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기도와 상달되는 기도란?

조회 수 134 추천 수 0 2021.03.02 17:10:05

깊은 기도와 상달되는 기도란?

 

[질문]

 

제가 그동안 다녔던 거의 모든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1.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은 아니다. 2. "깊은"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들으신다. 또 1과 2는 주로 기도의 분량이나 시간과 연결하여 설교합니다. 즉 매일 일상가운데 대화하는 식의 기도는 의미가 없(적)고 시간을 정해 1-3시간 깊은 부르짖음과 간구를 해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합니다. (특히 새벽)

 

기독일보의 한 목사님의 글에 의하면 그분은 "처음 한 시간 동안은 울부짖으며 주님께 간구"하고 다음에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는 깊은 단계에 들어가면 조용히 기도"하는 게 좋다며 3,4시간정도 하면 기도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고 설교하십니다. 또 그분은 "기도의 분량에 따라 각기 능력은 다르게 나타난다. XXX 목사님 같은 분들에게 큰 능력이 나타나는데 다른 점은 무엇일가? 우리가 그분과 다른 것은 기도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에게는 종교적 열심을 강조하는 것으로밖엔 안 들립니다.

 

1에 관하여는 성경이 분명히 하나님이 안 들으시는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나 죄를 가지고 구하는 것 등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분량이나 위의 목사님의 주장대로 기도의 형식과 방법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오히려 외식하는 기도를 경고)

 

2에 관하여는 깊은 기도와 얕은(?)기도가 따로 있는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요? 분명 예수님이 새벽에 피가 땀이 되도록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기도만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봐도 그러한 것 같고 중요한 것은 신자의 중심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진정함등이지 시간이나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힘들지만 시간을 따로 내어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기쁘고 좋은 일이지만 그 교제자체를 사모해서 해야 하지 기도를 더 잘 응답받기위해서 내지는 더 큰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적인 기도에 대해 목사님의 조언을 기다립니다.

 

[답변]

 

먼저 기독일보에 기고하신 어떤 목사님의 글에 대해선 제가 직접 그 글을 읽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므로 따로 언급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성경적 원리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정답은 아래에 인용한 다윗이 지은 시편 139:1-6만으로도 사실상 충분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1-6)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시고 어떤 일에서나 함께 해주시는 은혜를 찬양하는 시입니다. 심지어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절)라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하늘에 올라가도 음부에 자리를 펴도 함께 계시므로 도무지 그 은혜를 헤아릴 수 없고 주님의 눈을 피할 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너무 기이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에 비추어보면 이런 고백이 그의 체험적인 생생한 진실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시작하여, 사울의 추적을 피한 도피 생활, 밧세바와 간음 사건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 말년에 잘못된 인구조사로 인한 이스라엘의 심판 등등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고 그와 동시에 그가 기도하지 않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 중에 기도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삼상30:6-8)

 

다윗 일행이 사울의 추적을 피해 잠시 의탁했던 블레셋 가드의 아기스 왕을 만나고 온 사이에 아말렉 족속이 다윗의 거주지인 시글락을 침공해 불사르고 처자들을 다 잡아갔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원망하고 돌로 쳐 죽이려는 다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고 제사장의 조끼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 응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길어야 수십 초 동안 순간적으로 속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후 곧바로 추격하여 아말렉을 무찌르고 처자식을 되찾아 왔습니다.

 

만약 이 때 다윗이 정식으로 자세를 잡고 몇 시간이고 기도했다간 제대로 추격도 못하고 처자식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기도 중에 최고로 짧게 기도하여 응답받은 사례일 것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자신의 행동과 혀의 말은 물론이고 마음의 생각까지 여호와가 알고 계신다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명했습니다. 하루에 서너 시간이 아니라 24시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과 일상 업무 중에도 영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그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도 기도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도나 교회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나 깨나 염려하고 소망하는 것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세성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그렇게 내주해주십니다. 그런데 신자의 기도와 말과 생각을 모를 리는 없습니다. 기도는 하는 순간 바로 상달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응답입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은혜로운 약속을 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무엇이든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당신께서 시행할 것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상달될 수 있는 깊고도 오랜 기도를 해야만 시행하겠다고 하지 않았고 그런 계명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이 단순히 기도 끝에 붙이는 기독교식 기도의 후렴문구가 아닙니다. 이 본문 안에서의 뜻만 해도 아들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이 기도를 듣고 시행하는 일로 인해서 성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어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는 말씀을 덧붙인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여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순전한 믿음으로 기도해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모든 권세로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도 제자들이 온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따르게 할 때에 그 권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목적과 방향으로만 기도해야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권능이 발휘되지 못하고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며 필요하면 대신 간구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예고하러 온 천사들에게 끈질기게 간구한 것이 기도로 응답 받은 대표적인 예로 가르쳐져 왔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하지 말아달라고 구했지만 결국 그 열 명이 없어서 소돔은 멸망했습니다. 이때는 기도가 상달된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와 직접 대면하여서 기도했는데도, 그 중에는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도 계셨는데도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19:29) 아브라함이 마지막에는 열 명까지 낮추어 끈질기게 간구한 까닭은 조카 롯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각까지 아시고 소돔은 멸망시켰으나 롯은 구출했던 것입니다. 서두에 인용한 다윗의 시편 고백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도는 신자가 입술로 고백하는 순간 하늘에 상달됩니다. 심지어 마음으로 개인적인 소망과 이웃과 교회와 하나님을 위한 일을 자신의 정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수행하고 싶다는 생각만 해도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기도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서너 시간 동안 기도하여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아주 깊은(?) 상태에 이르러야만 상달된다면 응답은 둘째 치고 상달되는 기도라도 할 수 있는 신자는 극소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신자의 기도와 순종에 따라 이뤄지는데 이 땅에서 하나님은 거의 아무 일도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수족을 묶는 어리석은 짓을 행한 셈입니다.

 

기도에서 응답의 관건은 그 형식과 시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용에 달렸습니다. 기도하는 내용을 깊은 경지에 이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한 미국 신학자가 기도는 세 단계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달라(give me)고 기도하다가, 성경의 진리를 조금 알게 되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를 바꿔 달라(change me)고 기도하다가,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나를 사용해 달라(use me)는 기도로 바뀐다고 말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것이 깊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첫마디도 바로 그 뜻이지 않습니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가장 먼저 하늘에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절)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 예수님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절)고 경고했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것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 없는 내용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기도에서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또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잘못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응답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마지막 단계인 나를 들어 사용하라는 모범적인 예가 성경에 있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11:28,29) 바울에게 날마다 마음에 눌리는 일이 모든 교회와 연약한 성도들을 위한 염려라고 합니다. 그는 쉬지 않고 주님의 일을 위해서 생각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바로 앞부분에 그 동안 당한 고난들과 실제로 죽을 뻔했던 여러 고비들을 나열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들은 이 염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런 군급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다윗처럼 아주 짧은 기도를 했었고 그대로 응답되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어지는 32,33절에 다메섹에서도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도망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바울은 자신의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그의 기도의 내용도 그에 맞추어 완전히 깊어진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일을 위한 기도만 했기에 주님이 그에 합당하게 복음의 열매를 많이 열리게 해주었습니다. 바울은 정말로 자신의 현실적 형편보다도 교회와 성도가 올바른 믿음 안에 서는 일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신자들더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감히 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나를 들어 사용해 달라는 가장 성숙한 기도는 바꿔 말하면 자신의 전적인 무력함과 무지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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