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반전의 인생을 살려면?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이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창37:2)
간혹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이 신자마다 세워져 있다면 구태여 신자가 나서서 어떤 일을 이루려 노력하지 않아도 결국은 그렇게 되지 않는가라는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범사를 주관해 가신다면 인간의 노력이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지 미심쩍어 합니다. 하나님 주권과 인간 행위의 역학관계에 대해 분명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해답은 파란만장했던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청년 때부터 온갖 풍상을 겪으며 감옥에까지 갇혔지만 결국은 일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최악에서 최상으로의 극적반전이 단번에 이뤄졌습니다. 그의 생애는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고 스스로 고백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저작한,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짜낼 수 없는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된 한 편의 감동적 드라마였습니다.
그 드라마는 이제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 즉, 하나님의 때가 차매 막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로는 사전에 미리 완벽하게 준비된 극본대로 하나 차질 없이 극적반전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갔습니다. 기획, 캐스팅, 무대 장치, 연출 등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이 전적으로 담당했습니다. 주인공 요셉을 필두로 조연인 형들, 아비 야곱, 애굽의 바로, 시위대장과 그 아내, 죄수와 간수장 등 출연 배우들 모두가 사전에 그 각본의 내용을 전혀 몰랐습니다. 막상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어도 그 다음 장면이 어떻게 전개될지조차 눈치 채지 못 했습니다. 그들 모두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아무 제약 없이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과 어떤 모순과 상치도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계획은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이뤄졌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을 넘어서 완벽한 분이십니다. 완벽하려면 당연히 전지전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지전능은 절대적 능력만 있어도 가능하지만 완벽함은 반드시 완전한 뜻과 계획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신자 각자를 향한 뜻과 계획도 먼저 완전하게 세워져있고 전지전능함으로 그것을 이뤄나가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경영하신 일에 이루지 못할 것은 단 하나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도 요셉 같은 극적반전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신자에게 요구되는, 다른 말로 자유의지로 행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입니까? 극적반전을 이루어야 하므로 아주 뜨겁고도 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어차피 한 치 앞도 못 보는 데다 자유롭게 행해도 되므로 임의대로 일한 후에 그분이 이뤄내는 선한 결과만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전지전능을 넘어서 절대적으로 완벽하신 분이 범사를 주관하므로 항상 그분에 대한 두렵고도 떨리는 온전한 경외심만 가지면 됩니다.
무지, 무능, 연약함 같은 우리의 약한 부분은 그분의 전지전능함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편견, 교만, 완악, 탐욕, 죄성 같은 우리의 굽은 것부터 그분의 절대적 완벽함 안에 내어던져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가 아무 제약 없이 행동하고 있어도 그분의 절대적으로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 된 권능 아래에 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선한 목적이 배제된 힘은 독재 권력으로 오히려 악을 산출합니다. 결과적으로 무능함과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하나님에게서조차 그분의 완전함에는 아예 관심 없고 전지전능함만 추구해선 응답될 리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자유의지로 마음껏 추구할 것은 오직 그분의 완전함이어야 합니다. 그럼 전지전능은 자연히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여전히 불완전한 자유의지로 행하기에 진정한 경외심만 가지면 그분은 더더욱 완전한 계획과 뜻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5/15/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