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살고자 하면 죽어야 한다."
병법에서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기껏해야 백년 남짓한 육신의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은 영원하신 창조주의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왜 죽어야 하는가? 사실은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에게 생명이 없다는 진리를 참으로 알아야 진정으로 참 생명을 간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자신이 이미 죽은 자라는 진리를 아는 것에서 출발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도 반드시 그 진리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년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시아의 모든 이가 자신을 버렸노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바울을 버리고 복음으로부터 떠난 이유는 바울의 모난 성격 때문이거나, 유대사회의 압박, 혹은 로마당국이나 지방관의 탄압, 또는 믿지 않는 다수 대중의 핍박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떠난 이유는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지성소 휘장의 찢어짐이 상징하듯, 죄와 악으로 타락하여 이미 죽은 자가 돼버린 모든 인류가 영원한 새 생명을 간구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바울과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한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며 기꺼이 크리스찬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더 기쁘고 좋은 소식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오늘날 신자들이 그렇듯, 복음의 겉모양만을 보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했을 뿐이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알아갈수록 참 진리와 자유, 구원과 천국, 창조주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영생, 등등 복음이 약속하는 모든 좋은 것들이 반드시 자기 부인, 즉 자아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자, 그들은 온갖 이유를 들어 하나 둘 복음으로부터 떠납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도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자던 유대인들이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에 모두 등을 돌리고 떠난 것처럼, 복음이 약속하는 진리와 영생의 열매를 탐내어 선뜻 믿음을 고백했던 이들이 복음이 복음이 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인 자기를 부인하는 길 앞에서 모두 등을 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들에게 "잘 하고 있다"고 한 마디만 했으면 그들은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비록 그들을 복음 안에 붙들어 둘 수 없을지언정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인이 빠진 복음, 자아의 죽음이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수없이 편지를 보내 참 믿음이 무엇인지 변증하고 또 변증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를 원했기에 그를 떠나고 만 것입니다.
복음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예수와 똑같이 죽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마음은 "그것만 빼고 무엇이든지 다" 입니다.
기실 우리의 종교적 열심은 '죽기 싫어서'입니다. 어떻게든 살아 있는 자의 행위를 드러냄으로써 존재를 증명하고 가치를 인정받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의 열심은 복음의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헛된 열심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마가복음 8장 35)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자는 순교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이 참으로 죽은 자임을 아는 자 모두를 뜻합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영생은 없습니다. 그는 이미 스스로 의로워졌고 이 세상에서 그가 받을 상을 다 받았습니다. 영생은 오직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죽은 자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