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자살이 자기의의 발로라는 나의 생각은 얼마나 터무니없고 모자란 것이었던가. 유다의 그 깊은 절망과 좌절을 어리석은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는 아마도 제자들 중 가장 똑똑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며 능력있는 자였으리라. 그가 돈궤를 맡은 이유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측불허인 스승 예수는 그렇다 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제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예산에 맞춰 일행의 숙소를 정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유다는 그가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하고 최대한의 수완을 발휘하여 삼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했다. 수산나와 요안나 같은 후원자들이 때때로 큰 돈을 내놓기도 하고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이들이 기꺼이 숙소를 제공하고 저녁을 대접하기도 했지만 그런 날보다는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으리라.
복음서에 그 이름이 자주 언급되어 우리에게 친숙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수제자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 일행의 실질적인 2인자는 돈궤를 맡은 유다가 아니었을까.
일행의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며 메시아의 등장을 고대하던 유다는 다만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스승의 말에 이성을 잃었다. 유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며 기염을 토하다가 예수에게 사탄이라는 최악의 꾸중을 들었으면서도 예수님이 잡혀가던 날에는 흥분하여 제사장의 종을 향해 칼을 휘두르다가 스승의 제지를 받았다. 유다와 베드로만 그랬을까? 다른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즘 말로 멘붕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제자들은 믿지 못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같이 앉아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뒤에야 스승의 부활을 확실히 믿었다.
그러나 유월절 만찬 이전에 이미 절망했고, 또 다른 모든 제자와 마찬가지로 스승의 부활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유다는, 예수가 그 어떤 저항도 없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리자 모든 희망을 놓아 버렸다. 아히도벨이 그랬던 것처럼,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가 원했던 것처럼, 유다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다.
내게는 유다를 욕할 자격이 없다. 비록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고 자살이라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죽음의 방식을 택했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게서 그보다 낫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유다처럼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고대한 적도 없고, 유다처럼 절박하게 온 삶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른 적도 없다. 그렇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런 유다조차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기식대로 해석하다가 엉뚱한 길로 갔는데 나는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좁은 길,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걷고 있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는 예수의 말에서 유다를 향한 절절한 안타까움과 애끊는 사랑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오해일까.
가룟 유다는 참으로 야누스같은 의미심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적그리스도의 예표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에 헌신하여 예수님을 오해해버린 불운의 희생자 같기도 합니다. 성경이 그의 속생각을 들춰주지 않으니 추측의 영역에 남을 수밖에 없겠지만, 어느 쪽이건 기호님의 겸손한 묵상처럼 깊고 무거운 자기 성찰을 가져다주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가 위선과 악의 극치인 적그리스도의 그림자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악인마저도 애처로워하시며 구원하시기를 바라셨다는 뜻이니 그분의 크신 긍휼을 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유다가 자기 의와 자기 정의와 자기 열심에 희생당한 불운의 사나이였다면, 우리 역시 언제든 그보다 못한 자리로 떨어질수밖에 없는 원죄의 노예들이므로 더더욱 주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수밖에 없습니다.
유다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께 감사하도록 묵상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호님. (문득 기호님이 유추하신 시나리오속의 유다를 보니 제가 쓴 가상 종말 소설속의 적그리스도 캐릭터가 떠오릅니다. 그도 태생부터 악마라기보다는 자기 정의 때문에 마귀엑게 속아넘어가는 입체적인 인물이죠.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면서도 그분께 실망하고 그분을 배반한다는 점에서도요)
기호님 묵상글이 너무 은혜스럽네요.
천편일률적인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생략된 그 간극을 따라 소 되새김질 하듯 곱씹고 되새겨 보면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말씀이 주는 메세지를 깨달을 수 있지요.
우리나라의 수동적인 교육의 폐해를 버리고 고민없이 가르쳐 주는 것만 받아 먹고, 생각나는대로 질문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경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고 묵상하다가 한 말씀이라도 깨달아 진다면 꿀송이보다 더 달콤한 성경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고 스스로 신앙이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요.
다시 한 번 기호님의 아주 멋진 묵상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