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영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순간 죽었습니다. 그 후손인 우리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아벨은 영이 살아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고는 영이 살아 있을 수 없으니까요. 아벨은 분명히 아담의 씨로 잉태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은 양이 피흘리고 죽어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자기의 자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벨은 죽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아벨의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그의 제사를 받으십니다.
가인도 감사와 정성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땅의 소산을 얻게 하신 창조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다만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가인의 관심은 오직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그 땅을 정복하여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첫 명령에만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서 비롯된 죄와 악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지위와 권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하나님의 창조는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대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벨이 제물을 통해 죽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처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가는 것이 곧 신자의 예배입니다.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멍에를 같이 메고 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거듭난 자가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 길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몽환적인 빛이 들어오는 천장 높은 예배당이나, 파이프오르간의 장중한 음악, 혹은 열과 성을 다해 부르는 찬송가와 기도소리 같은 분위기에 속으면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가인의 제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지내던 유대민족의 역사와 예수님 이후 이천년 기독교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잖습니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누구든 예수와 함께 있으면 그것이 곧 예배입니다.
아담의 영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순간 죽었습니다. 그 후손인 우리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아벨은 영이 살아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고는 영이 살아 있을 수 없으니까요. 아벨은 분명히 아담의 씨로 잉태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은 양이 피흘리고 죽어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자기의 자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벨은 죽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아벨의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그의 제사를 받으십니다.
가인도 감사와 정성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땅의 소산을 얻게 하신 창조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다만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가인의 관심은 오직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그 땅을 정복하여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첫 명령에만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서 비롯된 죄와 악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지위와 권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하나님의 창조는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대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벨이 제물을 통해 죽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처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가는 것이 곧 신자의 예배입니다.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멍에를 같이 메고 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거듭난 자가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 길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몽환적인 빛이 들어오는 천장 높은 예배당이나, 파이프오르간의 장중한 음악, 혹은 열과 성을 다해 부르는 찬송가와 기도소리 같은 분위기에 속으면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가인의 제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지내던 유대민족의 역사와 예수님 이후 이천년 기독교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잖습니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누구든 예수와 함께 있으면 그것이 곧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