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9:9) 죽음에서 건져진 신앙인가?

조회 수 1110 추천 수 78 2008.06.26 19: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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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건져진 신앙인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得罪) 하리이까.”(창39:9)



많은 신자가 믿음을 가진 후에 종교적으로 아주 경건해지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교회 행사에는 성실과 열심을 갖고 참여하고 분에 지나치게 봉사와 헌금을 합니다. 또 교인들 사이에 평판을 좋게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에도 충실히 따르니 자연히 기도와 말씀에도 능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고 아주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밖에서의 행동거지와 평판이 교회 내의 그것과는 영 딴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팎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몇 가지뿐입니다. 믿음을 종교적 열심과 혼동했거나, 하나님에게만 잘 보이면 만사는 오케이일 것이라고 착각했거나, 아니면 믿음도 없이 교회마저 인간적 욕심을 채우는 곳으로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셋 다 아주 틀린 것입니다. 특별히 앞의 두 가지 이유는 그렇게 가르치고 부추기는 일부 목회자들의 잘못이 더 큽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했던 요셉에게 음란한 욕정을 품고 동침하기를 요구했습니다. 그에 대해 요셉이 거절한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우선 보디발이 명시적으로 금한 것은 식료뿐인데 그 아내도 금했다고 합니다. 남의 소유에 손을 대는 것, 특별히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것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한 윤리이자 상식에 속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윤리와 상식이란 세상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규율로서 구태여 종교적 가르침으로, 아니 가정과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는 또 간음하게 되면 일차적으로 보디발에게 득죄하는 것임에도 그런 언급은 않고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라고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상관없이 인간의 양심으로 제정된 윤리와 상식도 사실은 양심 자체를 그분이 인간에게 심어 주신 것이므로, 비록 양심이 불완전하므로 윤리와 상식도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모든 죄는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심지어 의로운 일마저, 욕심과 자존심을 스스로 채우려는 데서 기인합니다. 욕심과 자존심이란 혼자서는 결코 채울 수 없으며 반드시 다른 사람의 그것을 갉아 먹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또한 욕심과 자존심을 채우려 드니까 필연적으로 상호 시기, 질투, 분노, 저주가 발생하며 갈등과 다툼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요셉이 거절한 이유를 곰곰이 따져 보십시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지 않습니까?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선악과는 하나님의 권위의 상징으로 그것을 따먹는 것은 단순히 명령을 어긴 죄를 넘어서 바로 그분을, 그것도 선악과 외에는 모든 것을 은혜로 베푼, 대놓고 배역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보디발의 아내는 보디발과 동격입니다. 단순히 간음이라는 윤리적 죄를 넘어서 주인을, 그것도 다른 모든 것을 요셉 임의로 하게끔 허락한, 직접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세상의 윤리와 상식을 위반해 인간에게 짓는 죄도, 아니 모든 죄를 하나님께 죄 짓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바꿔 말해 그는 보디발, 아니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하듯 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자기 혼자 선해지거나 형통하려는 종교적 열심으로 절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이웃을 살려내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현실적 손해가 발생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하듯 한다는 것이 신자가 최고의 정성과 재물을 바쳐서 무조건 희생하라는 단순한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잘하면 사람들에겐 잘못 해도,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종교적으로 경건하면 교회 밖에선 세상 식으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즉,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사는 자는 자연히 세상에서 사람들에게도 잘하게 됩니다. 우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죄인으로 그분의 은총과 권능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음을 절감하기에 다른 이들을 항상 긍휼이 여기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신자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시고 키워주시며 나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자주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랑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마저 하나님이 주십니다.

본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청을 거절한 것이야말로 요셉이 자기 주인 보디발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푼 것이지 않습니까? 또 비록 보디발이 오해하여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나중에 모든 오해가 풀리고 난 후에 두 사람의 관계는 정말 세상 어떤 것으로도 방해 받을 수 없을 만큼 온전히 믿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자신을 억울하게 옥살이 시켰다고 그에게 복수했을 리도 없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요셉의 믿음을 그만큼 견고하게 세워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간음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찌 이 큰 악”이란 말은 내게 어떤 손해가 닥치더라도, 시쳇말로 죽었으면 죽었지 하나님을(주인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가 아담의 선악과 사건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불명합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거절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절대 선악과를 따 먹지 않겠다고 말한 셈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면 자신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에 겪었던 모든 어려움 가운데, 형들이 구덩이에 던져 넣었을 때부터 혈혈단신 노예로 이방 땅에서 생존하고 이 자리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단 하나도 가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생한 체험에 의해 온전한 믿음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다른 말로 모든 사람에게 주께 대하듯 하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요셉이 범사에 형통한 최고의 비결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동행해주었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신자는 없지 않습니까? 정말로 죽었으면 죽었지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모습으로 실제 삶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걸만큼 절대적인 믿음이었지 교회에서만 경건한 모습을 유지하는 정도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실제로 죽을 뻔 했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에 그는 이제 꼼짝 없이 죽었다고 반쯤 체념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더니 즉시 살려 주었습니다. 그 이후 노예로 지내는 동안에도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얼마나 많이 위험한 고비를 넘겼겠습니까? 죽었다 살아난 신앙이기에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게 된 것이며 또 주위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모습으로 대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은 요셉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때로는 현실적으로도 사방이 완전히 막혔던, 자가 예수님의 보혈로 다시 살아났지 않습니까? 이제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므로 주를 위해선 언제 죽어도 개념치 말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만 경건하면 세상 윤리와 상식으로도 득죄하고 심지어 자기 의도 자랑하지 못하는 꼴 아닙니까? 그런데도 종교적 열심만 동원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연유입니까?

경건은 모양만으로는 하나님께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부터 동원하려 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세상 사람들에게 죽었으면 죽었지 득죄하지 않으면 그분의 능력은 자연히 따라 오는 것입니다.

6/27/2008

김광찬

2008.06.27 01:34:15
*.169.140.105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아래에 구원받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 바로 저입니다.
이제 후로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서 주님의 기쁨이 되길 소망합니다.

Junglan Pak

2008.06.29 06:58:53
*.132.153.19

이 글을
줄줄이
줄줄이
외워서
한인 기독교신자에게
주께서 좋아하는 방법이 절대로 아니더라 하더라도
수 억번을 되풀이 하여 "머리"에다 깡그리 집어 넣고 싶을 정도의 험악한 욕망이 생길정도입니다.
깊게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너무나 모자라거나 왜곡된 지식으로 (물론 제대로 아시는 분이야 예수님과 성령님밖에 없겠지만) 바로 그러한 왜곡된 하나님을 선포하겠다고 덤뎌드는 그 결단?있는 모습들에 실로 감동을 받고 주께서 한국기독교역사를 통해 드러내신 그분의 크심에 '할렐루야'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미 요섭과 야곱의 하나님을 배우며 성장을 했어야 했던 시기가 너무나 오래 지났습니다. 무지기 갑갑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한국교회를 향하신 사랑과 그분에게만 있는 온전한 권능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의 한국교회를 향한 간구와 하늘 나라의 확장에 대한 형제자매님들의 기도제목과 모든 사역들이 흔들리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제가 아니 우리 모두가 주께서 내실 사막의 길을 바라보며 황무지에 놓으실 물길을 바라보며 기도할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헤아릴수 없는 은혜가 목사님과 가족과 또한 모든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족된 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특히 사랑하는 만강의 주재주 이신 그리스도께서 목사님의 건강을 지켜주시며 복음안에서의 온전하고 권세있는 평안을 모든 가는 길과 하시는 일에 토대로 깔아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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