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받을 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3,14)
아브라함은 오늘날 모든 예수 믿는 자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자의 조상이라면 응당 베드로나 열한 사도가 되어야 할 텐데도 성경이 아브라함을 그 조상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믿는 자의 조상이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의 선조입니다. 구원 받은 근거를 기독교라는 종교적 차원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고 찾아오셔서 당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고 당신의 언약에 참여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 구원이 먼저였고 믿음은 그 후였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사후에 인정한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그에겐 오늘날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예정, 선택, 계시, 구원 같은 신학적 지식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주 단순하게 믿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계시해 주신 그분의 언약이 실현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무조건 맹종했다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 직접 나타나 말씀하셨으니까 응당 진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그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롬4:5)심을 믿었습니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기 위해서 그가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로선 의롭다 칭함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롬4:17)심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롬4:18)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약속, 즉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며 또 그로 열방의 복의 근원으로 세워준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음에도 믿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우거하는 늙은 나그네로선 불가능한 아니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십자가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공로는 단 하나 없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구원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었기에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사실이 객관적 진리로만 수긍되어선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자기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계속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처절하게 자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땅히 저주 받았어야 할 내 대신에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셨다는 체험적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본문의 “이방인에게 미칠 아브라함의 복”도 믿고 난 후에 더 받을 복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도 십자가 구원의 은혜에 동참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우상에게 열심히 바쳐 복을 받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런 복은 어디까지나 삯이지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주시는 것도 성령의 은사를 따로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그들이 율법을 받았기에 이미 구원 얻은 양 행한 것은 큰 죄이며 대신에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앞에 어떤 구절이 있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9)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받을 복도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 은혜를 외면하면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저주 아래 들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구원 후에 믿음이 할 역할도 오직 그분의 은혜만 소망하는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믿음으로 그분에게 일을 해드려 삯을 받으려 해선 은혜는커녕 오히려 그분의 저주가, 영원하지는 않지만 일시적으로 따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6/2/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