서 가장 주목해야할 사항은 따로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단순히 길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 땅은 주로 건조한 광야이고 목초지는 높고 가파른 언덕이나 산지에 있었습니다. 양들이 간혹 계곡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숲속에서 헤매다 맹수에게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하자 사울 왕이 크게 염려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는 동안에 맷돌로 사자와 곰도 쳤으니 골리앗도 그런 짐승처럼 물리칠 수 있다고 담대히 대답했듯이 말입니다.(삼상17:36,37)

 

따라서 양은 벌써 죽었다고 단념해도 될 정도이고 오히려 목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서 데리고 왔다는 뜻입니다. 양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것도 그만큼 사랑하기도 하지만 다른 목자들은 이미 축사로 돌아갔기에 빨리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계곡에 떨어졌거나 맹수에게 물려 크게 다치는 바람에 양 혼자 걸어갈 수 없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죽었던 양이 다시 살아온 셈이니까 비록 한 마리지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바로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졌거나 맹수의 밥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양이라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처해 있는 그들의 바로 그런 위치 때문에 혼자선 도저히 다시 목자나 기존의 양 떼를 찾아와서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들과 유일하게 교제를 나누시는 참 목자인 예수님이 아니면 도무지 구원의 가망이 없습니다.

 

그럼 반대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깊은 흑암의 계곡이자 무엇이든 포식하는 맹수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그러하듯이 이 비유 또한 예리하다 못해 아주 풍자적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간의 완악함이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므로 우리 심령을 깊숙이 찔러 쪼개는 권세가 있습니다.

 

로마를 인정해준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이방인과 교제를 했으니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인 로마 제국을 인정해준 셈입니다. 실제로 한 번도 로마를 대적하거나 야단치거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할례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식사 교제할 때 손을 씻지 않았고 부정한 음식들도 양껏 먹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함께 식사했고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고쳐줄 생각도 안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은 정말로 신성모독자요 율법을 어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과 이적에 드러난 신적인 권능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기껏 율법을 핑계 삼아서 말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무참히 패배해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정치와 종교지도자로서 백성들 앞에서 잔뜩 체면을 구기고 자존심이 아주 크게 상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은 급격히 늘어나서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을 없애버리려고 작당했습니다. 자기들이 받았던 모욕을 되갚아주려고 수치스런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려고 모든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평소에는 민족의 원수라고 증오하고 정죄하던, 지금도 예수님더러 식사 교제한다고 자기들이 비방했던 세리와 죄인보다 훨씬 더 사악한 로마 당국과 헤롯왕과도 서슴없이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되어져 갈 사항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다 아시고도 십자가로 올라가는 모든 일정과 과정을 당신의 완벽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당신께서 주도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자기 생명이 위험한 줄 알고도 기어이 양을 찾아오는 참 목자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더라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너무 기뻤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세리와 죄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 랍비가 자기들을 정상인 취급해서 교제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지금 하나님은 자기들을 끝까지 찾아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유대 사회에선 평생을 하나님의 반대편인 사탄의 자식으로만 취급되어서 도무지 소망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때로는 자기들도 많은 죄를 지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구원을 소망하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마에 분홍글씨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찍혀버렸기에 인간 세상에선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죽지 못해 그저 살아가야할 신세입니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쓸쓸히 죽거나 맹수의 먹이가 되는 길만 남았습니다. 진짜로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은 인간의 잘못된 관습일 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아무 관계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들도 원래 백 명의 양떼에 속했다가 맹수 같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훼방으로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분의 백성이었다고 인정해주었습니다. 당신 앞으로 나아오면 하늘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유대인들은 비방 멸시에 주눅이 들었는데 그들은 지금 예수 앞에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그들은 예수님 권세에 힘입어 당당하게 집회의 앞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 비유의 뜻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는 반대의 의미로 깨달은 그들은 주님의 기쁨에 동참했습니다. 비로소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고 또 예수님이 실현해줄 것이므로 그분만 따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 랍비와 함께 한다면 유대 사회의 어떤 비방 멸시 핍박도 견딜 수 있다는 믿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동안 유대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 되었기에 도리어 참 목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지난 고난조차 감사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소망은 없다.

 

코로나로 작금 모든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궁핍해졌을 뿐 아니라 정서적 혼동에 빠졌고 신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시쳇말로 표현하면 모두가 ‘멘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미국 TV에 관광을 홍보하는 광고가 부쩍 늘어났습니다. 올 하반기쯤에는 백신 접종이 완료되어 사회적 면역이 실현되면 이 사태가 종식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 정상으로 돌아가면 그동안 집에 갇혀 격리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여행부터 갈 것에 대비한 것입니다. 모두가 어서 빨리 그렇게 되도록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보도도 하나 접했습니다. 지난주 미국 CNN TV의 뉴스에서 한 여기자가 사람들이 병원 근처도 가보지 못하고 주차장에서 죽어간다고 눈물을 흘리며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스크도 쓰지 않는 코로나에 무심한 자들을 크게 원망한다고 탄식했습니다. 이번 사태로 인간의 완악한 민낯이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초기에 휴지나 손세정제와 생필품을 먼저 사재기 하려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우울증과 분노에 휩싸여 서로가 서로를 헐뜯기 바쁘고 사람들의 마음도 갈가리 찢어졌습니다.

 

사태가 오래 지속되어 비즈니스를 못하게 되자 정부의 비상조치가 자기들만 차별한다고 비난합니다. 그 어려운 사정은 딱하지만 모두가 힘듭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자기만 앞세우는 뿌리 깊은 인간의 이기주의만 판을 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먼저 희생해야할 교회도 그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떼들만 있는 불신 세상에 목숨 걸고 끝까지 찾으러 가야하는 목자 역할은 잊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전도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 잘도 해석하면서도 말입니다. 서로 도와야만 할 비상사태의 와중에도 이런 판국인데 정상생활로 돌아간다고 과연 인간이 온전해질 수 있을까요? 그 여행 광고가 노리는 것처럼 언제 코로나가 있었느냐는 듯이 신나게 놀고먹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육신적으로 힘든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 비유에 따르면 세리 같은 직업이나, 이방인 같은 인종이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정치적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다 같이 영적으로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우리 모두가 인생이 참으로 덧없고 죽음 앞에 너무나 연약하며 무력하다고 느꼈습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과 그 십자가 은혜를 모르면 모두가 잃어버린 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완악한 인간에겐 끝까지 긍휼이 넘치는 예수님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처절한 죽음의 절망을 맛본 자만이 예수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계곡 밑에서 맹수의 아가리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던 양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찾아와 건져주셨습니다. 천국의 큰 잔치가 바로 나로 인해 벌여졌고 지금도 그분의 크나큰 기쁨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분의 영원히 변함없는 기쁨 안에 속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 잃어버린 양을 향한 주님의 애끓는 심정을 헤아릴 줄 알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주변에 알게 모르게 육신적으로는 물론, 더 중요하게는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단순히 전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딱딱한 교리를 전하기만 해선 안 됩니다. 주님의 기쁨 안에서 은혜와 평강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그 기쁨이 너무 좋고 귀해서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저절로 눈물이 나서 예수님의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기도라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바로 목자이신 주님과 멀리 떨어져 다시 또 길을 잃어버린 양이 된 것입니다.

 

(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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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요6:16-21) “내니 두려워 말라.” master 2021-06-28 33
132 (눅15:1-2, 17:7-10) 예수 천당 불신 지옥. master 2021-06-28 36
131 (마27:45-50) 예수부활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master 2021-04-05 79
130 (눅15:31,32) 인간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은? master 2021-04-05 20
» (눅15:3-7) 잃어버린 양이 과연 누구인가? master 2021-03-02 34
128 (눅15:1,2) 올해를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master 2021-03-02 14
127 (요7:37-43)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가? master 2020-12-26 52
126 (욘1:11-16)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master 2020-10-2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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