삯군 목자 구별법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離間)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갈4:16,17)
최근 개신교 내에서조차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무시하고 화합만 강조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는 모든 자를 용서하고 품어주어야 하는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뜻도 바로 그것이었다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와 대화하여 포용하고 심지어 그들에게도 진리가, 즉 구원이 있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정확하게는 성경의 진리를 논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아들이 마약에 중독되어 갱들과 어울려 다닌다면 무조건 포용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끝까지 변함없지만 마약 중독을 치료하고 갱단에서 발을 빼도록 최선을 다해 권면하며 치유하고 기도해줄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타종교인과 불신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사랑하는 것과 그들이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런 기초적인 상식도 모르는데 어찌 진리를 감히 논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성경의 진리 자체를 제대로 모르니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오직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이교도 심지어 제사장, 바리새인들을 그 영혼이 미혹되어 있음은 안타깝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들이 옳다고 인정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요컨대 십자가상의 한 강도는 낙원으로 함께 데리고 갔지만 다른 강도에 대해선 아예 언급 아니 상대조차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성경이 어떻게 선언하고 있습니까?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福音)을 전하면, 우리나 혹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9)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면 심지어 사도들 자신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믿되 율법의 요구를 덧붙이자는 유대주의자까지도 그 저주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은 복음에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아예 없어도 복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니까 저주를 곱으로 받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까지 저주의 대상에 포함시켰는데 오늘날의 목회자나 신학자야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기어이 그렇게 주장하려면 나는 성경의 진술을 믿지 않는다고, 즉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먼저 밝혀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상식 없음이 또 다시 증명됩니다.
본문은 유대주의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진짜 동기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저희 즉, 인간을 향한 열심을 고취시키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진리 전파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어야겠다는 열심과 사랑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유대주의자와 구원관이 같은 오늘날의 자유주의 신학자 목회자들은 비유컨대 아들이 갱들과 어울리다가 감옥에 들어가도 잘못은 전혀 꾸짖지 말고 오히려 잘한다고 부추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그러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인데 사랑의 종교를 너무 강조하다가 오히려 참 사랑을 실종시켜버렸습니다. 대신에 그 자리에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도 가만 놔두는 방임이 들어서게 했습니다. 아들이 좋아서 한 짓이니까 절대 말리지 않고 평생을 그대로 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우깁니다. 아들을 죽이는 짓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문을 역으로 해석하면 진리로 인해 이간이 생기는 것은 옳다는 뜻이 됩니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아니 있는 그대로 정확히 전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이간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간되어도 아무 문제없다, 심지어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을 바란다고까지 확대 해석해선 절대 안 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당연히 비진리이기에 진리란 본질적으로 항상 배타성을 내포하게, 정확히 말하면 당연히 배타로 나타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이간은 항상 복음으로 인한 결과로 나타나지 인간이 시도하는 목적이 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복음은 오히려 진리 안에서 모두가 화합되기를 도모합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그 마음으로는 사랑하시되 그 사랑을 복음 안에서만 나눠주시고 또 실현되어지기 원하십니다. 바울이 지금 어떻게 변증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참 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진리를 전했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나빠지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비유컨대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회개하여 새 삶을 살라고 타이르거나 꾸중한다고 원수 사이가 될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더 정상적이고도 사랑으로 다져진 관계로 회복되지 않겠습니까? 부모로 인정하지 않거나 우습게 보는 아들만이 끝까지 그 권면에 귀를 막을 것입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네 인생은 네 것이니 네 맘대로 살라고 방임하는 것은 아들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매번 찾아가고, 사식을 넣어주고, 보석금을 구해 출소시키고, 또 요양원에 보내야 하는 부모로서의 책임이 싫고 귀찮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성경대로 전하지 않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아니 그 하나님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사도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안타깝고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진리 밖에 나가면 자연히 진리 안과 밖은 구분되어집니다. 십자가야말로 온전한 참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니까 하나님의 사랑 바깥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십자가로 이간을 시켰거나, 참 복음을 전하는 사도 때문에 그들이 저주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입으로는 앞장서서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사랑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이유는 인간들의 열심을 자기들에게로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아주 잘 봐주어서 인간들의 비난과 멸시만은 면해 보자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진리보다, 즉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전하기보다는 자기 입장과 체면만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무서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경고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29, 32-33)
예수님이 지금 자유주의 목회자나 신학자만을 탓하고자 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옳다고,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해주는 분이라고 하니까 뭔가 더 합리적이고 사랑도 더 많은 것처럼 여겨져서 따르는 신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부드럽게 표현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눈치를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신앙의 자유를 따지는 문제로만 여겨집니까? 그렇다면 바로 자기 아들이 나쁜 짓을 해서 감옥에 갇혔는데도 가만 놓아두는 것도 넘어서 잘하는 짓이라고 부추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신자가 참 목회자를 선별할 때에는 교회 크기나 세상 평판이 어떠하든 오직 십자가 진리만 담대히 선포하는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따져 보아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신자도 그 진리가 무엇인지 열심히 배우고 따져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다른 복음에 빠질, 즉 하나님의 저주를 면하지 못할 위험성이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직도 참 복음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7/8/2008