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16-21) “내니 두려워 말라.”

조회 수 1637 추천 수 0 2021.06.28 13:35:54

(요6:16-21) “내니 두려워 말라.”

오병이어 시리즈 (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6:16-21)

 

오병이어와 무관한 사건(?)

 

오병이어 사건은 네 복음서가 다 같이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요한은 기적보다 그 후 있었던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하늘에서 주는 떡”에 대해 논쟁한 것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정말로 가르치고 싶었던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문장 구성으로만 따지면 본문은 기적과 떡에 관한 가르침 사이에 위치한 삽입구인 셈입니다. 그 내용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중에 일어난 기적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라 언뜻 오병이어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과 유대인들과의 논쟁 사이에 일으키신 일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왜 하필 이 때에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일으켰을지 즉, 오병이어와 연결되는 의미는 없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넌 적이 제법 많았을 텐데 꼭 그 시간과 그런 상황에서 이 일이 일어났어야만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병이어 기적 후에 유대 대중들이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니까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피신하셨습니다.(15절) 대체로 어떤 집회든 끝난 후에는 질의응답이나 느낀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도 주님 스스로 피하면서 제자들더러도 바다를 건너가라고 재촉했습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이 귀찮거나 피곤했을 리는 없습니다. 백성들의 열광적인 추앙을 거절하려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신께 열성적으로 반응했던 이유가 예수님이 보실 때는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튿날 배를 타고 바다 건너까지 쫓아 왔습니다.(22-25절)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 후에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이하게 여기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다음 날까지 많은 이들이 열광적으로 좇아온 이유는 그만큼 오병이어 기적에 받은 감동이 컸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당장은 피했지만 틀림없이 백성들이 다시 따라오리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피했던 이유는 그들의 열정에 잠시 찬 물을 끼얹음으로써 천천히 합리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나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좌우되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약한 베드로

 

오병이어 기적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겠습니까? 비록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관하셨지만 그들도 직접 자기 손으로 떡과 고기를 나누면서 그 기적을 완성시켰습니다. 당연히 그 감동은 백성들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며 또 그래서 백성들의 그런 움직임에 앞장서서 동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정작 주님이 찬물을 끼얹어서 감정을 식혀야 할 대상은 백성보다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걷는 또 다른 큰 기적을 제자들에게만 따로 베풀어 주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갈리리 호수가 내륙에 있는데도 배가 뒤집힐 정도로 큰 폭풍이 불었다는 성경기록에 조금 의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라고 부를 정도로 아주 넓었고 무엇보다 해수면보다 약 230미터나 더 낮은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도차가 커서 북쪽 고원지대의 찬바람이 종종 급하게 호수로 흘러들어오면서 호수를 감싸는 분지 안의 따뜻한 공기와 섞여 격한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저었다고 하고(막6:48) 마태는 풍랑 때문에 고난당했다고(마14:24) 증언합니다. 보통 바람이 불면 돛을 올려서 바람결을 이용해 오히려 더 빨리 항해합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었다는 것은 배에 돛이 없을 정도로 적었거나 배는 비교적 큰데 돛을 올리지 못할 만큼 바람이 더 셌다는 뜻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배가 바다 가운데서 오고 가도 못하는 큰 난관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런 판국에 한밤중에 사람 같은 형체가 물 위로 걸어오자 제자들은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오해했다고 말합니다. 물 위를 사람이 걸어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라 너무나 당연한 반응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자 제자들이 기뻐서 배로 영접했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20,21절)

 

그러나 바람 소리로 인해 제자들이 주님의 음성인 줄 확신할 수 없었거나 유령이 그렇게 속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는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 확실하다면 나를 명해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즉, 유령인지 예수님인지 확인하려 했다고 기록합니다.(마14:28) 베드로로선 주님이라면 자기를 물에 빠져죽게 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어제 오병이어 기적에 함께 참여했던 것처럼 물 위를 함께 걷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라고 답하자 베드로가 물 위로 뛰어들었고 처음 얼마 동안은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배 위에서 쳐다보던 제자들은 과연 그 일이 가능할지 가슴을 졸이다가 실제로 베드로도 물 위를 걷자 너무 신나고 기뻤을 것입니다. 자기들도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어볼 것을 하고 후회도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두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만 믿고 행동으로 순종하는 일이 늦어지면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축복도 그만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강풍에 몸이 약간 기우뚱하자 덜컥 겁이 났고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졌다고 합니다.(마14:30) 그럼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주님과의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똑바로 주님만 바라봤다면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일상 삶에서 고난이 없을 수 없으나 고난을 허락하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는 고난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신 주님만 바라본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고난의 연단을 통해 본인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열매를 풍성히 수확할 수 있고 고난 중에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몰라도 하나님의 영광도 반드시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다급하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쳤고 주님이 곧바로 손을 내밀어서 건져주고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비록 그 시간은 길지 않았겠지만 배 위의 제자들은 정말로 조마조마하게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손을 잡고 무사히 배 위에 오르니까 크게 기뻐할 수밖에 없고 그 후로는 당연히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주목할 사항은 주님이 물에 빠지려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깨우쳐주셨다는 것입니다.(마14:31) 믿음의 반대어는 불신인데도 주님은 의심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의심하면 믿음이 작아질 수밖에 없고 믿음이 작아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면의 정신적 의지력을 강하게 해서 믿음을 성장시키려 하나 의심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의심이 들어오면 믿음이 줄어드니까 의심을 없애야만 믿음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옵니다. 주님 외에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하면 의심이 생기고 그럼 주님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은 줄어들고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이 땅의 삶을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혈과 육의 싸움으로 몰아갑니다. 그 싸움을 이기기 위해선 모든 생각을 오직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에게서 물에 빠졌던 체험을 전해들은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돌아온 탕자 비유를 통해 오직 한 주인만 섬기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지금 주님만 바라봐야 할 시선 안에 바람과 파도로 채웠습니다. 자기를 주관하는 주인을 바꿔버렸고 그러자 물에 빠지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그를 완전히 주관했던 것입니다.

 

창조주 예수님

 

요한은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발생시간을 밝히지 않았지만 마태는 밤 사경(마14:25) 즉, 동이 트기 전인 새벽 3-6시 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 쯤 약 5 킬로미터 정도 전진했을 때에 주님이 물 위를 걸어왔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훨씬 먼저 출발했고 산으로 피신했던 주님은 오래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그들을 따라잡은 것은 산에서 내려 올 때나 물 위를 걸을 때나 축지법 쓰듯이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오셨다는 뜻입니다. 마가가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셨다고 기록했는데(막6:48) 기도하는 중에 제자들에게 닥친 위험을 알고서 급히 구원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주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마가는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랐다고 합니다.(막6:51) 놀란 이유는 다섯 가지로 먼 거리를 곧바로 쫓아왔고, 마침 위험할 때에 오셨고, 물위를 걸었고, 베드로도 걷게 해주었고, 풍랑까지 멈추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가는 그 이유를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막6:51,52) 그 다섯 가지 이유 외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전후 사정을 잘 살펴보면 주님의 크신 능력을 황망 중에 잠시 잊어버렸다는 단순한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물질계의 질서 있는 운행을 위해서 중력, 질량, 부력, 유체역학 등의 법칙을 제정해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그런 법칙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인간도 그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주님이 그랬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갈릴리바다의 풍랑까지 조종 통제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분이었던 것입니다.

 

고대인에게 가장 크고 두려운 대상은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자연 현상 내지 재앙입니다. 재산은 물론 수많은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갑니다. 그래서 원시종교인 토템사상이나 정령주의(animism)에서 자연 자체나 그 배후에 있는 가공할 힘을 신으로 모시고 섬깁니다. 어떻게든 화를 거두고 잠잠케 해달라고 치성을 열심히 바치지만 아무 소용이 없고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자연재앙이 닥칩니다. 그럼에도 자기 위로라도 삼으려고 지역마다 고유의 자연현상을 두고 신으로 모시고 최대한 정성을 바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의 경우는 조금 특이했습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주관 통치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실제로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을 때에 모세가 구원자로 와서 아홉 가지의 자연 재앙을 통한 기적과 마지막 열 번째는 애굽의 장자들이 생축의 초태생까지 죽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거기다 모세의 인도 아래 여호와가 갈라주신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걸어서 건넜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호와가 자연 현상을 통해 대적들을 물리쳐주는 은혜들을 맛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구태여 자연을 우상 신으로 모실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열 개의 엄청난 이적을 보고도 홍해를 마주치자 크게 두려워하며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지금 제자들도 여호와가 자연을 주관 통치하시는 줄은 알지만 막상 풍랑이 닥친 데다 아직까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몰라서 두려움부터 생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껏 모든 이들이 두려워했던 자연현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제 조종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래서 예수님에이배에 오르자 제자들이 절하여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고 사건 기록을 마무리합니다.(14:33) 자연 재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통제하여 잠잠케 하는 예수님을 보고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표시로 주님께 절을 한 것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사람들이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고 경배하려 하자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라고 극구 만류했습니다.(행14:14-15)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꾸짖거나 만류했다는 언급이 없으므로 제자들의 고백이 진리라고 시인해준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고백을 들으려고 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는 시점에 주님이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말16:16)라고 최초로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고백했습니다.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물 위를 걸어봤던 이 경험이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마가가 주님이 떡을 떼던 일을 잊고 마음이 둔해졌다고 말한 더 정확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선 떡 다섯 개로 남자만 5천명이나 되는 수많은 청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주님은 아무 재료도 없이 가공공정도 거치지 않고 무에서 유로 떡을 수없이 만들어내신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선 그 큰 능력에만 관심을 쏟았지 정작 예수님이 하나님 본체시라는 진리를 미처 몰랐기에 마음이 둔해졌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다 이제 자연마저 통제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크게 놀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절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건너야 할 전환점

 

이 일은 제자들만 목격하고 또 체험한 기적입니다. 그런데 내일 당장 백성들이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바다 건너까지 쫓아와 계속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 할 것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이 땅의 세속왕국의 통치자입니다. 사사 시절에 왕이 없어서 주변국들로부터 계속 시달림을 받는다고 여기고 전쟁을 잘 치루는 강력한 왕을 원해서 사울을 세운 뜻과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를 받았고 경제적으로는 로마와 유대 성전 두 곳에 세금을 내야 하니까 아주 쪼들렸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자기들의 모든 고난을 한방에 해결해줄 것 같은 최고의 능력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전에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울의 체격에 반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에게 완전히 매료된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직 성령이 강림해서 천국 복음의 비밀을 깨닫기 전이라 예수님에 대한 기대는 동일했습니다. 로마를 물리치고 새 왕국이 건설되면 자기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부귀와 권세를 누릴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세상의 대중은 항상 고난에서 건져내어서 호의호식케 해줄 영웅을 구해왔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태어날 때의 로마 황제 아구스도는 지중해 세상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전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평화와 풍요의 시대를 제국 치하 전체에 활짝 열었기에 복음(유안겔리온)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로 그 아구스도 시대에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참 복음으로 아기 예수를 탄생케 했습니다.(눅2:1) 동일한 맥락에서 제자들마저 예수님이 자기들 왕이 되어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때에 주님은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더러 당신께서 현질적 풍요를 보장해주길 바라는 기대들 완전히 접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일 대중들이 왕으로 삼으려는 요구를 거절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미리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 논쟁을 하나 빠트림 없이 경청하고 그 의미를 잘 새겨보라는 것입니다. 어제 바다 이편에 있었던 기적과 내일 바다 저편에 있을 대화를 연결하여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밤의 사건을 그 전환점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부터 오병이어 기적의 그 외적 풍성함으로 인해 느꼈던 큰 기쁨을 오늘 밤 안으로 다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기적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제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본질은 아주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방금 너희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 당신이 온 천하를 만드시고 살아서 주관 통치하는 우주의 왕 창조주임을 똑바로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백성들은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려 해도 너희만은 나를 우주의 왕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같은 이름

 

예수님이 “내니 두려워말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이 스스로 당신을 지칭하는 고유의 표현입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인데 영어로 치면 “I am.”입니다. 출애굽기 3:14에 모세가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자 여호와께서 직접 가르쳐준 당신의 이름입니다. 원어는 주어와 Be 동사로만 이뤄졌기에 우리말로 번역하면 바로 ‘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에서 이름이 없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태초에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영원토록 거룩하게 통치하시는 그분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도 도무지 설명이 안 되며 붙여서도 안 됩니다. 어떤 경건한 이름이라도 오히려 그분을 제약 부족하게 만들 뿐입니다.

 

대신에 그분은 세상에서 따로 불러낸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겐 언제 어디서나 ‘내다’라고 말씀해주시는 존재입니다. 세상에 그 신자 단 한명이 있는 것과 같이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로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 전체적인 규모에만 관심을 쏟는데 사실은 각자에게 돌아간 양은 한 끼 도시락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만 명을 단 번에 먹인 주님의 큰 능력보다 단 한 명도 굶는 자가 없게 만드신 그분의 개인적인 사랑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별히 신자가 고난이나 죄악 중에 불안 눌림 실망 좌절 등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은 내가 바로 네 곁에 있으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시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십니다. 당신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광스런 목적지로 당신께서 기어이 도달하게 해주십니다. 지금 같이 컴컴한 한 밤중에 큰 풍랑 속에서 오지도가지도 못할 때에 주님의 ‘내다’라는 음성만큼 힘이 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천 마디 위로나 격려보다 ‘내다’ 한 마디로 완전한 평강과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아직은 “내다‘에 숨겨진 예수님의 참 정체성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요한 사도는 지혜와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자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물 위를 걷는 사건 이후로 주님과 유대인들 간에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진정한 떡에 대해서 논쟁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다시 의도적으로 “I am”(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형식을 여러 번 사용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설명해주십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고 정확히 기록했습니다.

 

주님은 총 7번을 그렇게 설명하셨는데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과 생명(11;25), 길과 진리와 생명(14:6), 참 포도나무(15:1)가 그것입니다. 이 일곱의 공통적인 의미는 당신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구원한 자들의 삶과 인생을 끝까지 거룩하게 보호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성에 관해서 수없이 가르쳤을 텐데도 요한이 일곱 가지의 에고 에이미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최소한 그 일곱 정체성으로 이해해야만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면 그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행해야 할 한 가지

 

요한이 오병이어 기적 자체보다 주님과 유대인의 논쟁을 더 자세히 기록한 뜻을 오늘날 신자도 진지하게 새겨야 합니다. 먹고 마실 것이 풍부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내 삶을 그와 다른 거룩한 차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힘도 써보지 못하는 자연재앙이나 이번 코비나 사태 가운데도 그분은 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십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의 고난을 알지 못하고 도와줄 수도 없고 하나님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을 때라도 그분은 물 위를 걸어서라도 곧장 다가오십니다.

 

주님이 ‘내다’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주여’라고 한 마디만 외치면 충분합니다.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해도, 고된 인생길의 풍랑이 타고 가고 있는 배가 침몰할 위기에 빠졌어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체질과 심지가 연약해 순간적으로 불안해질 수 있어도 우리 시선에서 사방은 막아버리고 예수님께로만 집중하면 됩니다.

 

제자들은 바로 직전에 유령이라고 두려워했다가 곧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해주어서 안심하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이 땅에 도깨비처럼 오신 유령이 아닙니다. 그분의 기적이 신기루나 인간의 눈을 속이는 환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일들을 행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순전한 믿음의 신자에겐 각각의 상황에 맞는 그분만의 방식으로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역사상 가장 하나님답게 행하셨던 일은 바로 십자가 대속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러 실제로 내려오셨습니다. 고난과 공포와 갈증과 절망에 빠져 길 잃은 당신의 양을 한 마리씩 끝까지 찾아서 참 생명을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품 안으로 옮겨주십니다. 그 후 일생동안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하셔서 하늘에서 주시는 위로와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뿐으로 그 십자가 사랑을 세상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선행과 구제에 열심을 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더 이상 세상의 것으로 좌우되지 않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인생이 되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늘의 보물을 소망하며 영생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삶의 목표 방향 방식이 세상과 달라진 것 외에는 증거할 방안이 없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모습과 똑 같은 최소한 닮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니 염려 말라는 이 은혜로운 말씀을 매 순간 듣고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실력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얼마나 자주 듣고 있습니까?

 

(6/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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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master 2021-09-04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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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master 2021-09-04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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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요6:28,29)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 master 2021-06-28 137
44 (요6;22-27) 물질이 썩는 진짜 이유? master 2021-06-28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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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비유에서 나무가 교회를 뜻하는지요? master 2021-04-05 74
41 (요7:37-43)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가? master 2020-12-26 400
40 요12:20-23 헬라인과 예수님 영광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요? master 2020-09-04 222
39 요15:16-20 코로나 사태가 신자들의 합심기도로 끝나지 않는다. master 2020-05-25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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