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를 장려하는 교회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창35:1,2)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한 것을 빌미로 야곱의 아들들이 속임수까지 동원해 히위 족속을 학살하고 노략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야곱에게 큰 걱정거리 두 개가 생겼습니다. 믿음의 가문으로서 그들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도저히 그 사회에 하나님의 영향력을 끼칠 수 없게 됐을 뿐 아니라 언제 앙갚음을 당해 자기 가문이 멸절 당할지 모를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으로부터 벧엘로 가서 당신께 예배를 드리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야곱이 그 음성에 반응하여 행한 조치들, 말하자면 예배를 위한 준비가 흥미롭습니다. 우리에게 큰 환난이 닥치면 주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울부짖으면서 하루 속히 구원해달라는 기도에만 모든 힘을 쏟지 않습니까? 일상적인 경우라고 해서 특별히 나을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자기 소원만 들고 나옵니다. 개중에는 정말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에게 받아갈 것만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또 그분은 신자의 어려움을 방치해 두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구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께 몽땅 책임이 있다고 밀어붙이는 셈입니다. 물론 야곱도 이제 벧엘로 가 단을 쌓을 때 주로 가나안 족속의 복수로부터 가문이 보호 받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그 문제에 목매달지 않고 먼저 예배를 위해 준비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와는 분명 달랐습니다.
바꿔 말해 그는 위기가 닥친 사태의 본질을 우리와 다르게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보호망에 구멍이 난 것이 근본원인이라면 당장에 그것부터 고치라고 기도 아니 떼만 쓰도 됩니다. 반면에 야곱은 그분의 보호망에는 전혀 하자가 없고 사단과 죄악을 막아낼 자기들 믿음의 갑옷에 구멍이 난 것을 알았습니다. 이번 사태가 표면적으로는 세겜의 강간에서 발단되었지만 사실은 자기 아들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영적으로 피폐해짐에 따라 외부의 악에게 빈틈을 보여 죄가 파고들었다고 분석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정말로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34: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나가 가나안 여자들의 의복과 치장에 관심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은연중에 자기도 그렇게 닮고 싶었기에 드러내지는 못하고 혼자서 외출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어서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백주대로 상이 아닌 그의 집에 끌어 들여 강간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디나가 순순히 세겜의 집에까지 따라 갔거나 최소한 처음부터 냉정하게 거절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강간당할 소지를 디나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기 전에 “의복을 바꾸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가나안 족속의 장신구와 화장술을 지우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장신구, 화장술, 의복 등은 자기들 우상의 형상 내지 그 우상에 예배드리는 형식을 취하게 마련인데 이미 자기 딸과 여종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한 이유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라는 의미 외에도 육신적으로도 정결해야 했습니다. 이방족속의 식생활, 생활방식 등은 전부 직간접으로 우상숭배의식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미 그런 관습에 많이 젖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방 신상부터 버리라고 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에게서 떠나올 때에 라헬이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 해왔고 함께 따라 온 종들과 세겜에 머무는 동안에 합류한 식솔들이 틀림없이 신상을 소지했을 것입니다. 아들딸들이 알게 모르게 죄에 연루되는 근본 원인은 바로 우상을 제거하지 않은 것, 즉 하나님과 순전한 교제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신자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겠다는 소원을 가진 것을 꼭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선 안 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아가는 문제 하나만 따로 떼어서 생각해봐도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동시에 다른 우상에게 한 눈을 파는데 과연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럴 수 있다고 가정. 예상, 기대, 간구하는 것이 너무 어리석지 않습니까?
예배의 일차적 목적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그분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후라야 온전한 경배가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신자 쪽의 죄악부터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절대로 잘못과 허물이 있을 수 없으며 죄악과는 공존할 수 없지 않습니까? 당연히 우상과 그에 연관되는 어떤 것도 결코 들고나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신자가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니 괜찮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교제라는 것은 서로 간에 어떤 이해타산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그 상대만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오직 서로가 서로에게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부속, 연관되는 어떤 것도 그 목적을 대체, 변경, 가감시켜선 벌써 완전한 교제가 아닙니다. 신자와 하나님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교제가 온전해지려면 신자는 하나님만이, 하나님도 신자만이 서로의 최우선적, 아니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가 무엇인가 바쳐서 (더) 받아내려거나,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우선적 목표가 되어서도 이미 온전한 교제가 아닙니다. 당연히 참된 경배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상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목적이 아니게끔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은 다 우상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 당신과 교제하러 나오지 않고 그분이 주시는 복이 목적이면 아무리 설교 말씀에 은혜 받고 뜨겁게 찬양하고 간절히 기도해도 여전히 우상 숭배를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응답에 목을 매달아도 우상숭배입니다. 위기나 환난 때에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죽이면 죽으리라”는 말로 반드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아니 모든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로 회복되는 것, 즉 그분만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다급하게 자기 소원만 빌기 일쑤이고 기껏해야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아가려고만 하는 것이 솔직한 실정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완벽하게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 예배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자가 심지어 목사마저 세상 티끌을 묻히거나 스스로 죄에 빠진 채 예배에 참석하게 마련입니다. 그럼 우리 예배가 전부 우상 숭배로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니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예배에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선포되고 또 회중에게 살아 있는 생명으로 역사해야 합니다. 죄악의 흉악하고 교묘한 실체를 여실히 드러낸 연후에 예수님의 보혈로 그 죄를 씻어주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각 성도의 영혼이 풍성하게 소생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세상에서 예배로 나올 때는 엉망진창이었던 그분과의 관계가 예배를 통해 온전히 회복되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야곱이 가장 우려했던 것이 믿음의 가문이면서도 세상에 더러운 냄새를 피운 것이었지 않습니까?
예배에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에 비해 신자마저 그분과의 온전한 교제에 얼마나 많은 장애를 갖고 있는지 반드시 말씀으로 증거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그분이 주시는 현실적 성공과 형통만 강조하면, 진짜로 그분이 주셨는지 여부는 둘째 치고, 사실상 우상숭배이지 않습니까? 신자더러 세상에서 믿음의 향기를 피우기는커녕, 최소한 세상 의복을 벗기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들과 똑 같은 의복을 입도록 권장하는 것 아닙니까?
5/9/2008
하나님만 바라보고 산다고 하면서 실제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세상 의복을 하루빨리, 완전히 벗어 버리겠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