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부끄러워 숨어버린 예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많은 신자들이 은혜라는 말을 너무 남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의미로는 잘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자연이나 남에게서 받은 고마운 혜택”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단 자기에게 현실적, 정서적, 영적으로 좋은 일만 생기면 몽땅 은혜입니다.
은혜(Grace)의 성경적 의미는 아시는 대로 “도저히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을 말합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적용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아무 공적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만이 참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은 후에 하나님이 베푸신 보호와 인도도 만약 신자가 자기로선 그런 베푸심을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고 정말로 순전한 경외심에서 절감한다면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용어를 정확히 사용하려면 당연히 사전적 의미 대신 성경적 의미에 따라야 합니다. 그럼 그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자격 없이 거저 받은 혜택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면에선 사실상 같습니다. 사장이 회사 수위에게 회사급여규정과는 별도로 과분한 촌지를 주면 은혜이지 않습니까? 성경적 은혜는 무엇보다 하나님에게서만 받아야 합니다. 인간이나 자연에게서 받은 혜택은 아무리 커도, 아무리 자기가 한 일이 전혀 없어도, 특별히 아무리 감격스러워도 성경적 은혜는 아닙니다. 이웃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거나, 특별히 목사의 권면과 기도에 눈물 흘렸다고 쉽게 은혜 받았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만 받은 것이란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현실적인 좋은 일을 베풀거나 정서적으로 감동 주는 일은 인간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타인이든 본인이든, 영적으로 소생시키는 것만은, 특별히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죄 사함을 베푸는 것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합니다. 구원만이 진정한 은혜가 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참 은혜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허물과 죄가 철두철미하게 깨달아져야 합니다.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육신과 지정의와 영혼을 합친 존재 전체가 하나님과 그릇된 방향으로 서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지금 자신에게는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만이 너무나 절실한 상태라는 자발적인, 종교적 습관에 따르거나 남에게 강요되거나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 아닌, 실토가 전제되지 않고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일을 하거나 발생해도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 쪽의 죄와 하나님의 긍휼이 만나 신자의 영혼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 구속의 계획이 실현되어야만 은혜가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믿은 후에 하나님께 받는 보호와 인도도 신자는 여전히 죄를 짓고 모든 면에서 부족한 데도 하나님은 그런 자격 없는 자를 천국시민에 합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 믿음을 연단시키고 또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참여시켜주셨기에 은혜인 것입니다. 단순히 신자에게 좋은 일이, 그것도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했더니, 생겨선 은혜가 아닙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모습도 당연히 성경적 의미가 드러나야 합니다. 은혜는 죄를 바로 잡는 것이기에 반드시 그 영혼이 다시 십자가 예수님께로 향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은혜를 베푸신 근본 목적이 무엇입니까? 소생된 영혼에 의해 품성을 바꾸어 빛과 소금으로 세상 앞에 서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라는 것 아닙니까? 나아가 신자가 당신에게 붙어만 있으면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뤄주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기보다 올바르게 반응만 하면 됩니다.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그것도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이 은혜인데, 다시 그 자격 없는 자가 감히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 쪽에서 뭔가를 해드리겠다는 것은 어불성설 아닙니까? 아무리 그 뜻이 가당타 해도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자가 받은 은혜를 더 오래 간직하거나, 더 많은 은혜를 받으려 소원을 하거나, 스스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해선 원칙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은혜의 정확한 의미를 따지면 인간에게는 그런 일조차 할 만한 자격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것도 오직 그분의 뜻과 계획에 따라 그분 주권으로 베풀어줄 뿐입니다.
신자의 은혜에 대한 가장 정당한 반응은 본문에서 바울이 표현한 대로 “은혜를 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겸허하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바울 당시엔 유대주의자와의 진리 논쟁이 요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자도 무엇보다 그 진리를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하는 대신에 인간의 공로를 보태려는 시도는 너무나 헛되고 틀렸음을 성경 진리를 변증하며 동시에 현실의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증명해 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교리에 문자적으로 집착해 복음 외의 다른 교리나 종교를 정죄만 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십자가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이단이라면 한두 번 설득하다 멀리해야 합니다. 진리를 왜곡 타협 수정하면서까지 섬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그들을 더더욱 안타깝게 여기며 가능하다면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은혜를 폐하지 않는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주님의 십자가를 절대 잊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주께 대하듯 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과 의는 뒤로 접고, 아니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상대의 유익과 나아가 그리스도의 의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아주 힘든 일입니다. 평생을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자주 실패하거나 전혀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주님을 자신의 중심에 모시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오직 그분의 은혜가 자신에게 먼저 임하도록 또 그 은혜가 남들에게까지 전해지도록 간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말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 참 은혜를 받은 자는 날이 갈수록 더 낮아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자아가 깨어지고 또 깨어져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더 비워야 합니다. 그 낮아지고 깨어지고 비워진 빈틈을 그냥 비운 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채워야 합니다. 아니 자기 수양을 위해 비우지 않고 진정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비웠다면 자연히 채워집니다.
바울이 이 말씀 바로 전에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0절) 그는 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고(고전2:2), 그래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후4:10) 하며, 결국은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尊貴)히 되게 하려”(빌1:20) 이 땅의 삶을 살고 있다고, 즉 그 은혜에 반응하고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작금 교회 안에 은혜가 너무 남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타고 거짓 은혜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천사가 전해도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은혜 받고야 말겠다는 구실로 종교 행위, 교회 행사에 치중하는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 겸비해진 신자에게만, 베풀어질 뿐입니다. 죄를 철저히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하게 살아나지 않으면 아무리 좋고 풍성하고 감격스러워도 인간의 현실적 정서적 형편이 나아진 것이지 은혜가 아닙니다. 본문에 따르면 은혜를 빙자해 그리스도를 다시 죽이기에 바쁩니다. 정작 전해야 할 은혜는 못 전하고, 아니 받지도 못하면서 은혜 받았다는 간증이 또 준다는 유혹이 사방에서 난무합니다. 그런 곳에선 예수님마저 너무 부끄러워 한 구석에 숨어버린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5/16/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